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동화 같지만 당대의 정치 사회와 인간 문명을 환상적인 모험담을 통해 비판한 풍자소설이다. 소인국, 릴리푸트에서 일어난 일 중에, 왕비의 궁이 불에 붙어 사람들이 불을 끄느라 허둥지둥하는 일이 있었다. 이때 ‘산 같은 인간’ 걸리버는 오줌을 누어 3분 만에 불을 꺼버린다. 걸리버의 오줌이 아니었으면 궁궐 전체가 소실되고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는데 걸리버가 큰 공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소인국 궁궐 내에서는 오줌을 누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이 있었고 걸리버는 그 법을 위반한 것이다. 국왕과 대신들은 법을 어긴 걸리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를 시작한다. 화재를 진압해준 공로를 참작하여 그에게 선처를 베풀 것인가, 궁궐에 오줌을 눈 것은 엄연히 법을 어긴 행위였기 때문에 법대로 처리해야 할 것인가, 소인국 건국 이후 아직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최대의 난제를 풀어야 할 상황이었다. 결국 소인국 각료회의는 걸리버를 굶겨 죽이기로 결정했지만 그 이면에는 대신들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정치인들의 계산된 의도가 국가의 안위나 국민의 상식보다 우선하여 정책을 결정하고 법을 집행하는 행태를 꼬집은 것이다.
인간 사회에는누가 만들었든언제나 법이 있었다. 민주정치를 하고 있는 지금은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를 법이 감시하고 심판한다. 그러나 누구에게 어떤 법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는 이른바 법조인이라는 사람들이나 정치인과 같은 소수 권력자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이해타산에 의해 법이 왜곡되는 일이 많고, 따라서 다수의 국민들은 강 건너 법구경만 하다가 법으로 얻어맞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민주정치라 하지만 국민이 주인이 아니고 법이 주인 행세를 하는 법주정치가 되었고, 그 법은 소수가 독점하고 있다.
아내가 도로교통법을 위반했으니 당연히 그것에 상응한 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왜 벌을 받는 기분이 아니고 바보가 된 느낌일까. 지갑에서 7만 원이란 재산이 빠져나가서가 아니다. 법을 위반하면 벌을 받고 앞으로는 법을 잘 지켜야겠다고 반성하는 태도가 되어야 할 텐데, 반성은커녕 화가 난다. 법을 독점하고 있는 자들의 법치가 제멋대로이기 때문이다.
법은 ‘산 같은 인간’ 걸리버도 굶어 죽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물론 걸리버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헛소리 같은 말은 관심도 없다는 듯 이웃 나라로 도망을 간다. 그러나 국민들은 한 번 법망에 걸려 들어가면 빠져나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어떻게든 법의 심판을 받는다. 아내의 교통법규 위반 통지서를 보면, 차량 번호판 사진과함께 적색 신호를 위반했다는 뜻인지 빨간색 신호등 표시가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어,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한다.
하지만 권력자들은 다르다. 동영상에 나타난 얼굴이 누가 봐도 범죄자 그 사람인데 어떻게 된 것인지 슬그머니 빠져나간다. 남의 글을 훔쳐와 허접스러운 논문을 쓰고 박사 학위를 받았어도 모르쇠로 버티는 박사님도 있다. 방송을 통해 많은 국민들이 보고 들은 후 국민들 대부분은 ‘그렇게’ 알고 있어도, 정작 본인은 자신이 ‘그렇게’ 말한지도 모른다고 해서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분도 있다. 그들은 희한하면서도 해괴한 논리로, 사실은 논리라기보다는 궤변을 들이대며 상식을 덮어버린다. 법은 그들의 법치놀음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걸리버는 그의 괴력을 발휘하여 소인국을 힘으로 지배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상식적으로 행동한다. 소인국, 릴리푸트가 걸리버의 선한 괴력과 상식을 이용했다면 위대한 국가로 우뚝 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수 기득권자들의 권력 싸움으로 릴리푸트는 그 기회를 놓치고 만다. 법은 그들의 권력놀음에 이용당했을 뿐이었다.
국민으로서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하는 것은 맞는데, 솔직히 그러기가 싫다. 저들은 법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데 나만 착해야 하는가, 나만 바보처럼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우리의 준법 의식을 흐리게 만든다. 농락 정치, 상식이 없는 못된 정치인은 국민을 그렇게 이기적이고 어리석게 만들고 국가의 품격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끝내는 국민의 상식과 괴력으로 민주정치는 회복되고 ‘같잖은’ 정치인들은 무대에서 사라진다.
1960년생 아내는 20년 가까이 운전하면서 처음으로 '딱지'를 떼였다. 몇 마디 투덜거리며 변명을 하긴 했지만, 교통법규 위반 과태료를 기일 내에 납부했고 반성도 했다. 단지 법을 지키려는 준법정신 때문만은 아니었다.같잖은 정치인들과 달리 우리는 상식이 있고 그 상식이 민주정치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는 시민의식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