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서쪽에서 떴다. 동쪽은
천년 묵은 나무에 가리어 해가 뜰
틈이 없었고, 하루 종일 우중충한 연막을
헤치며 남북으로 오락가락하다가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서쪽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해는 그곳이 서쪽인 줄도 몰랐다
아끼고 모아 둔 빛을 조금이라도 비출
구멍이 있다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한 번만이라도 해다운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해는 서쪽이 편안했고 제자리를 잡았다는
느낌에 마침내 모든 빛을 쏟아내었다
새벽잠을 이겨 내고 먼 길 걸어와
기어코 영광의 빛을 보게 된 해는, 그러나
휑한 눈을 껌벅이며 잠시 울먹인 듯하더니
노을을 붉게 뿌려 놓고 이내 지고 말았다
서쪽에서 뜬 해가 서쪽에서 뜬 것은
알고 보니 노을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눈이 부시다고 석양빛을 등진 이는
노을이 아름다운 이유를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