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보다 더 가팔라진 산을 넘는 아빠
아빠와의 기억들을 하나씩 기록해보려고 하니 사건마다의 시간 순서상 보다는 기억의 선명함에 따라 글을 적게 된다.
아빠의 췌장암 2기 소식은 내가 19살 때, 2019년 여름에 집안 전체에 공표되었다. 그 이후 아빠의 몸은 어떨 때는 삶과 죽음의 선 위에 위태롭게 서있었고, 어떨 때는 가족에게 완치라는 무한한 희망을 주었다.
아빠는 항암 1년 차가 되었을 무렵, 몸이 건강해졌었다. 마치 췌장암을 이겨낸 것만 같았았다가 그 이후 갑자기 몸이 또 나빠졌다. 그 당시 아빠의 몸은 마치 서서히 망해가는 주식 그래프 같았다. 갑자기 10% 정도 주가가 올라 희망을 가지면 그다음에 -20% 손실을 보았고, 이후 8% 오르면 그다음 -25%의 손실을 내며 오르락내리락하면서도 결국에는 언제 상장폐지를 할지 모를 만큼 우하향 그래프를 그려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약간의 상승세에 우리 온 가족은 희망이라는 전재산을 걸었다.
췌장암 선고를 받고 난 뒤, 항암을 하고 나면 한 동안 몸이 좋았을 때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우리 가족은 종종 집 앞의 작은 산에 갔었다.
그 산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있었고, 5살 때부터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등산을 했고, 유치원생 때 아토피가 심했을 때엔 피톤치드를 마셔야 한다는 명목으로 갔던 숲 체험장이었고, 이후 중학생 때 성인 아토피가 발발했을 때에는 체력을 기르고 땀을 빼야 한다는 명목하의 자연 헬스장이었다.
아빠의 병이 발발하고 1년 정도가 되었을 무렵 아빠는 대부분의 시간을 안방에 누워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에는 방을 나와 거실을 좀 돌아다닐 수 있었고, 운 좋게 항암이 잘되고 나면 밖에도 나갈 수 있었다.
그날은 아빠가 오랜만에 등산을 가보자고 했던 날이었다. 아빠의 다리는 예전보다 가늘어져서 무릎뼈가 훤히 보였고, 허벅지는 더 이상 걷고 뛰는 제 기능에서 벗어나 마치 갑자기 드러나게 된 뼈가 행여 부끄러울까 싶어 감싸 안아주는 정도로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빠는 그 1년 동안 본인 나이. 50세에서 20살 정도는 더 나이가 들어버렸다.
윗등은 조금 말려들어가 구부정했고, 머리는 하얗게 세어있었다. 행여 감기라도 들까 싶어서 모자를 쓰고 마스크도 낀 아빠와 함께 등산을 나섰다. 어린 나의 손을 잡고 문을 잡아주던 아빠는 이제 내가 그 손을 잡고 문을 열어드려야 했다.
예전에 아빠가 먼저 길을 가면서 조금이라도 언덕이 있으면 위에서 내 손을 잡아주고 끌어주었다. 아빠의 두꺼운 손이 내 손을 꼭 잡고 힘껏 당겨주었을 때 온 마음이 든든해지는 게 좋아서 가끔은 높지도 않은 언덕을 오르는데도 괜히 힘든 척을 하고 또 가끔은 힘겨루기를 하려는 듯 오히려 아래에서 아빠의 손을 잡아끌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웃으며 내가 힘을 얼마나 주든 간에 나를 끌어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감히 혼자 길을 걷게 하기도 두려울 만큼 유약해진 아빠가 행여 넘어질까 뒤에선 동생이, 앞에선 내가 앞뒤로 경호를 하며 길을 나서게 되었다. 웬 돌부리는 그렇게 많은지, 왜 나무뿌리들은 그렇게들 제멋대로 자라 있는지, 겨울을 나기 전 소복하게 털어낸 소나무의 솔잎들은 또 왜 그렇게 미끄러운지 난 처음으로 숲의 나무들이 아닌 아빠를 넘어뜨리려 만들어진 것만 같은 흙바닥만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혹여 숨이 가빠지지는 않을까 마스크 속에 희미하게 들리는 아빠의 숨소리만 열심히 듣고 있었다.
아빠는 몇 미터를 열심히 걷고 나면 곧이어 숨이 차다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혹여 내가 조금이나마 당황을 하면 아빠가 부끄럽거나 두려워할까 봐 일체 내색을 하지 않고 그냥 등에 손을 대어주었다. 어느새 아빠는 등을 토닥이는 그 작은 맞닿음에도 고통을 느꼈고, 난 그저 두 손을 등 뒤에 대어 손의 온기만 줄 수 있었다. 아빠는 다른 사람의 손은 찬데 오히려 수족냉증이 있는 내 손이 따뜻하다며 여러 번 등 뒤에 손을 대어 달라고 했다. 어쩌면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은 유일하게 내 손이 따뜻했었나 보다.
아빠는 곧이어 쌔액쌔액 숨소리를 내쉬다가 다시 길을 걸었고, 그러면서 지금까지 가장 어린아이 같은 미소와 눈동자로 본인의 과거 이야기를 꺼내주었다.
내가 알고 있기로, 아빠는 9살에 아빠의 아빠 즉 나의 할아버지를 여의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할아버지는 인물이 좋고 키도 크셔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무슨 단체의 ’ 장‘을 맡으라고 여러 번 추천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 할아버지가 아빠가 9살 때 논두렁에서 포대에 쌓여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했다. 당시 군부정권 시대였고 종종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 했다.
아빠는 나에게 그런 할아버지에 대해 처음으로 다른 이야기를 해주었다. 본인이 더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이런 산에서 꿩사냥을 떠났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총을 들면 아빠는 그저 그 뒤를 따라다니면서 꿩이 있나 없나 유심히 보곤 했다고 했다. 간혹 운이 좋으면 정말 꿩을 잡기도 했노라고 말하는 아빠의 눈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 등 뒤의 어린아이의 눈이었다. 반짝이면서 동시에 그때의 설렘과 기쁨이 보였고 마치 아버지와 단둘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 상자를 살짝 열어본 듯했다. 그리고 상자 속의 반짝임은 바로 그다음의 기침과 함께 닫혀버렸다.
아빠로부터 할아버지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신나 하는 그 눈빛도 처음이었다. 마냥 순수했고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그 눈빛아래 점점 약해져 가는 아빠의 몸이 미웠다. 아무리 어른이고 부모가 되어도 어릴 적 그들의 부모에게 받았던 사랑은 그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이 잠시 그 위에 먼지가 쌓일지언정 마음 깊이 평생 안고 가는 보석이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 글을 써가고 있는 나도 그런 아빠에게서 받은 사랑을 바탕으로 추억들을 기록하고 그렇게 사랑은 계속해서 흘러가는 거구나 싶었다.
아빠와의 잠깐의 이야기를 뒤로하고 우리는 항상 등반하던 정상의 절반의 절반에서 도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 아빠가 예전에 할아버지랑 꿩사냥을 했었대~! 라면서 애써 아무 걱정 없는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로 아빠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