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절망
우리 집은 예전부터 무속을 너무 믿었다.
할머니가 어디 다녀오셨나 싶으면, 손에 꼭 부적이 들려 있었고
어느 날은 내 이야기를 하고 오셨다 했다.
무당이 내 앞날을 점쳤단다.
“선생님 될 팔자래. 사람들 가르치는 쪽으로 가야 한대.”
그 말을 듣고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속으론 웃었다. 그 조용한 비웃음.
‘내가 뭘 가르쳐, 내 인생도 모르겠는데…’
어릴 땐 배우가 되고 싶었다.
근데 얼굴도 별로고, 연기력도 없고,
이 가난한 집안에서 꿈은 사치라는 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금방 알게 됐다.
그래서 접었다. 아주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그러다 또 언젠가는 패션모델이 되고 싶었다.
키도 빠르게 컸으니까.
하지만 중학교 즈음, 키가 멈췄다.
162. 딱 거기서.
“모델은 안 되겠다”
그 한 마디에도, 이상하리만큼 눈물이 나질 않았다.
그땐 이미 익숙했나 보다.
포기하는 일에.
미술을 해볼까도 했지만,
그림을 그리면 마음이 더 어지러워졌다.
스케치북 위에 빨간색 크레용으로
온통 선만 긋고, 찢고, 또 덧칠하고.
누가 보면 그게 예술이라 했을지 몰라도
내겐 그냥, 고통의 낙서였다.
나중엔 크레용 쥐는 것도 버거워서
그마저도 버렸다.
유치원 선생님도 되고 싶었는데
사춘기 즈음, 이미 엇나가 버렸다.
성적은 바닥이었고,
내 성격으론 아이들 앞에서 웃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람 앞에만 서면 불안했고,
조금만 시끄러우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과일 한 번 제대로 깎아본 적 없고,
은행에 가서 통장 하나 만들 줄도 몰랐다.
보험, 세금, 계약서—
그런 건 학교에서 한 번도 안 알려줬으면서,
지금은 그걸 모르면 ‘무능한 어른’이 돼버린다.
학교에서 정말 배웠어야 할 건
수학도, 과학도, 외우기 바빴던 교과서 문장도 아니었다.
진짜 필요한 건,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상처를 받았을 때 어떻게 아물어야 하는지.
사람이 싫어졌을 때 어떻게 버티는지.
그런 걸 누가 좀 가르쳐줬으면 했다.
근데,
아무도 안 가르쳐주더라.
학교에선 조용히 있는 애로,
집에선 눈치만 보는 애로,
친구들 사이에선 ‘그래도 착한 애’로 남으려 했다.
말 잘 듣는 아이.
민폐 끼치지 않는 아이.
무표정한 얼굴로 ‘난 괜찮아’를 달고 사는 아이.
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는 생각을 자주 했다.
지하철에서 누가 나를 밀면,
그냥 그대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계단을 내려가다 발이 한 칸 어긋나면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다고.
그런 상상을 했다.
그런 상상들이 내 마음을 오히려 더 편하게 만들었다.
살아야 한다는 압박보다,
그냥 없어지고 싶다는 상상이 더 위로 같았다.
그러다 또,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해서,
어느 밤엔 베개를 물고 엉엉 울었다.
어릴 땐 그나마 내가 잘한다고 느끼던 것들이 있었다.
춤, 노래, 상상.
근데 그런 것들은
어른이 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게 되더라.
"그게 뭐 밥 먹여주냐"는 말 앞에
모든 재능이 무력해졌다.
그래서 남은 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입시에서,
연애에서,
친구 관계에서,
가족 안에서조차
나는 항상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밤이면 더 이상 울 힘도 없이
침대에 털썩 누웠다.
휴대폰을 열었다 닫기를 수십 번.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나 오늘 너무 힘들었어” 그 말 하나 할 사람이 없었다.
왜냐면,
다들 바쁘니까.
각자의 힘든 얘기로 꽉 차 있었으니까.
내 아픔은 항상 순서를 놓쳤고,
내가 말 꺼낼 타이밍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점점 말을 잃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
말하면 더 외로워질까 봐.
그날 밤,
나는 다시 꿈을 꿨다.
엄마도, 할머니도, 콩이도, 두부도 나오는 꿈.
오랜만에 모두 모여 앉아
정말 소박한 밥을 먹는 꿈이었다.
마당 한 켠에 작은 나무 그늘이 지고,
엄마는 고등어를 굽고 있었고,
나는 수박을 깎고 있었다.
항상 못하던 그 일인데,
이상하게 손에 익숙했다.
두부는 내 발 밑에 누워 있었고,
콩이는 꼬리를 치며 나를 보며 웃었다.
그때 엄마가 나를 보고 말했다.
“넌 잘하고 있어. 진짜 잘하고 있어.”
눈을 떴을 땐,
입술이 젖어 있었다.
꿈이 너무 따뜻해서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문득,
이 꿈이 진짜였으면 좋겠다고
처음으로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런 꿈은
언제나 가장 잔인하게 깨지기 마련이다.
현실은,
다시 혼자인 방,
텅 빈 이불,
그리고 아무도 없는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