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여름, 피렌체를 여행했다. 그때 묵었던 아파트 주인은 직접 와서 자기가 살던 집이라며 일일이 구경시켜 주고, 지도에 펜으로 동그라미를 쳐가며 꼭 봐야 할 궁전, 미술관, 광장 등을 알려주더니, '한 마디로, 미켈란젤로다. 미켈란젤로만 보면 된다'고 친절하게 알려줬다. 현지인의 이 말은 두꺼운 여행 안내책 중 겨우 두어 페이지 밖에는 마땅한 정보가 없던 나에게 가장 선명한 여행 가이드가 되었다.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죽자, 미켈란젤로(1475-1564)는 이웃 석공의 아내에게 맡겨졌다. 자연스럽게 이 천재는 돌을 깎으며 스스로 타고난 재능을 키웠고, 공부해서 집안에 보탬이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며 끝내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그림보다는 조각이 더 우월하다 여겼던 미켈란젤로가 14살 즈음에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이 운영하던 조각학교에 들어가서 로렌초 공의 눈에 띄게 되면서, 그는 르네상스의 한가운데를 지나며 미술사에 큰 획을 그었다. 덕분에 피렌체 곳곳에는 미켈란젤로의 발자취가 남아있었다.
미켈란젤로는 평생 쉬지 않고, 눈을 뗄 수 없는 수많은 그림과 조각을 탄생시켰다. 경제적 궁핍과 지속적으로 돈을 요구하는 가족과의 불화, 건강문제 등의 고통에 시달려가며 미켈란젤로가 교황들의 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렸던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높고 거대한 천정화 '천지창조'와 벽화 '최후의 심판'은 인류사에서 다시 없을 불후의 명화가 되었다. 그의 천재성은 그보다 훨씬 앞서 조각에서 이미 우뚝 섰다. 피렌체를 떠난 25살 미켈란젤로가 로마에서 어느 추기경의 주문으로 제작한 삐에따(Pieta)는 대리석을 밀가루 반죽처럼 자유자재로 주무르는 이 젊은 예술가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이 조각의 빼어난 정교함과 아름다움은 시대를 초월하여, 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아들 예수님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일으켰고, 억울하고 고통스럽게 죽은 외동아들을 안고 한없이 깊은 슬픔에 잠긴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인간적 연민을 낳았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누구든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를 기도하게 만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공항은 밀라노였다. 호텔에 비치된 도시의 안내서에서 우연히 발견한 미켈란젤로의 흔적을 쫓아서, 마감시간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론다니니 삐에따를 보러 갔다. 어두운 방 한 가운데 따뜻한 조명을 받으며 홀로 세워진 삐에따는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기대듯이 아들을 품에 안고 쓰러지지 않도록 버티는 듯한 모습이었다. 88세 미켈란젤로가 죽기 직전 마지막 순간까지 조각했던 이 미완성의 삐에따는 그가 젊었을 때 조각했던 삐에따의 치밀함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매우 간결하고 투박했지만, 형언하기 힘든 뭉클한 감동을 몰고 왔다. 어머니 품에 안긴 예수님과 아들을 안은 마리아의 두 몸이 구분이 어려울 만큼 한 덩어리가 되어, 끊기지 않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한 편의 시 처럼 상징적으로 표현되면서, 무려 400년도 더 지난 조각이 초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평생 외롭고 고단했을 미켈란젤로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어려서 여읜 그리운 어머니의 품에 안기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조각한 모습이 저 삐에따가 아닐까 상상해 보았다.
부모와 자식은 스스로 선택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타인이다.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고 사랑받길 원하기 때문에, 상처를 주고 받기 쉽다. 부모도 자식도 평범한 인간이며, 부모에게도 자식에게도 똑같이 자기만의 세상이 존재한다. 부모도 자식도 모두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부모가 자식의 삶까지 두 배로 살 수 없고, 자식이 부모의 세월을 되갚을 수 없다. 자식은 그 존재만으로도 부모의 사랑을 이미 다 갚았으며, 부모는 자식이 가장 힘들 때 돌아가고 싶은 영원한 집이다.
아낌없이 주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딸로서, 딸에게 아낌없이 주고 싶은 엄마로서, 삶을 깊이 성찰하는 마음으로, 오래 전 써두었던 글과 몇몇 새 글을 다듬어 '엄마의 잔소리 노트'를 썼고, 이제 마침표를 찍는다. 기쁘고 슬픈 이야기를 공유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이 글을 통하여, 오래 아프던 내가 위로받은 것처럼, 나의 어머니와 딸, 그리고 독자들께서도 위로받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