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발견

우리들의 수상록 |

by MeeyaChoi

누구에게나 소중한 책이 한 권쯤 있다. 내게는 아마도 톨스토이(1828~1910)의 '행복의 발견'이 그 후보가 아닐까 싶다. 수없이 이사를 다닐 때마다 책을 버리고 또 버렸지만, 대학 졸업 즈음 헌 책방에서 산 후로 한 번도 제대로 읽지 않은 '행복의 발견'은 신기하게도 비좁은 내 책꽂이에서 매번 살아남았다. 이 책은 톨스토이가 죽기 얼마 전인 80세에, 평생 읽었던 사상가들의 저서들 중 감명 깊었던 대목들 뽑아서 적고, 자신의 생각을 몇 마디 곁들여 출판한 인생론 에세이다. 제목은 '행복의 발견'이지만, 톨스토이는 '죽음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위에 대한 중요성을 확실하게 구별해 준다'며, 죽음에 대한 명상으로 에세이를 시작한다.

살다가 특히 많이 아팠던 때가 있었다. 어느 날, 이 년쯤 다니던 큰 병원 의사 선생님이 나 같던 환자가 2주 전에 죽었다며, 치료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말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와 아직 초등학교도 졸업 못한 딸의 얼굴이 겹쳐서 떠올랐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죽기 전에 뭘 할지 생각했다. 여행을 갈까, 시골로 내려갈까 고민했지만, 둘 다 나 같은 겁쟁이한테는 마땅치 않았다. 갑자기 생각하려니 막막해서, 뭐든 그때 그때 하고 싶은 일을 조금씩 해보기로 했다. 햇빛을 쫓아 걷고, 딸이랑 만화책을 빌려다 읽으며 까르르 웃고, 맛있는 거 해 먹고, 짬 내서 그림도 보러 다니고, 짧은 글도 썼다. 일도 할 수 있는 만큼 최소한으로 였다. 언제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중요한 일과 하고 싶은 일, 안 해도 되는 일에 대한 선택이 또렷해졌다. 그리고 한 반년 뒤, 검사결과와 나를 한참 번갈아 보던 의사 선생님이 '다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고 말했다. 긴 병이 나았다!

꽤 멀쩡진 나는 음을 잊고 멋대로 살다가 그만, 또 온몸을 꼼짝도 못 할 만큼 병들었다. 오랜 치료에도 차도가 없자 병원의 젊은 의사 선생님이 고개를 저으며 '안 되겠어요' 하고 말하여, 몹시 실망한 나는 그즈음부터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남편이 나를 더 큰 병원으로 데려가서, 연세 드신 딴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내내 무표정하게 눈도 안 맞추는 내게 의사 선생님은 '왜 다시 치료받기로 했어요?'하고 물었다. '살고 싶어서'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지만, 이 당연한 걸 왜 묻나 싶었다. 내가 '가족들이...' 하고 시무룩하게 대답하니, 남편이 얼른 '많이 아파요'하고 대신 대답했다. 새로운 치료에 대한 실낱 같은 희망이 생기면서, 뻣뻣한 몸을 어떻게든 좀 움직이려다가 뒤로 넘어지는 바람에, 그만 오른 손목이 뚝 부러졌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힘든 일이 있으면 '죽겠다, 죽고 싶다, 죽을 거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막상 죽을 거 같은 순간이 오니, 살고 싶었다. 그러다 눈에 띈 누렇게 빛바랜 톨스토이의 '행복의 발견'을 꺼내 처음으로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그 어렵던 글들이 다 내 마음 같이 잘 이해됐다. 톨스토이의 말처럼 죽음을 마주 보니, 행복의 기준이 달라졌다. 매일 어기적 걸음으로 한 발자국씩 움직여 동네 시장에 가서 사람들이 와글와글 먹고사는 걸 보고, 왼손으로 젓가락질, 글씨 쓰기를 시작했다. 아직 할 수 있는 게 남아있었다. 시간이 흘러 손목뼈는 붙었고, 몇 년 만에 드디어 쉴 새 없이 돌아다닐 만큼 몸도 나았다.

살아서 혼자 힘으로 먹고 자고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시큰둥하니 옆에 있는 가족이 얼마나 귀하며, 그저 지루하고 고단한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가? 톨스토이는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사람이 오늘 밤 죽게 되는 걸 안다면 모든 고통과 갈등이 해결되고, 건강도 돈도 필요 없어지며, 슬퍼할 가족과 상처받은 사람을 위로해주고 싶어질 것이므로, 죽음은 우리의 마지막 해결사이다.


죽음을 기억하면, 생이 소소한 행복으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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