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깨면 제일 먼저 라이오를 켜고, 자기 직전에 라디오를 끈다. 하루 종일 밖에 나갔다 돌아올 때도 라디오부터 켜고, 가끔 빈 집이 외롭지 말라고 아예 라디오를 켜둔다. 우리 집 라디오는 FM 93.1에 고정되어 있다가, 가끔 FM 93.9로 넘어가지만, 또 금방 돌아온다.* 전파가 약해서 찌지직 잡음이 심한 날이면, 나는 외장 안테나를 끌고 다니며 신호를 잡는다. 온 세상의 음악을 향한 내 짝사랑은 아마도 고등학교 때 시작됐을 거다.
나는 친구들과 찢어져서, 새벽 버스 타고도 한참 가야 하는 여고에 배정됐다. 두 번째 뺑뺑이었던 우리에게 선생님들의 정성이 넘쳤고, 때마침 학원이며 과외가 전면금지되었으며, 처음 보는 도서관과 성모의 밤, 시화전, 합창대회로 놀거리가 많아서, 내 눈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게다가 음악 선생님은 수업 시간마다 오페라 아리아를 틀어주셨고, 또 혼자 멋지게 부르셨고, 또 모두 따라 불렀고, 마지막에는 전교생이 단체로 공연장에 갔다. 푸치니의 나비부인,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베르디의 나부코, 지금은 오페라의 유령으로 더 유명한 앤드루 웨버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보며, 우리는 울고 웃었다. 우리에게는 마이클 잭슨이나 조용필보다 더 유명했던 테너 엄정행이 학교에 와서 그 유명한 '오~오~, 내 사~랑 목련화아야'를 불렀을 때, 박수와 함성으로 강당 지붕이 날아갈 뻔했다. 밤낮으로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아'를 불렀던 합창 대회로 피크를 찍으며, 그렇게 나는 음악에 입문했다.
집 떠나 대학에 가며, 긴 자취 생활이 시작됐다. 버스 종점 건너 좁은 비탈길에 있던 오래된 빌라 2층 자취방은 비키니 옷장 하나, 책상 하나 들어가면, 딱 혼자 돌아누울만했다. 출근 시간이 지나면, 텅빈 골목 끝 레코드 가게 주인은 스피커를 길바닥에 내놓고 온갖 최신 팝을 흘려보냈다. 학교에서 시도때도 없이 날아다니던 돌멩이와 최루탄이 잠시 멈추고, '아침이슬'과 '임을 위한 행진곡'도 잠시 멈추면, 친구들은 기타를 치며 유행가를 불렀고, 'J'나 '허공'도 곧잘 불렀으며, 누가 디스코텍을 갔다더라, 누가 퀸 팬클럽에 가입했다더라는 소문도 무성했다. 가끔 옆골목 시장에서 사 온 애호박과 양파로 끓인 된장찌개가 대단한 반찬이었던 내게, 어쩌다 몰래바이트가 들어왔다. 몇 달 만에 손에 쥔 돈으로, 스피커가 달린 손바닥만 한 SONY 워커맨을 장만하자마자, 나는 과외를 그만뒀다. 그리고 밤마다 라디오를 귀에 딱 대고, 긴 방을 둘로 쪼개 창문을 반반 쓰던 옆방으로 소리가 넘어가지 않도록 숨죽인 채, 나는 온 세상의 작곡가와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음악에 푹 빠졌다.
기회만 되면 나는 기꺼이 음악 동아리와 동호회를 쫓아다니며, 음악에 미친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에는 아주 예쁜 엔틱 피아노가 놓여있던 까페 주인도 있었다. 박물관에나 있을 거 같은 피아노를 구경하느라 들락거리던 나는 아주 특이한 인상의 주인과 마주쳤고, 알고보니 화가였던 주인과 손님이었던 나는 피아노로 시작해서 음악 얘기만으로 몇 시간을 떠들었다. 어느 눈 내리는 날, 그 까페 앞을 지나다 다시 만난 주인은 나를 급히 불러세우고, 차 트렁크에서 CD가 가득 찬 쇼핑백 두 개를 뒤져 헨델의 피아노곡을 꺼내더니, 극구 사양하다가 그럼 빌려가겠다는 내 손에 꼭 쥐어주었다. 그리고 얼마 뒤, 온 나라가 들썩인 사건이 일어났고, 그 주인이 감옥에 갔다는 한 줄 기사가 떴고, 나는 그의 죄가 크지 않길 바라며, 돌려줄 수 없게된 '파사칼리아'를 무한반복해서 들었다.
머리가 하얘지고 이제 정신 좀 차리려는데 마치 꿈인 듯, 내 아이 또래의 조성진이 '피아노의 숲*' 만화 주인공처럼 쇼팽 콩쿨에서 우승하고, 더 어린 임윤찬이 베토벤, 리스트, 라흐마니노프로 우리 마음을 뒤흔들고 반클라이번에서 우승했으며, '한끼 줍쇼'에서 문전박대 당하던 BTS가 전세계 아이들을 춤추게 만들며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 이제 느려서 표도 못사고 유튜브로만 구경하던 내게도 뜻밖의 기회가 왔다. 평소 보험을 좀 들던 친구에게 임윤찬의 공연 초대장이 날아왔는데, 코로나에 걸린 친구 언니와 조카 덕분에(?), 내가 대신 가게 됐다. 좋은 자리 맡는다며 일을 접고 일찌감치 줄선 친구 덕에, 나는 앞자리 한가운데 앉아서 임윤찬의 손가락을 보며 피아노를 들었지만, 너무 들떠서 무슨 곡인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다 온 세상의 음악에 살짝 미쳐있었고, 이제 온 세상 사람들이 우리 음악에 풍덩 빠지고 있다. *
라디오를 켜면, 음악이 공짜로 우리에게 온다. 음악을 연주하고 듣는 사람은 행복하며, 마음에 음악을 품은 사람은 더 행복하다.
* FM 93.1 KBS 클래식 채널, 1980년 개국. KBS 콩을 깔고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하면 잡음없이 깨끗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잡음도 음악이다 생각하면, 괜찮다.
* FM 93.9 CBS, 1995년 개국. CBS 레인보우를 깔면 마찬가지로 라디오를 들을 수 있다.
* 피아노의 숲. 마코토 이시키. 불우한 변두리 숲 근처에서 자란 일본인 카이가 쇼팽 콩쿨에서 우승하는 성장 과정을 그렸고,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마치 들리는 듯 그렸으며, 임동혁 임동민을 모델로 한 우리나라 두 형제는 입상한다. 현실에서는 조성진이 우승했다. 야호!
* BTS 정국과 진이 한끼줍쇼에 출연했고, 정국은 편의점에서 라면조차도 같이 먹을 사람을 찾지 못하고 완전 실패했지만, 다행히 진은 아슬아슬 마감 직전에 동네 꼬마들이 저리도 좋을까 싶게 꺄아아~ㄱ 알아보며 환대받았다. 부라보!
* 한국 음악의 수수께끼 (Korean music mistery, 2012), K클래식 제너레리션 (K classic generation 2020). 벨기에 티에리 로로 감독이 퀸 엘리자베스 콩쿨 등에 참여한 수많은 한국 젊은이들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1991년에, 대한민국 문화발전을 위한 국가전략에 따라서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대통령령에 따라서 줄리어드음대를 표방하며 설립되었고, 영재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2015-2022년 동안 전세계 유수 15개 콩쿨 중 1위-3위가 20명 이상 배출되며, 한예종 설립 30년만에 절대적인 숫자만으로도 한국은 세계 1위를 달성했다. 음악 1세대들은 해외에서 배워온 내용을 온 힘을 다해 그 다음 세대에게 전수했다. 민간에서는 1977년 설립된 금호재단이 반백년 동안 1000명 이상의 음악영재를 발굴해서 공연기회를 줬다. 1세대, 백건우(피아노), 정경화(바이올린), 정명훈(지휘), 정명화(첼로), 김대진(피아노), 조수미(소프라노) 등. 2세대, 장영주(바이올린), 장한나(첼로), 손열음(피아노), 김선욱(피아노), 임동혁(피아노), 클라라 주미 강(바이올린) 등. 3세대 임지영 (바이올린), 홍혜란(소프라노), 조성진(피아노), 선우예권(피아노), 임윤찬(피아노), 한재민(첼로), 양인모(바이올린), 황수미(소프라노), 문지영(피아노), 김윤지(피아노), 박재홍(피아노), 최하영(첼로), 임지영(바이올린), 이혁(피아노), 김태한(바라톤) 등. 다 찾지 못했어요.
* FM 93.1 20주년 앨범 시리즈 We get classics requests 1 (2000),2,3 명곡 명연주를 모아뒀고, 음질도 좋은 편이라서, 클래식 입문하기 딱 좋은 CD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