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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오늘 May 20. 2024

삐빅- 당신은 절전모드였습니다






    몇 달간 축 처진 채 오토파일럿 좀비 모드로 살다가 어느 날 불현듯 깨달았다. 아, 나 지금 절전모드구나. 그것도 초절전모드! 으쌰으쌰, 스스로 기합 넣으면서 창창한 앞날을 바라보며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던 나는 어느새 바람에 빠져 축 늘어진 풍선처럼 흐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몇 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깨닫다니. 이러언.


    잠을 푹 자도 오히려 더 뻐근해지는 몸. 날이 갈수록 잡념이 우수수 쌓여 가는 머릿속. 그 와중에 해야 할 것들은 계속 밀려들고, 생각해야 할 것들도 무수히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아, 이제 그만. 과부하가 오기 직전 고개를 저어 봐도 쉽게 이 많은 것들을 비워 낼 수는 없었다. 충전을 해야 할 시점이라는 걸 아는데도 어떻게 충전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모른 채 안타까운 두 손만 허공에 젓고 있는 그런 인간이었다. 아, 불쌍하기도 하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오래간만에 날씨가 화창한 주말에 몸을 일으켰다. 그것도 억지로. 잠에서 깨어나 습관처럼 스마트폰에 온 정신을 맡기고 있다가도 마음 한편에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는 무거운 죄책감 때문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모자를 눌러쓴 채 집을 나섰다. 곧 여름이 다가오는 것을 알리듯이 햇볕이 거리 위로 쨍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무심하게 귀에 꽂아 넣은 무선 이어폰에서는 케이팝 최신곡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박자에 맞춰서 파워 워킹을 하다 보니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가는 것을 느끼고 간신히 표정 컨트롤을 했다. 아무리 기분이 좋더라도 혼자서 헤실헤실 웃는 사람처럼 비추어지고 싶지는 않아서. 그렇게 20분 정도 걸었을까. 강변을 따라 쭉 이어진 근처 공원에 도착했다.




    아, 이거지.


    그래, 나는 자연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었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실이 머릿속에 슬그머니 떠올랐다. 종종 나무와 꽃이 많은 곳을 찾아 산책을 즐기던 예전의 내가 떠오르면서 그동안 너무 여유 없는 삶을 살고 있었구나, 깨달았다. 나는 확실히 계절을 타는 사람이었다. 겨울이면 이상하게 몸과 마음이 웅크린 듯한 느낌이 드는데, 여름이 다가올 때쯤이면 희한하게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더위에 강한 것도 꽤나 한몫하는 것 같았다. 역시 자연은 최고야. 산책 최고.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마다 돗자리를 펼치고 자리한 사람들, 자전거를 빌려 타는 사람들, 저마다 싸 온 도시락을 먹으며 하하 호호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잠시 잊고 살았던 삶의 조각들을 엿보았다. 회사, 집. 회사, 집. 어느새 미래에 대한 열망은 잠시 접어 둔 채 피로에 찌들어 눈이 뻘겋게 물들고 머리가 깨질 듯 울릴 때까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 잠들었던 숱한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매일매일 쌓여 가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 외면한 채 꾸역꾸역 흘려보냈던 하루들. 그 모든 것들이 싱그러운 풀 향기와 꽃내음, 시원한 바람에 잠시 희미해지고 있었다.


    인생은 양면적인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매번 고통을 기꺼이 마주할 수는 없는 걸까? 그동안 힘든 나날들이 있었기에 오늘처럼 산책을 하며 해방감과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것인데. 흔한 말들처럼. 그러니까,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는 것이고, 추운 겨울이 있기에 따뜻한 봄이 있고 뜨거운 여름이 찾아오는 것이라는 걸. 그 절대적 진리와도 같은 사실들이 왜 이렇게 원망스럽게 느껴지는지. 불행한 날들이 있어 행복한 날들이 있다는 걸, 왜 나는 어른스럽게 인정하지 못하는 건지. 아픔은 늘 아프게만 느껴진다. 폭풍우 속에서 춤추는 법을 알아야 한다며 스스로를 북돋았던 나는 어느새 또 비바람 속에서 푹 젖은 생쥐꼴을 한 채로 웅크려 있었나 보다. 또, 왜!


    그래서 이번에 느낀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놓지 않을 것이라는 거. 초절전 모드로 살면서 그대로 방전될 수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이런 스스로를 알아차리고 조금이나마 충전하기 위해 어떤 행동이라도 했다는 것은 내가 나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어 줄 수 있다는 충분한 증거이기도 하니까. 이런 나날들이 조금씩 쌓여 가면서 나는 나에게 조금 더 듬직하고 따뜻한 어른이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폭풍우 속에서 바들바들 떨더라도 빗물을 털어내고 다시 한 발 한 발 내딛기까지의 시간이 점차 짧아지지는 않을까? 그렇게 작게나마 기대해 본다. 아니, 뭐. 꼭 그렇지 않아도 괜찮아. 가끔은 비바람에 휩쓸려 엉망으로 젖어도, 너덜너덜해져도 그래도 괜찮아. 어쨌건... 내가 나를 놓지 않아 주기만 하면 돼. 그래.


    오늘도 스스로를 토닥토닥 달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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