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나이에 숙제를 하다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여행'이라고 한다. 가장 좋아하면서도 잘 할 수 있고 늘 하고 싶은 일이니까.
엄마가 되고 아이가 네살 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방콕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자유여행의 매력에 푹 빠졌다.
태국에 대해 여행 책자를 보는 중 끄라비란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여행 인생의 숙제같은 곳으로 지금까지 십 수년간 남게 되었다. 먼 유럽도 아니고 동남아 휴양지 다녀오는게 뭐 그리 대수냐고 할테지만 나는 일년 내내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무렵 퇴근을 해야 하고 일년에 며칠간 연가를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내가 사는 고장은 인천공항에서 자동차로 4시간쯤 걸리는 먼 거리이다. 직항이 없는 끄라비를 가는 것은 며칠 안되는 짧은 연가로는 거의 불가능한 가성비가 매우 떨어지는 일이었다.
딸이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어 시간 여유가 있는데다 나도 설 연휴전에 휴가를 이용해 함께 다녀오기로 했다. 경로는 인천-푸켓-끄라비-방콕-인천이다.
푸켓으로 들어간 이유는 끄라비까지 차로 2시간 30분쯤이면 갈 수 있고 국내 여행업체에서 차량을 예약하면 안전하게 갈 수 있을거란 게산에서였다.
끄라비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찍은 풍경이다. 달리는 내내 저렇게 갑자기 우뚝 솟은 봉우리가 자꾸 나타나서 지루하지 않은 드라이브였다. 게다가 지형 탓인지 도로가 구부러진 곳이 많고 베테랑 운전사는 속도를 내기 위해 중앙선을 자꾸 침범하는 바람에 졸음도 달아나 정신 바짝차리고 앉아 있었다.
원래 가고 싶었던 반사이나이리조트가 이미 예약이 차서 구글 평을 보고 결정한 곳이다. 새벽에 고성방가를 하며 돌아오는 투숙객이 있고 방음이 잘 안되는 등 약간 문제가 있긴 했지만 수영장이 큰 편이고 저녁마다 수영장 앞에서 라이브공연을 해 주는 가성비가 좋은 리조트였다. 하지만 리조트에서 라이브공연을 보는 사람은 아주 소수였다. 아오낭 비치에는 저녁에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사실 끄라비의 첫날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과 나는 동양인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서양인들 속에서 느끼는 이질감과 영어실력으로 인한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너무 혼란스러웠다. 길을 지나가면 한국인은커녕 동양인이 거의 보이지 않아 상의실종 또는 비키니만 입은 사람들은 우리를 자꾸 쳐다보는 것 같았다. 하루가 지나자 영어유치원을 다녔던 딸이 분위기에 적응하면서 여행이 신나기 시작했다. 영어유치원 보낸 보람 이제야 느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아오낭해변에서 밤마다 열리는 불쇼이다.
불쇼는 해변 여러군데서 열리는데 무료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마추어 수준이고 식당이나 바를 예약하면 완성도있는 공연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나는 Reeve bar 란 곳을 가서 한잔 하며 불쇼를 보려고 했는데 입구에서 식당을 구역으로 나눠놓고 불쇼에서 가까운 자리일수록 금액을 높게 책정해 음식을 주문해야 앉을 수 있다하여 그냥 나왔다. 이미 저녁식사를 한데다 두명이서 지불하기에 비싼 금액이었다.
해변에서 열리는 불쇼는 실수가 많아서 더 조마조마하다. 중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불 붙은 봉을 열심히 던지고 돌리고 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자기한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 어떤 일이더라도 그 안에서 보람을 찾을 수 있다.'
둘째 날은 라일레이해변을 다녀왔다. 아오낭 비치에서 100바트에 긴꼬리보트를 타고 갈 수 있다. 보트는 탑승객이 8명 이상 모여야 출발하는데 잠깐만에 9명이 모여 금새 출발했다. 보트를 탈 때 물 속을 걸어서 들어가야해서 처음부터 수영복을 입고 가는게 좋다. 보트를 타고 내리는 과정도 쉽지 않다. 흔들리는 물 속에서 배가장자리에 걸쳐 놓은 발판을 잡고 오르고 내리는 일은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나이가 나보다 훨씬 많아보이는 백인 할머니도 그 배를 타고 비치를 즐기러 가는 것을 보며 나도 저 나이가 되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라일레이 해변에 내려서 잠깐 수영을 하고 구글 맵을 켜고 프라낭 비치로 이동했다. 굳이 구글맵을 켜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한 곳으로 걸어가는 것을 따라가면 된다. 20분쯤 더위 속에 걸어야 하지만 가는 길에 보이는 풍경이 눈을 사로잡기 때문에 그리 지루하지 않다. 가는 길에 나무 위의 원숭이와 왕도마뱀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프라낭 해변에서는 스노쿨링을 했다. 스노쿨링 장비를 캐리어에 넣어 여기까지 가져온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물 속이 아주 맑지는 않지만 물고기가 꽤 있는 편인데 빵조각을 조금 풀었더니 물고기들이 덤벼드는 바람에 놀랐다. 내가 해변 휴양지를 자꾸 가고 싶은 큰 이유중 하나가 스노쿨링이다. 처음 스노쿨링을 했을 때의 그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수영을 못하고 겁이 많아 얕은 물에서만 겨우 하는데 스쿠버다이빙을 하면 얼마나 멋있을까. 황창연 신부님이 유투브에서 했던 말씀이 생각난다. 바닷속 세상이 땅 위 보다 훨씬 아름다운 곳이 많다며 꼭 배워보기를 권하셨는데 나는 아무래도 이번생에서는 어렵겠지.
셋째날은 홍섬투어를 했다. 다양한 투어 상품 중 배를 가장 짧게 타는 투어라고 해서 선택했는데 결론은 홍섬은 예뻤으나 투어의 진행에 좀 실망했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30여명 스피드보트에 타고 함께 투어를 하는데 중국인들이 많은 배라서 첫번째 실망했고 점심 식사 도시락이 너무 부실한 것이 두번째 실망이었다.
다행히 배에 함께 탄 중국인들이 크게 예의 없는 행동을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조용하게 투어를 즐겨서 중국인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바뀌게 되었다.
홍섬은 카메라만 들면 화보가 되는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곳에 있는 나는 매우 덥고 마땅하게 쉴 그늘을 찾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 전 섬(팍비아 섬)에서 이미 바닷물에 젖은 옷으로 찝찝했고 음료를 마시려고 했으나 매점에 늘어선 줄을 보고 포기했다.
여행은 추억이 전부인 것 같다. 그 당시의 나는 힘들었지만 지금 사진을 보며 기억하건대 그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것은 내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란 뜻이라고 생각한다.
끄라비에서의 3일은 너무 짧았다. 방콕행 국내선 항공권 일정이 아니라면 게속 머물고 싶은 곳이었다. 맹그로브숲 카야킹도 해 보고 싶었고 에메랄드풀과 블루풀도 눈에 담고 싶었다. 그래서 끄라비에 꼭 다시 오자는 약속을 딸에게 하면서 다음날 아침 일찍 방콕행 타이항공을 탑승했다. 끄라비에서 방콕까지 국내선으로 1시간 25분이 걸린다.
방콕에서 해야할 숙제는 왓아룬 야경을 보는 것이었다. 왓아룬 건너편에 야경을 잘 볼 수 있는 촘아룬이라는 식당을 미리 예약해두었다.
불빛을 반사하고 있는 왓아룬(새벽사원)은 생각했던것보다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예약한 식당은 태국음식을 하는 곳이었는데 다른곳에 비해 예약을 여유있게 받고 가격도 많이 비싸지 않은 양심적인 곳이었다.
다음 날은 오후에 출발하는 투어를 예약해두었는데 '킹오브아트뮤지엄과 아유타야선셋투어'이다. 가뜩이나 더운데 사원의 탑들이 열을 내뿜는지 방콕보다도 훨씬 덥게 느껴졌다.
왓 마하탓에서 16~7년 전에 첫 여행 때 보았던 부처님 얼굴이 지금도 나무뿌리에 갇혀 잘 계시는 것을 확인했다. 너무 답답해 보여 뿌리에서 꺼내드리면 어떨까 잠깐 생각했는데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 앞으로도 나무뿌리에서 나오시긴 힘들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왓차이와타나크람 사원 뒤로 태양이 넘어가는 선셋을 본 후 방콕으로 돌아왔다.
몇년만에 찾은 방콕은 많은 것이 변한 것 같았다.
그랩이 잘 잡히지 않아 애를 먹었고 잡더라도 차량정체로 20여분 이상을 기다려야했다. 매연과 무더위에 길에서 차를 기다리는 것은 나에게 너무 힘든 일이었다. 물가도 많이 오른 것 같았다. 방콕여행의 매력은 저렴한 물가라고 생각했는데 호텔 숙박료며 물건가격 등이 체감하기에 많이 오른 것 같았다. 숙소를 공항철도와 지상철(BTS)가 연결되는 곳으로 정했음에도 관광지는 대부분 지상철로 접근하기 어려웠고 그랩이 잘 잡히지 않아 야시장에서는 택시를 흥정해서 탔는데 너무 많은 요금을 요구해 지금까지 방콕에 대한 불쾌한 기억으로 남는다. 낯선 도시에 온 외국인들에게 평균 택시비의 3배정도를 요구한 후 흥얼거리는 모습이란...
이번 여행에서 편한 코끼리바지를 열장 은 사오겠다는 다짐과 달리 쇼핑도 그다지 얻은 것이 없다. 코끼리바지 가격이 1.5~2배가량 오르기도 했고 도무지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찾지 못해서이다. 심지어 현지 뉴스에 중국산 코끼리바지를 주의하라는 내용이 나오기도 했다. 아이콘시암이라는 새로 생긴 쇼핑몰에는 시원한 실내에 야시장을 재현해 위생적으로 안전하게 즐길 수 있다고 광고하였지만 실제로 가보니 사람이 너무 많았고 음식은 맛이 없고 비쌌다. 야시장에서 숯불에 구워서 판매하는 꼬치구이들은 숯불이 아닌 전기그릴에 구운 후 전자렌지에 데워서 판매한다. 숯불옹호자인 나는 전기그릴에 구운 꼬치구이는 일단 인정해 주지 않는다.
가격은 야시장의 3~5배쯤 되었던 것 같다.
이동거리가 너무 길어 시간이 아까웠던 방콕에서의 3일을 끝으로 딸과의 여행을 마치고 머나먼 귀국길을 출발했다.
호텔-수완나폼공항-인천공항-서울역-광주송정역-우리집 경로이다. 아침 6시가 되기 전에(태국 시간으로) 호텔에서 출발했는데 집에 돌아오니 밤 11시가 거의 되었다. 인천공항이 그렇게 멀지만 않았어도 나의 취미생활은 훨씬 풍요로웠을텐데 안타까울 뿐이다. 이번 여행은 나에게 숙제와 같았다. 그 숙제를 딸과 함께 잘 해냈다는 만족감과 함께 내가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함께 투어를 했던 젊은 남자는 나를 가리켜 '어머님'이라고 했다. 돌아오면서 딸에게 다시 한번 끄라비를 가자는 다짐과 함께 "끄라비에 엄마보다 더 나이든 사람들도 많았던거 맞지?"하고 물었다. 착한 딸 망설임 없이 "응"이라고 답해줬다.
이제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나 학교를 다니게 될 딸에 대한 애틋함과 집에 남겨둔 남편과 강아지레오군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돌아오는 길에 자꾸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갈 그날을 기다리며 건강관리도 잘 하고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야겠다. 영어공부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