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나의 직업과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 현재 진행형 ~ing
나는 어린이집 보육교사로 일했던 교사다.
스무 살에 사회복지 아동학부 아동복지학과에 입학했던 꿈 많은 스무 살 소녀였다.
정말 '천생 문과생' 마냥 '수학'이라는 과목이 너무 싫었고 가장 좋아하던 과목은 '국어'였다.
가끔은 너무나도 어려운 '한글', 저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한글을 모국어로 습득한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제 아이들과 지내며 하루하루 더 뼈저리게 느꼈었다.
나는 계절학기가 반강제적이었던 학교의 학생이었기에 대학교 1학년 첫여름, 정말 입이 오리처럼 삐쭉 나오면서도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여름학기, 계절학기를 보냈고, 23살 9월 '코스모스 졸업'을 했었다.
그리고 졸업하는 그 해에 내가 가장 꿈꿔오고 목표로 하던 어린이집에 '원샷원킬'로 한 번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2015년 9월 1일에 개원을 하는 어린이집의 개원 멤버로 근무를 하게 되었고,
나의 대학교 4학년 졸업식은 8월 23일쯔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마지막 대학생의 졸업식은 '나의 피날레'가 될 줄 알았다. 정말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늘 높이 학사모를 집어던지며 졸업의 기쁨을 만끽하겠노라고 다짐했던 나는, 그날 엄마와 학교에서의 흔적과 추억을 남기기 위해 부랴부랴 사진을 찍고, 급하게 밥을 먹고 "이따 집에서 봐!"라고 하며 서둘러 헤어진 뒤 어린이집으로 출근했던 기억이 남는다.
그때 '나의 첫 선배'이셨던 선생님께서 졸업과 취업을 축하한다며 교사생활의 필수 아이템인 텀블러와, 나의 이미지와 잘 어울릴 것 같아 준비하셨다는 립스틱 선물을 받았던 게 7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그 순간
그 선배와의 첫 추억이 두둥실 떠오를 때가 종종 있다.
딱 서른 살인 요즘, 10년 전 스무 살의 일들이 왜 아직도 어제 일처럼 너무나도 생생한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왜 그때 더 신나게(?) 놀지 못했을까' 하는 약간의 후회와 아쉬움이 느껴지지만 나는 스무 살, 아이러니하게도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공부가 재미있었던 것 같다.
정말 지독히도 문과스러웠던 제가 배웠던 과목들 중 지금도 기억에 남는 과목들이 몇 개 있다.
대학교 1학년 1학기 때 배운 아동복지론, 보육학개론, 사회복지 개론
대학교 1학년 여름학기에 배운 자원봉사론
대학교 1학년 2학기 때 배운 아동발달, 인간 행동과 사회환경, 보육과정
대학교 1학년 겨울학기에 배운 정신건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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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수학'이라는 과목을 정말 싫어했던 문과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동 수 과학지도]라는 과목마저
이상하리만큼 너무 재미있었다.
그래서 최근 부모님과 시부모님, 남편, 나의 첫 교사생활을 시작했던 곳의 나의 직장 상사와 동료 그 이상의 의미인 원장님과 동료 선생님들에게 '대학원'에 가서 더 배우고 싶다고 용기 내어 고백하던 그날,
정말 나의 주변인들의 현실적인 수많은 반응을 들었다.
물론 나에게 감동으로 다가온 반응도, 상처가 된 반응도, 나의 용기를 지지해주는 반응도, 반면 의아해하는 반응도..
나는 하나인데,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수많은 각양각색의 의견과 생각을 들었던 어느 날이었다.
모두 제각기의 반응이었지만 그들이 내게 해 준 말은 모두 '나를 위한' 그들의 '진심 어린 말과 응원'이었다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아,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을지언정, 나는 행복했다.
현재 나는 갑작스러운 건강상의 악화로, 잠시 온전한 '나에 대한 집중'의 의미로 어린이집 보육 현장에서
잠시 동떨어져 있는 상태이다.
처음에는 언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 없는 이 시간이, 항상 들려오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지금, 혼자 있는 텅 빈 집 안이 지독히도 고요하고 적막해서 너무도 외로웠었다.
예전에 근무하던 어느 일화가 떠오른다. 부득이하게 부모님이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아이의 의사와 상관없이 어린이집을 옮겨야만 했던 나의 아이와 나의 학부모님, 그리고 나
우리는 그렇게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해야만 했던 날이 있었다.
아이가 새로운 어린이집을 옮겨서 적응을 할 땐 '상실'과 '애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구들과의 이별이 얼마나 슬펐는지
새로운 곳이 얼마나 두려운지
친구들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내 슬픔은 충분히 표현을 했는지
이때, 부모와 교사는 아이를 위해 친구들과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추억으로 남길 수 있도록 지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당시, 'GOOBYE' 안녕 책을 만들며, 그 아이의 마지막 알림장을 작성하며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삼켜가며 우리의 이별 과정을 준비했던 그때가 떠오른다.
아마, 나도 지금 보육교사였던 그 7년 동안의 시간에 대한 '상실'과 '애도'의 과정을 겪고 있는 게 아닐까..
아직은 문득문득 그리움이 파도처럼 휘몰아치기도 하고, 갑자기 정말 몸이 고장 난 것 같은,
고장 나다 못해 정말 터지기 일보직전의 시한폭탄 같았던 내 몸을 떠올리며
씁쓸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인 몸 안의 신호에 감사하며, 이 시기를 잘 보내려고 한다.
30살의 남은 3개월을, 나를 위한 안식 달로 조금씩 채워나가겠노라 결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