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잠만보, 15시간까지 잠을 자는 것이 행복이었던 내가 변했다.
6년 6개월의 연애시절 잠이 많던 나를 놀리던 (구) 남자 친구이자 (현) 남편이 짓궂게 놀리던 별명이 있다.
그건 바로 '포켓몬스터'에 등장하는 잠만보:)
연애 당시 오빠를 만나는 날이 아니면 정말 쥐 죽은 듯이 15시간까지도 먹지도 않고 잠만 잔 적이 있다.
저질 체력이자, 나의 온 에너지를 어린이집에 쏟았던 '보육계의 열정 만수르'였다.
오늘의 이 글은 나의 '불면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분명 나는 불면과 수면장애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나는 왜 생동감을 느끼고 눈을 뜬 채로 꿈을 꾸는 기분일까?"
잠을 자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구나'를 느낀 서른 살 8월의 어느 날, 잠 못 들던 새벽의 이야기이다.
내가 입원했던 첫날밤, 코로나19로 인해 보호자였던 오빠는 나의 짐 정리만 도와준 채,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눈빛을 뒤로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오빠의 눈빛이 느껴져서였을까, 더 씩씩한 척하며 캐리어에 가득 찬 나의 물건들을 보여주며 걱정하지 말라고, 얼른 검사 잘 받고 건강하게 조기퇴원을 하겠노라 평소보다 더 밝고 명량한 목소리로 오빠와 그렇게 엘리베이터 앞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분명 결혼 전 우리는 6년 6개월이라는 시간을 장거리 연애를 하며, 우리 둘만의 힘든 연애를 종료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오빠와 나 사이의 시야를 차단시키는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과 닫히는 문이 얼마나 야속하던지..
(사실 환자복 주머니 속에서 울컥하지 않기 위해 몸을 아주 살짝 꼬집었던 것 같다.)
갑작스러운 허리 디스크 악화 증상으로 인해, 부끄럽지만 화장실에서 힘을 줄 때 찌릿하다 못해 너무 아파
화장실 변기에 앉아 오열을 했었고, 입원을 결심했던 것 같다. 하루빨리 정밀검사를 받기 위해.
그날, 홀로 우두커니 앉아있는 병실은 너무 어색하고 외로웠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다 낯선 사람들.
낯선 사람들의 뚜벅뚜벅 발걸음 하나하나, 발소리 하나하나에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날, 다행히도 저녁은 너무 맛있었다. 나를 걱정할 가족들에게 근사한 저녁밥을 맛스럽게 찍은 뒤,
밥이 맛있으니 나를 걱정 말고 가족들도 맛있는 저녁을 먹으라고,
결혼이 첫 독립이었던 막내딸이 걱정되어 타지에서 면회 오지 못해 속상해했던 엄마, 아빠에게 코로나로 인해서 면회도 제한되어있고, 오면 싸우기밖에 더하냐고, 혼자 있고 싶다고 괜히 더 틱틱거리는 목소리로 엄마와의 통화를 마쳤던 기억도 난다.
나의 건강을 걱정하던 나의 주변 사람들, 평소 겁이 많은 나를 달래주기 위해
"호텔 가서 쉬는걸 호캉스라고 하니까, 이 기회에 병원 가서 좀 쉬어 병캉스 한다고 생각해!"
이 말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그동안 나는 보육교사로 나의 아픔이 제일 싫었다. 정말 조금이라도 아프면 마치 대역죄인이 되는 그 느낌.
아이들이 아프면 곧바로 원장님과 부모님께 상황을 전달드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조치를 다했고,
열이 나면 30분 간격으로 체온을 체크하고, 얇은 옷으로 갈아입히고, 미온수를 적셔와 정성스레 아이의 몸에 혹여나 차가울까 조심스레 열을 식혀주었던 지난날처럼 하루하루가 전쟁통이었던 나의 나날들,
왜 이지경이 될 때까지 나의 건강을 소홀히 했던 건지 나 스스로가 가엾기도 화가 나기도 했었다 사실.
입원 당일 MRI를 오늘 중으로 찍을 거라는 안내만 받았던 나, 정확한 시간을 고지받지 못해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목이 말라 혼자 배선실에 다녀왔던 나, 부재중이었다는 이유로 내 순서가 지나가 버렸다고 했었다.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지 뭐..'라는 생각과 함께 가져온 수첩을 찢어
"배선실에 다녀오겠습니다 :)"
"공용 샤워실 예약하고 오겠습니다 :)" 등등 여러 가지 문구를 작성해놓았다.
나의 부재중을 스스로 알리기 위해.
그렇게 병원의 입원 첫 날을 마무리 하며 오후 9시경 잠이 오지 않지만 괜스레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려 바른 자세로 누워 잠을 청해보았었다. 아마 1시간 정도는 눈을 감았지만 여러 생각과 감정들이 두둥실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었고, 겨우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나의 커튼이 걷히며, 간호사 선생님이 자고 있던 나를 깨웠다.
"환자 분, 자고 있는데 깨워서 미안해요. 지금 MRI 찍으러 가셔야 대기 없이 찍을 수 있어요.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라는 말과 간호사 선생님이 나를 깨우셨고, 나는 선생님을 따라 MRI실로 이동했었다.
그때 시간은 오전 12시를 넘긴 시간, 어두컴컴한 복도를 간호사 선생님만을 의지하며 낯선 길을 따르는데,
순간 '저승사자'를 홀린 듯이 따라가는 기분이 들었었다.
나를 데려다준 뒤, 다시 떠나는 간호사 선생님. "검사 끝나고 병실로 돌아오시면 돼요~" 라며 가시는 간호사 선생님의 옷자락을 잠시 잡고 싶었다. 조금만 같이 계셔달라고.
나는 정말 자타공인이 인정하는 길치인데 과연 돌아갈 수 있을까 걱정을 하며, 대기석에서 MRI 검사 관련 영상 모니터를 열심히 시청하고 있는데,
MRI가 처음도 아닌데 오늘따라 왜 그렇게 무서운지, 괜히 긴장돼서 화장실도 가고 싶었다.
특히 내 차례를 기다리는데 내 앞에 검사 중이셨던 할머니로 추정되는 분이 검사실 안에서 힘겨워하는 목소리가 들렸고, 그다음 차례였던 나는 심장이 정말 몸 밖으로 빠져나올 것만 같이 무서웠다.
할머니께서 많이 불편해하시며 돌아가시고 내 차례가 되었다. 너무 무서워서 물어보았더니 할머니께서는 검사 전 조영제를 투여하셨었는데 그 부작용 증세로 힘드셨다고, 나는 조영제는 사용하지 않을 거라고.
방사선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MRI 기계에 누웠는데 순간 과호흡이 오는 기분이었다.
나는 폐쇄공포증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갑자기 뭔가 머리가 하얘지고, 귀마개 위에 헤드셋까지 착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따라 검사 소리가 너무 과도하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나의 예상 검사시간은 30분 정도라고 안내를 받았고, MRI 통 속에서 정말 수도 없이 숫자를 셌는데, 체감은 30분이 지났는데 나의 검사는 지속되었었다.
다행히 검사를 잘 마친 뒤, 검사시간이 30분이 맞았는지 너무 길게 느껴져서 조금 힘들었다고 말씀드렸더니 음성안내까지 있어 30분보다는 조금 더 길다고 느껴지셨을 거라고,
검사를 잘 받으셨으니 병실 가서 편히 주무시라며 6층 병실 간호사 선생님을 다시 호출해주셨었다.
나를 데리러 오신 간호사 선생님께 무용담을 늘어놓듯, 무서웠지만 잘 검사받은 얘기를 하며, 약간의 TMI도 나누며 병실로 돌아왔었다.
병실로 돌아와 다시 내가 가져온 나의 애착'길쭉이' 베개를 꼭 끌어안은 채 다시 잠을 청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요동치며 잠이 오지 않았었다.
현재 시간 오전 5시 9분.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며 울먹이던 나는 6층 병실의 당직 간호사 선생님을 붙잡고 '어른 아이'처럼 목놓아 서럽게 울었었다.
너무나도 따뜻했던 내 또래로 보이는, 나보다 더 어릴지도 모르지만, 언니 같았던 간호사 선생님의 토닥임을 느끼며 마음을 삼키고 간호사 선생님이 다정한 손으로 건네주었던 약을 삼켰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때 타이레놀을 먹는 것처럼, 배탈이 날 땐 '토끼똥'이라고 부르는 동그란 환을 먹는 것처럼, 그날도 약을 먹어서였을까, 아니면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던 간호사 선생님의 따뜻한 눈빛과 말의 위로 덕분이었을까.. 조금씩 하품을 하기 시작하지만, 이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자판을 두드렸다.
병원 첫날의 이 기분을 잊지 않도록, MRI 기계에 누워서 검사를 받은 뒤 돌아왔을 때, 분명 너무 무서웠지만 다시 삶의 원동력을 느끼게 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