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내가 갔던 이 길이 어디로 갔었는지, 어디로 날 데려갔는지
현재 나는 7년간 보육교사 생활을 했던, (구) 보육교사 (현) 지극히도 평범한 어느 서른 살의 결혼 2년 차 새댁이다.
스무 살 때부터 10년간 나름 나만의 외길 보육교사의 길을 걸어왔고, 사회복지아동학부의 아동복지학과를 전공했으나, 당당하게 사회복지 실습을 '지역아동센터'에서 하며 사회복지 교수님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던 일화가 생각난다.
그때 입 밖으론 내뱉지 못했지만 '저는 아동복지과를 왔으니까요, 사회복지 실습이라고 해서 꼭 종합사회복지관을 가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라는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교수님을 향해, 혹여나 무례한 학생이지 않았던 지난날의 나를 다시 한번 칭찬한다.)
물론, 복수전공학과를 진학하게 되어, 사회복지에 관련된 과목도 열심히 수강했었고, 사회복지 과목도 너무 재미있었다. 그렇지만 사회복지 과목을 배우며 더 확고했었다.
나는 정말 졸업 후, 어린이집으로 갈 거야! 그 후에는 정말 더 광범위한 아동복지를 위한 직업을 삼아야겠어!라고 다짐했었으나..
만약, 내가 어린이집 교사가 되지 못한다면, 아동복지의 길을 걷지 못한다면, 그 제3의 플랜은, 아빠처럼
올곧은 공무원이 되어보자..라는 생각으로 그 부전공을 택했던 것 같다.
그 부전공이 나를 오늘날의 이 길로 데려다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며..
사람의 미래는 예측불가이기 때문에 계절학기 때 강제적으로 설상가상 '부전공'까지 신청해야 했을 때,
내가 선택한 건 정말 나다운 선택이다. '공무원 트랙'을 선택했었고 나의 같은 과 친구들은 기겁을 했었다.
아마, 정년퇴직한 그 누구보다 '바르게 살자'라는 가훈을 내게 세뇌시켜주신 내가 세상에서 공동 1위로 사랑한 나의 남자, 아빠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공동 1위라 하면, 나의 외할아버지와 나의 아빠이다.)
나의 과는 누구다 알다시피 '여초과'라고 불린다. 정확한 성비는 기억에 나지 않지만, 약 60명이었던 12학번 친구들 중에 남자 동기는 10명도 채 안되었으니.. 정말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남자 동기들에게 측은지심이 느껴지기도 했고, 함께 하는 조별과제 때 더 살뜰히 그들을 챙겨주려고 했던 것 같다.
스물한 살이 되던 해, 군대에 갔던 선배들이 복학한다는 소문이 있었고, 여고를 다녔던 나로서는 말로만 듣던 '대학 선배'에 대한 로망이 넘쳤던 그때였다.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구나. 현실의 선배는 이렇구나.
그래. 우리 과에 무슨 기대를 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고생이었던 나는 대학에 오면 정말 캠퍼스 커플도 하고 연애도 하는 줄 알았었지..)
우리 과에 진심이었던 오빠들 덕에 대학교 2학년 때 더 치열하게 공부했던 것 같다. 오빠들보다 더 잘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과 C.C는 정말 드라마에서나 나오나 보다 하고 말았었다.
그렇게 몇 없는 복학한 오빠들과도 경쟁하며, 때로 측은지심을 느끼며, 또 나는 조별과제 때 최선을 다해 친절해지고 있었다. (동기애도, 전우애도 아닌 그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그러던 와중 부전공 트랙을 계절학기에 들어야만 했고, 가장 친한 친구들과 처음 흩어져 다른 과목을 들으러 갔었다.
(그 당시, 과의 특성상? A/B 두 개의 분반으로만 이루어졌고 정말 '답정너'처럼 수강과목은 정해져 있고 분반에 맞게끔 신청만 하는 시스템이었어서 나는 수강신청의 고통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늘 같은 과목을 듣던, 같은 분반이었던 친구들 중에 마음 맞는 친구들과 자연스레 함께 다니게 되었는데 부전공을 선택하면서 친구들과 강제 이별을 하게 된 셈이었다.
심지어 강의실마저 너무나도 생소한 '공학관'이라는 곳이었다. 어딘지도 모를 그곳을 나와 같은 부전공을 택한 동기들과 함께 힘을 모아 건물의 고유번호를 몇 번이고 되뇌며 겨우 찾아갔던 것 같다.
'공무원 트랙'이라는 과목은 '소방방재학과'에서 개설한 트랙이라 그 학과가 주로 사용하는 건물로 아마 가게 되었던 것 같다. 그 '공학관'에 발을 내딛는 순간 먼 훗날 나의 인생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곳에서 당시 이제 막 군대를 복학했던 소방방재학과의 복학생이었던 누군가가,
오늘날 나의 남편이 되어 내 옆에 있으니 말이다 :)
오빠를 만나 21살에 전혀 의도하지 않은 캠퍼스 커플이 되었고, 휴학하며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러 노량진으로 떠난 오빠와의 장거리 연애를 6년 정도 한 뒤, 결혼의 결실을 맺게 되었으니 말이다.
23살 코스모스 졸업을 했던 나, 종종 대학 동기들과 연락을 할 때 조심스레 남자 친구의 유무를 물을 때 '그때 그 오빠'라고 하면 동기들이 놀라곤 했었다.
나의 결혼 소식은 동기들이 알았지만, 그 배우자가 '그때 그 오빠'라는 걸 알며 동기들이 많이 놀라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정말 '사람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 것 같다. 그리고 나에게 먼저 용기 내어 친해지자고 다가온 사람과의 인연을 내가 먼저 끊어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 엄마와 7살의 첫 약속이 너무 강렬해서 그러지 않을까..
공부는 못해도 되니, 친구 한 명만 친해져서 소개해달라고 했던 그 말.
스무 살, 과 오리엔테이션 때 처음 나에게 친해지자며 번호를 물어보았던, 긴 머리가 잘 어울렸던 내 친구와는 졸업 내내 '아복단짝1호'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서로를 닮아갔던 그 친구와는 10년째 단짝이다.
그리고 '공무원 트랙'을 들었던 그곳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번호를 물어보았던, 수줍음이 많았던 그 남자와 그 여자. 우리는 서로의 비슷한 점에 끌리고, 확신이 생겨 현재 기준 연애 9주년이자 결혼 2년 차인 신혼이다.
평생 나의 남자 단짝이다.
대학교라는 곳에서 나에게 처음 손을 내밀었던 한 여자와 한 남자를 엄마에게 당당하게 자랑하던 그때가 떠오른다.
내가 '운명론자'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인연'이라는 단어와
'만날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만나는구나',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라는 말은 정말 많이 와닿는 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