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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Bye My Job And My Childrn

Feat. 나만의 홀로서기를 위한 다짐의 시작을 기록으로 남기다.

by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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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내 꿈의 시작

서른 살의 나는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이었던 그날, 아동복지학과에 입학하며 어린이집 교사라는 직업을 꿈꾸게 되었다. 그날은 지금 생각해보면 특별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았던 우연한 스무 살의 어느 날이었다. 지도교수님과의 첫 개별 면담, 나의 대학 지도교수님께서 내 마음의 이야기를 입가에 미소를 띠고 나를 향해 다정한 눈빛을 보내주시는 듯한 따뜻한 눈망울을 하신 채, 나의 이야기가 끝난 뒤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보라야, 너는 어린이집에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 특히 직장어린이집에 말이야, 푸르니 보육지원재단이라고 직장어린이집을 위탁해주는 곳인데 그곳에서 교사를 하면 정말 잘할 것 같아!"

개별 면담이 끝나고 지도교수님 방을 나서는 방문을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조심스레 닫고 뒤돌아서며, 그때 당시 푸르니 보육지원재단을 처음 들었지만, 교수님의 칭찬 한 마디로 나는 그 문 밖을 나온 순간 대학교에서의 첫 다짐이 시작되었다.

푸르니 보육지원재단의 교사가 되어야겠구나!

그 뒤로, 나는 '나의 꿈'이 나에게 '현실' 이 되어 나에게 다가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의 12학번 친구들에게 세뇌하듯 말했던 기억이 있다. "얘들아 나는 푸르니 교사가 될 거야!"라고 외치고 다녔다. 아마 나를 기억하는 대학 동기들은 그 말을 어렴풋이 기억할지도 모른다. 나는 불과 며칠 전 이야기처럼 아직도 그 말이 생생하게 내 귓가를 울린다.


그 후로 고등학교 3학년 대한민국의 수험생이어야만 했던 그 시절, 재미없던 공부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동기부여' 혹은 '내가 재미있는 것'을 나도 모르는 사이 찾은 것이 아닐까?

(10년이 흐른 지금도 20살 때 배웠던 과목들이 어렴풋이 기억나는 게 그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하곤 한다. 마치 지구 오락실 등 요즘 예능프로그램에서 하는 '음악 퀴즈', '제목 퀴즈'처럼 인상 깊었던 드라마 제목과 OST, 극 중 캐릭터의 이름을 잘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건 마치 나만의, 내 인생의 '과목 퀴즈' 같은 느낌이었다.



2022년 8월의 어느 날, 나만의 '과목 퀴즈'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과목 찾기


대학시절, 많은 대외활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마음 맞는 대학 친구와 '우쿨렐레'라는 악기도 배웠고, 계절학기(남들 놀 때 공부했던 20살의 나... 기특해라)

'미술인지정서 상담사' 도 배워 자격증도 취득했었고, '학술제-교재교구 경진대회'에 얼굴도, 이름도 잘 모르는 선배들과 어색하지만 최선을 다해 참여도 해봤고,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대학교 3학년 때는 마음 맞는 3명의 친구들과 함께 만든 '행복이 주는 선물'이라는 팝업북으로 '교재교구 경진대회 대상' 도 수상했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과 함께 그날을 추억하기 위해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이 생각난다.


KakaoTalk_20220906_130315864.jpg -내 인생의 잊지 못할 첫 '대상' 이자 의미 있는 '상'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과의 노력과 추억의 결실


또 다른 '학술제'의 일화가 불현듯 떠오른다. 친구들과 함께 '브레멘 음악대' 인형극도 했었다. 수줍음이 많았던 친구들은 막대인형으로 연극을 하는데, 나는 왜 유일하게 대면을 하는 '사회자'가 하고 싶었을까..


대학교 때 친구들이 불러주던 별명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길보, 아복단짝, 보글거림 등등..

갑자기 옛 별명을 회상하다 보니 '가족 동요' 중 '내 동생'이라는 제목의 동요가 불현듯 떠오른다. 누가 어린이집 교사 아니랄까 봐.. 종종 동요에서 영감을 많이 받을 때가 있다.

내 동생, 곱슬머리 개구쟁이 내 동생~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서너 개♬

-출처: 가족 동요 중 '내 동생'


그리고 불현듯 갑자기, 6살 터울인 나에게 '꼬마 아빠' 같았던 어린 시절의 오빠가 떠올랐다.

KakaoTalk_20220906_131604917.jpg 6살 터울인 우리 남매, '보구 또 보라'

우리 과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모의수업'

친구들과 오글거리지만 해야 하면 했던 모의수업 때 리액션이 좋았던 나에게 친구들이 학생 역할을 많이 시켰던 것 같고, 내가 모의수업에서 교사 역할을 할 땐 친구들과 계획하지 않았지만, 친구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척하면 척' 학생 역할을 소화해줬던 걸로 기억한다. 고마워 12학번 아동복지 친구들..:)


특히 PPT 발표를 할 때는 19살 수능에서 해방된 후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게 '카페 아르바이트' 였던 나는 그때부터 취업 전까지 카페베네, 투썸플레이스 알바를 꾸준히 했어서인지 '전형적인 솔 톤' 이라며..

최선을 다해 발표하는 나에게 교수님들의 미소 섞인 끄덕임과, 친구들의 따뜻한 박수가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말처럼 PPT를 발표하기 전 늘 긴장되었지만, 나의 노력이 내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올 때 나는 누구보다 행복했었다.



#난 항상 실전에 강했다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면, 나는 쓰기보다 말하기가 더 강했던 것 같다. 물론 쓰기의 수많은 노력이 말하기의 결과였다고 말할 수 있다. 취업 전 내 마지막 모의면접이 그러했듯이..


모의면접 때니까 아마 23살쯤으로 기억한다. 내가 계절학기 덕분에 23살 가을 코스모스 졸업을 했으니까 말이다. 남들보다 통통 튀고 싶어서 내 이름으로 삼행시를 준비했었다. 지도교수님도 아마 기억하시고 계시지 않을까... 그때 분명 교수님들 3~4분이 앉아계셨고 가장 긴장되어야 할 순간에 나는 졸업 전 가장 재미있던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어색한 삼행시를 지적해주신 교수님도 계셨지만, 그때의 면접실의 따뜻했고 유쾌했던 분위기가 지금도 두둥실 떠오르기 때문이다.


KakaoTalk_20220906_132646962.jpg 2015년의 보육교사 모의면접 표 내 꿈을 지켜준 페이퍼


그렇게 23살 9월 조기졸업을 한 뒤, 푸르니 보육지원재단에서 7년간 어린이집 보육교사로 근무했다.

이때의 일화가 하나 더 있는데, 아직도 면접 당일날의 그날이 생생하다.


그날 입은 면접용 원피스가 앉았을 때 너무너무 짧은 건 아닌지, 어떻게 해야 나의 열정이 면접관들께 전달될지, 이름 삼행시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릿속에 수십 가지 생각들이 가득했었다. 그리고 평소 '과민성 대장증후군'처럼 조금만 평소와 분위기가 다르면 극도로 긴장해서 괜스레 배가 아픈 느낌이 드는 나는 면접 전 가장 편안한 공간이 화장실이다. 극도로 긴장감을 느끼며 화장실에서 내가 준비한 필기 예상자료와 면접 대비 자료를 손을 덜덜 떨며 붙잡고 있던 그 장면이 스친다.


그리고 나의 면접 순서가 되었을 때, 대학 동기와 함께 들어가게 되었다. 분명 그 순간은 함께 면접에 임하는 '경쟁자'였지만 '나의 소중한 친구'이자 '나를 아는 사람'이 함께 그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긴장의 끈이 약간 풀렸다. 친구의 존재가 낯선 교수님들 앞에서 '모의면접'을 보던 그날의 기억으로 데려다주었다.


그 당시, 개원하는 어린이집들도 늘어나던 추세여서, 재단 연구원님을 필두로 개원 원장님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 그 당시 유일하게 아는 원장님도 계셨었다. 내가 보육실습을 했던 원장님!

그분께 나는 어떤 '예비 실습교사'였을까, 실습 기간 동안 실수한 것은 없었을까 여러 걱정이 스쳤지만 다행히도 안면이 있는 원장님 덕분에, 나의 스무 살 첫 롤모델이었던 나의 지도교수님을 떠올리며 그 원장님만을 바라보며 최대한 자신감 있는 태도로 면접에 임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시선이 쏠리는 원장님이 한 분 계셨었다. 단발머리의 헤어스타일, 약간 왜소한 체구이셨지만 정말 왠지 모르게 '첫눈에 반했다'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그분의 분위기? 아우라? 가 나를 끌어당기는 느낌을 받았고, 점차 면접 분위기가 적응된 나는 그분께 구애하듯 나의 차례일 때 그분을 바라보며 나의 당당함과 솔직함을 어필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면접을 나온 뒤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고생한 친구와 서로를 응원하며, 우리는 반드시 오늘 면접에 붙을 거라고 우리를 세뇌하며, 서로 다른 어린이집에 가더라도 평생 연락해야 한다는 약속을 다짐하며 우걱우걱 햄버거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햄버거집 이름도 기억난다. 면접 장소 인근의 시청역 KFC.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나는, 누구보다 걱정했을 엄마에게 자신은 없지만 씩씩한 목소리로, 최선을 다해 면접을 봤다고 고백했다. '나의 엄마'는 늘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하는 분이었고, 노력의 결실을 인정해주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뒤, 학교 조교님께 연락이 먼저 온 적이 있었다. 면접 본 원장님들 중 어떤 분께서 내가 궁금해서 학교에 문의전화를 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결과 나는 합격했다고, KB의 원장님께서 나를 좋게 보셔서 같이 일하기를 원하셨다고. 분명 원샷원킬처럼 한 번에 취업한 나는 기뻐해야 했지만 왠지 모르게 속상한 마음에 눈물이 났다. 사실 내가 1순위로 원한 곳은 IBK의 원장님과 개원하는 어린이집이었기에..

속상한 마음에 눈물을 얼른 닦은 뒤, 씩씩하게 조교님과의 통화를 마쳤고 부모님께 나의 합격 사실을 알렸다. 누구보다도 나를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엄마와 아빠의 따뜻한 격려에 나는 엄마 품에 안겨 다른 의미로 눈물을 흘렸다. 사실 가고 싶은 곳은 거기가 아니어서 너무 속상하다고..

그랬더니 나를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게 안아주며, 어느 곳을 가든, 무슨 일을 하든, 나의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엄마와 아빠는 내가 행복하게 좋아하는 일을 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그 말을 들은 뒤, 그래! 취업 고민 없이 한 번에 합격했고! 내가 꿈꿔왔던 일을 하는 건데 뭐가 문제야!라고 거울을 보며 잘 해내겠노라 다짐했던 2015년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던 며칠 뒤, 다시 학교 조교님께 연락이 왔다. '보라야 정말 미안한데..' 나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느낌이 싸했고, 혹여 합격 번복 전화인가 싶었다. 다행히도 조교님의 통화는 다음과 같았다.

조교님께서 어린이집 명을 착각하셨다고, 나를 채용하기로 한 곳은 KB가 아니고 IBK였다고 두 기관이 이름이 너무 비슷해서 본인이 혼동해서 이야기를 전달했고 너무 미안하다고.


내가 조교님이었어도 나에게 너무 미안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수화기를 들고 있는 내 입가엔 미소가 멈추질 않았다. 정말 그 전화 한 통이 나의 기분을 좌지우지하기에 충분했다.


"아니에요 조교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하고 통화를 마친 뒤, "엄마!!!!"라고 외치며 엄마를 향해 다가가 엄마품에 안겨 재잘재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의 얘기를 특별한 말 없었지만 다정한 품으로, 다정한 눈빛으로 들어주던 엄마, 엄마의 포옹과 토닥임이 그 어떤 말보다도 가장 큰 축하였다.


그렇게 나는 2015년 8월 21일, 대학 졸업을 축하하고 나의 취업을 축하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엄마와 함께! 예전에는 그런 적이 있다. 친오빠의 졸업식에는 아빠, 엄마, 나까지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오빠의 졸업을 축하하고 오빠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의 졸업식에 아빠는 늘 바빴고, 타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오빠도 바빴고, 늘 엄마와 단 둘 뿐이던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식은 조금 슬펐었다. 왜 나는 엄마만 축하해주냐며 어리광을 부렸었다.

하지만 대학교 졸업식만큼은 엄마와 단 둘 뿐이었고 내 꽃다발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초등학교 첫 입학식, 그리고 대학교의 졸업식 모든 순간에 엄마가 함께 해주었고, 나를 위해 급하지만 정성스레 골랐을 수많은 꽃들이 내 기억을 스친다.

나의 학교의 첫 시작과 끝에는 늘 엄마가 함께였구나.. 너무 미안하고 고맙고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KakaoTalk_20220906_141303485.jpg 엄마의 대학교 졸업식을 함께 하는 엄마의 엄마


KakaoTalk_20220906_141303485_01.jpg 앨범을 보며 주렁주렁 저게 뭐냐고 놀렸지만, 귀여운 우리 엄마
캡처.PNG 여전히 소녀 같은 우리 엄마
캡처2.PNG 개원 준비하러 가기 전 급한 마음에 부랴부랴 찍은 마지막 사진


최근, 퇴원 후 몸과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한달음에 엄마에게 달려간 적이 있었다. 그때 발견한 엄마의 졸업사진들과 그 외 나의 성장앨범들.

엄마는 어린 시절, 이사를 다니느라 사진이 많이 없어졌다고 아쉬워했지만 나의 어릴 적 수많은 사진을 보며 어린 시절의 나와 오빠를, 그리고 엄마의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며 추억에 잠기셨다.


나는 사실, 3살부터 7살까지 외할머니가 키워주셔서 내 삶의 첫 죽음이었던 외할머니의 죽음 이후 어린 시절의 사진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 늘 사진 속에 할머니가 함께였고 사진을 보면 할머니와의 추억이 떠올라 견딜 수 없이 슬픔에 잠겼기 때문이다. 엄마와 나는 그렇게 약속이나 한 듯 우리의 사진을 보지 않았는데 그날따라 엄마는 잠도 자지 않고 나와 새벽 내내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보며, 서로 기억하고 싶은 사진들을 서로 몰래몰래 찍었었다.


저 마지막 사진은, 아직도 기억난다. 졸업식을 마친 후 바로 어린이집으로 개원 준비를 하러 가야만 하던 날, 엄마가 더 정신없어 보였다. 졸업식은 했으니 짜장면을 사주려다가, 출근해서 일해야 하는 딸을 위해 걸음도 느린 엄마가 종종걸음으로 뷔페에 데려가서 얼른 먹으라고, 하나라도 더 먹으라고 나를 앉혀두고 접시에 각양각색의 음식을 가져다주던 게 생각난다. 평소 위장기능이 좋지 않은 나에게 남겨도 되니, 천천히 골고루 먹고 가라고.. 그날 출근해야 할 긴장감에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지만, 평소에는 조금만 과식해도 바로 활명수를 먹는 나이지만, 그날 나는 체하지 않고 출근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엄마와 식당 앞 버스정류장에서 정신없이 헤어지던 날, 생각해보니 식당은 나의 출근할 어린이집 인근이었다. 걸어가 도 될 법한 거리. 엄마는 버스 타고 갈 테니 얼른 늦지 않게 가서 인사 잘하고 잘 배우라고 하던 엄마. 내가 보이는 버스 창가 자리에 앉아 손을 흔들고 얼른 가라며 손짓하던 엄마가 떠올랐다.


그렇게 졸업과 동시에 정신없이 근무했던, 처음 근무한 교사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 준 IBK 참! 좋은 어린이집에서 개원 멤버로 4년 6개월 근무를 한 뒤 21살, 처음 만났던 남자 친구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결혼을 약속 한 뒤 첫 직장의 퇴사를 내 의지대로 결정해야만 했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15년 8월의 첫 출근날과 20년 2월 마지막 출근날, 특히 마지막 출근은 코로나19로 아이들과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했던 그날, 마지막 출근을 준비하면서부터 울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마스크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그날,

헤어지던 4살 아이들이 '헤어짐의 슬픔'을 몰라 해맑게 웃으며 나에게 웃음 섞인 이야기를 하던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들,

내 인생의 축복을 응원해주시던 나의 가족과도 같았던 원장님과 동료들, 그리고 한 분 한 분 나의 앞날을 응원해주시던 수많은 학부모님들.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수화 너머 편에서 "선생님 사랑해요!"를 이야기해주던 사랑했던 나의 아이들,


그렇게 4년 6개월 나의 첫사랑 같았던 어린이집과의 이별 후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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