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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힘이 되는 엄마의 말

Feat. 내 인생의 롤모델이자 내 인생의 첫 친구에게 전하는 말의 기록

by 보라




나의 엄마, 그리고 나의 엄마의 엄마

엄마와 외할머니가 내 인생의 롤 모델이자 나의 첫 친구이다.

나도 내 아이에게 '엄마 같은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이다.


나의 인생에서 지금도 가장 힘이 되는 엄마의 말이 있다. 때는 바야흐로 내가 일곱 살이던 그 어느 날이었다.

3살부터 7살까지 외할머니와 함께 살다가, 초등학교 입학 전 엄마와 함께 생활을 하게 되었고

어린이집도, 유치원도 다니지 않았던 '할머니 껌딱지' 였던 내가 걱정스러웠던 엄마는 부랴부랴 학원을 등록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학원에서 첫 받아쓰기를 했을 때 0점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할머니와 매일 밤 '백설공주' 그림책을 읽으며 잠이 들곤 했었다.


외갓집의 곳곳에는 외숙모가

'텔레비전', '냉장고', '외숙모&외삼촌 방', '가스레인지' 집안 곳곳에 빼곡히 정직한 '궁서체'로 작성하여 붙여 놓으셨었고 나는 자연스레 사물의 명칭을 눈으로, 그림처럼 보고 익히며 듣기와 말하기를 익혔었다.


그러니 쓰기가 발달되지 않았던 7살의 나에게 어쩌면 0점은 당연했을 텐데..

뭐가 그렇게 서러웠을까, 집에 와서 엄마를 붙잡고 엉엉 울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때 엄마의 말이, 23년이 지난 지금도 내 귓가에 다시 들리는 것만 같았다.

"공부 못해도 좋아, 학원에서 친구 한 명만 사귀어서 엄마한테 소개해줘~"


미운 7살이던 그 해 나와 엄마의 첫 약속이자, 사회생활의 첫걸음에서의 '초심'과도 같은 약속이었다.

엄마의 그 한마디 말이, 받아쓰기 0점이어서 속상했던 마음이 눈 녹듯 녹았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도 이 말을 옮기며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분명 나는 어린 시절 어린이집에 다니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할머니의 옷자락을 잡으며 가기 싫다고 울었었다. 엄마도 웃으며 기억나는지 그때를 이야기하며 그런 내가

어떻게 어린이집 선생님이 되었는지 의아해하던 엄마가 생각난다.


사실 정말 3살, 4살 너무 어릴 적 기억이라 100% 정확하지는 않지만 몇 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맞벌이하던 부모님이라 그 당시 3살인 나는 외할머니댁에 맡겨지게 되었었다.

주말마다 오겠다고 약속했던 엄마, "엄마 돈 벌고 또 올게~"라고 하며 할머니 곁에 나를 맡기고 무거운 발걸음을 떼던 엄마.

엄마는 그 약속을 지키듯 주말마다 나를 만나러 왔고, 5살? 6살? 무렵의 생일에는 아주 예쁜 공주님 궁전과 아주 예쁜 요술봉이 함께 있는 장난감을 생일선물로 사주셨었다.


직장인이 되었던 나, 그리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던 나,

주말에는 온전히 나를 위해 움직이지 않고 쉬고 싶었을 텐데, 엄마가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내겐 '애착 장난감'이 되어버린 그 요술봉,

아마 그래서 내가 '세일러문'과 '웨딩피치'를 좋아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 애착 장난감을 가지고 어린이집에 갔던 그날의 기억이 있다.

한 번만 보여달라며 나의 물건을 만지려던 어린이집 친구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의 장난감은 망가졌었다.

아마 그래서 그날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 품에 파묻혀 울며, 다시는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고 이야기했던 것 같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도, 가엾은 손녀딸이 상처 입은 모습을 보며 마음의 눈물을 흘리시지 않으셨을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나는 그래서 내가 어린이집 선생님으로 일한 7년간 아이들을 위해 가장 존중한 게 아이들의 '애착 물건'이다.

'애착 물건'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알고 있기에..

6살 나에게 주말마다 만나는 엄마의 분신 같은 존재가 나의 '요술봉 애착 장난감'이었기에..


내가 '보육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던 가장 큰 이유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돈과 명예보다는,

몸의 건강과 체력이 허락한다면 어쩌면 엄마처럼 60세 그 이후에도 보육교사가 하고 싶었다.


유치원 교사보다는,

어린이집 영아반을 선호했던 이유는 생애 최초의 아이들을 보육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유난히도 직장 어린이집을 고집한 이유는

맞벌이를 해야만 하는 엄마와 그 엄마의 자녀에게 정서적 유대감을 연결해주는 중간 역할을 수행하고 싶었다. (지난 7년간 거기에서 오는 만족감과 성취감이 매우 높았었다.)


30살, 나의 인생 드라마는 '유미의 세포들'이었다.

주인공 '유미'를 보며 30살 나의 발자취를 돌아보았었다.


그림책을 사랑했던 어린 나,

그림책으로 인생을 배운 나,

그림책으로 언어(글자) 및 세상과 마주한 나,

그림책으로 할머니의 사랑을 느낀 나,

그림책 작가로 활동하시는 내 교사생활의 멘토를 보며 설렘을 느낀 나,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신 인생의 언니에게서 영감을 얻은 나,


어릴 때부터 내 마음을 담은 편지를 빼곡히 써서 선물을 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한 편지가 내 인생을 함께 한 기록이다.

편지가 나의 보물 1 호인만큼 이젠 편지 대신, 나의 온 마음이 담긴 결과물을 선물하고 싶다.


내 인생에 가장 감동을 받았던 선물을 꼽자면, 직접 출판한 책을 선물해주신 두 분의 선물이다.


무심코 상상력이 좋으니, 글재주와 말하기, 쓰기를 좋아하니 유년시절의 '나'에게 작가가 되라고 말했던 엄마,

유미처럼 오랜만에 친정에 가서 유년시절 탔던 글짓기 상장을 바라보던 '나'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의 호기심과 사고력, 논리력, 남들 앞에서 나의 의견을 발표하는 것에 대한 성취감을

내 삶의 유산으로 남겨주신 돌아가신 외할머니에게 오늘의 이 글을 바친다.


어릴 적, '천국의 계단'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던 해, 드라마 여주인공이 죽는 장면을 장면을 보았을 때,

몇 살인지도 가물가물한 그날,

지금도 생생한 그날은 엄마가 나보다 먼저 죽지 말라고 하며 엄마 품에 안겨 엉엉 울던 어느 날이다.


내 기억 속 어린 시절 나의 일요일 풍경은 '개그 콘서트'가 끝나갈 무렵,

회사에 출근할 아빠를 위해 옷을 정성스레 다리던 엄마의 모습,

다가오는 월요일 등교를 알리는 '개그 콘서트'의 익숙한 bgm이 너무도 싫었지만,

그 순간이 영원할 수 있다면 그때의 일요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20살, 대학교에서 만난 나의 10년 지기 소중한 친구가 나에게 '보글거림'이라는 별명을 지어준 적이 있다.

어린이집 교사로 일한 지난 7년의 시간 동안 가장 좋아했던 일은 마음을 담아 소통하는 일이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하루의 성장을, 내가 부모님보다 더 오랜 시간을 지켜보며,

아이를 걱정할 부모님들에게 안심하라고, 내가 이 아이들 곁에 있으니... :)


'선한 영향력'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던 '어린이집 교사' 지금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했기에, 이 일을 누구보다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기에,

한 때는 나 자신보다, 내 건강보다 더 소중히 여겼던 자랑스러운 내 직업이기에,


그 일을 못하는 지금, 내 못다 한 이야기를 매일매일 회상하고, 웃고, 울고, 소중함을 느끼며

아직 남은 인생이 많지만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노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나의 어린이집에서 받은 보물 1호이자

첫 어린이집에서 4년 6개월간의 압축 버전인 나의 의미 있는 유일무이한 나만의 첫 책이다.



나의 추억을 기록해서, 의미 있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생 이 책을 소중히 여기며 책도 아끼고, 그때의 추억을 아끼며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겠습니다!

안녕, 나의 사랑 어린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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