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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생활백서 - 인턴편

그 환타를 먹지 마세요

by 구름돌

삐— 삐—


수술 도구들이 부딪히고 움직이는 소리 사이로, 환자의 맥박에 맞춰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도현은 모니터에 표시된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의 선과 숫자들을 천천히 훑었다.


‘혈압, 괜찮고. 맥박도 안정적이고...’


수치들이 안정적인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도현은, 앞에 놓인 컴퓨터에 활력 징후를 입력하고 수술 중 투여된 약물들을 정리해 나갔다.

그때, 수술방 뒤쪽 문이 열리며 마취과 2년차 레지던트 변재우가 들어섰다.


"인턴 쌤, 이제 에스메론 (esmeron; 신경근차단제의 일종) 이랑 마취 가스 줄이죠."


변재우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내밀어 수술포 너머를 바라보았다. 맞은편에서는 외과 레지던트가 막 마지막 봉합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네, TOF (신경근차단제 모니터링의 일종) 도 지금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래요, 좋아요."


도현은 모니터링 기기를 꺼내 환자의 손목 부위에 부착하고 전기 자극을 흘려보냈다. 환자의 손가락이 규칙적으로 움찔였다.


"4번 다 잘 튀네요. 깨울 준비하죠."

"네, 알겠습니다."


외과 레지던트는 드레싱을 거의 마무리한 상태였고, 도현은 마취약 농도를 조절하며 삽관 튜브 제거 준비를 마쳤다. 변재우 옆에 선 도현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현 쌤, 마취과에서 너무 잘 하지 마요. 나중에 외과 와야지."

"어, 안녕하세요."


외과 2년차 이승진이었다. 외과 인턴 시기에, 같은 수술방에 들어갈 때마다 도현을 잘 챙겨줬던 레지던트다. 그때마다 빠지지 않던 농담, '외과로 오라'는 말이 또 나왔다.


"야, 안 돼. 마취과에서도 에이스란 말이야. 인턴 쌤, 험한 외과 같은 데 가지 말고 따뜻한 마취과로 와요."

"하하..."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며 도현은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아, 벌써 10월이구나.’


이들이 유난히 적극적인 이유가 있었다. 인턴 1년이 절반을 훌쩍 넘긴 지금, 곧 전공의 지원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색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도현의 마음 속에는 어떤 과를 하게 될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인턴 쌤. 오늘 당직이죠? 저녁으로 피자 시켰으니까 같이 먹어요. 이제 수술도 더 없는데."

"네, 감사합니다"


환자를 깨우고, 변재우와 함께 도착한 곳은 수술방 한 켠에 마련된 마취과 의국이었다. 의국 문을 열자마자 피자 냄새가 진동을 했다.


"재우 썜, 딱 맞춰서 오셨네요? 인턴쌤도 왔구나"

"응, 인턴쌤 밥 한 번 사줘야지. 그리고 다들 곧 레지던트 지원기간인거 알지?"

"아 선생님, 그러면 부담스러워서 더 안 와요"


의국 안은 떠들썩했다. 1년차부터 4년차까지 레지던트들이 분주하게 피자 박스를 열고 음료를 나누며 식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넓은 의국 안은 활기가 가득했다.


"아! 누가 환타 시켰어!"

"시킨 적 없는데..."

"이거 서비스로 준 것 같은데? 얼른 치워"


소란의 주범은 500mL 짜리 오렌지맛 환타 한 병. 그 음료수를 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그것을 멀리 치우려 애썼다.


"환타가 왜요...?"


그 음료수는 결국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치워졌다. 다만,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방 안에서 도현 뿐인 듯했다.


"환.타. '환자를 타게 된다' 뭐 이런 의미에요."

"네?"

"갑자기 응급수술들이 밀려오고, 환자들이 쏟아지고. 그런 걸 환자를 탄다고 하죠"

"안 그래도 오늘 평화롭고 좋았는데, 하필 저게 서비스로 온담"

"내가 1년차 때 환타 마신 순간 응급 이식이랑 씨섹이랑 한 번에 다 했잖아"


그들만의 은어를 모르는 도현이 재밌었는지, 다들 신나서 한마디씩 거들며 웃었다.


"오늘은 수술이 많이 없어서 조용하지 않을까요?"

"아!"


그러다 도현이 툭 던진 한 마디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탄성을 질렀다.


"그 말은 병원에서 금기인데, '오늘 환자가 없다'고 얘기한 순간부터 쏟아진다구요"

"헉. 죄송합니다"


이후로도 한참이나 '환타'라던가 '내공' 이라던가, 병원에서 통용되는 그들만의 미신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 얘기들을 누군가 들으면 하나도 재미가 없겠지만, 도현도 그런 순간이 즐거웠다. 끝없는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서 조금이라도 유쾌함으로 승화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도현이 이제 두 번째 피자 조각을 입에 넣으려는 순간, 어딘가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6810... 이거 엔에스 (NS;신경외과) 당직 번호인데?"


그 말에 다들 짧은 탄식과 함께 서로를 쳐다봤다. 이 시간에 신경외과 당직 의사가 마취과 당직에게 전화하는 용건은 단 하나.


"네, 마취과 치프입니다. 네, 지주막하출혈이요. 과거력은 없는 분인가요?"

"응급수술이구나..."


전화를 받는 치프 레지던트가 전화를 받으며 변재우에게 손짓을 하자 컴퓨터 앞으로 다가가 환자 정보를 보기 시작했다. 다른 전공의들은 응급수술이 생겼음을 서로 속삭이면서 서둘러 음식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퓨필 (pupil; 동공) 이 full dilatation 이요? 지금 바로 들어가야겠네요. 아뇨... 피 검사 기다리지 말고, 응급실에서 피만 뽑고 바로 수술방으로 환자 올려주시면 검사 결과는 저희가 수술 중에 확인하고 교정할게요. 저희 교수님께도 응급수술이라고 말씀드릴게요."


환자 정보를 확인하면서 치프의 통화 내용을 들은 변재우는 당직 교수님에게 전화를 했다.


"네, 교수님. 신경외과 응급 디컴 (decompression;감압술)이 생겨서요. 32세 남자 분이고 특이 과거력은 없는데, 아직 피 검사 결과는 안 나왔습니다. 응급실 도착하자마자 coma 에, 퓨필이 full dilatation 되어서 얼른 머리 열어줘야 한다고 해서요. 바로 수술방 올리겠습니다. 네, 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치프의 표정에서는 아까까지의 유쾌함과 가벼움은 찾을 수 없었다.


"다들 전화는 들었지? 응급 디컴인데 수술방 바로 올리기로 했으니까 얼른 준비하자"

"네, 교수님 노티도 되었어요"

"응, 고마워"


그 뒤로는 상황이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누군가는 수술방 간호들에게 연락을 돌렸고, 다른 레지던트는 수술에 필요한 처방들을 미리 내기 시작했다. 먹다 남은 음식들을 마저 정리하던 도현의 눈에 쓰레기통 뒤로 숨겨져 있던 환타 음료수가 들어왔다.


'이게 진짜... 저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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