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도착한 소아 병동. 자동문이 열리고 스테이션으로 들어간 순간, 평소같지 않은 무거운 분위기가 도현을 휘감았다. 소아 병동을 울렸을 보호자와 간호사들이 소아 환자들을 달래기 위한 반음쯤 올라간, 그 달래듯 다정한 목소리들. 그런 것 없이 무거운 적막이 깔려 있었다.
"라인 정리 할 환자... 환아는 어디죠?"
"아... 저기 9호에요"
그 분위기에 휩싸여 자연스레 도현도 숙연해질 수 밖에 없었다. 필요한 물품을 챙겨서 병실에 들어가자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도현을 보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녀의 눈빛에 슬픔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감정의 파도가 수없이 밀려왔다 갔을 그녀에게는 고요함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 아프지 않게 잘 해주세요”
도현이 환아의 쇄골 아래와 다리에 꽂혀 있는 정맥관들을 제거하려는데, 뒤에서 보호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그녀는 이제는 함께 웃을 수 없는, 먼저 머나먼 여행을 떠나가 버린 아들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도현은 이들의 마지막만을 보는 것임에도 그동안 어떤 고생을 해왔을지 어느 정도 예상이 되었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마지막을 정리해주었다. 사람의 죽음에 그 경중이 어디 있겠냐만은 이제 막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어야 할 아이의 임종은 성인 환자의 임종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가볍게 묵념을 하고 병실을 나온 도현은 무거운 적막을 깨는 고함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곧 간다니까요! 지금 사망환자 있어서 시간 좀 걸린다고요!"
소리가 들려온 곳은 스테이션 컴퓨터 앞.
쿠당탕-
고함 소리에 이어서 내동댕이 쳐진 핸드폰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도현의 발 앞으로 굴러왔다. 도현은 그것을 주워 컴퓨터 앞에 앉아 씩씩거리며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소아청소년과 1년차 레지던트 이로아.
"저... 선생님, 이거..."
"왜요?! 아..."
기록지를 쓰고 처방을 내느라 본인 핸드폰이 떨어졌는지도 모르고 있던 이로아는 누가 부르는 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돌아봤다가 도현을 보고는 당황해서 멈칫했다. 이내 도현의 한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을 발견하고 상황을 파악하고는 정신을 차린 이로아.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한쪽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떡이 진 앞머리와 뒤로 묶어뒀지만 정리할 시간도 없었는지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는 머리,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연속근무를 하고 있을지 상상이 갔다.
"아... 고마워요"
이로아는 핸드폰을 받아들고는 양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감정을 추스리고 다시 일에 집중하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눈 앞에 놓여진 처방 메모들을 보고는 다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이로아였다. 쉴새없이 밀려드는 일들에 숨이 막혀버릴 것만 같았다. 그 사이에 어느새 다시 울리기 시작하는 콜폰.
"하... 정말, 몸은 하난데 어쩌라는거야..."
모두가 울적해져 있는 환아의 죽음조차 공감할 새 없이 이로아에게는 얼른 해결하고 흘려보내야 할 일이 되어버렸다. 이런 정신적, 신체적 중압감은 20대 여자가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찬 일이었고, 그 한계를 넘어버린지는 오래였다. 도현은 이로아를 처음 본 것이지만 이미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소아청소년과 전체 2명 중 한 명. 2년 간 레지던트가 없던 소아청소년과에 용감하게 혼자서 지원한 사람이 있다고 전설처럼 전해져 이로아의 이름을 모르는 병원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도현은 그런 그녀가 안쓰러웠지만, 인턴인 본인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망설이다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소아병동을 나온 도현은 아까와는 급격하게 달라진 주변 분위기가 잠시 낯설게 느껴졌다. 병원 로비에는 슬퍼하는 사람도, 타들어가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는 사람도, 짓눌려가는 상황 속에서 혼자 치열하게 발버둥치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도현은 콜폰을 꺼내 보았으나 역시나 조용했다. 이로아의 것과는 다르게 오늘 하루종일 단 하나의 콜을 제외하고는 울리지 않았다. 소아청소년과 인턴은 다른 과의 인턴들과는 다르게 한가한 편이라 인기가 좋았다. 도현도 처음에는 편해서 마냥 좋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과는 다르게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로아를 보고 나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평소였으면 인턴 의국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워 있었겠지만,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누가 알아주지도, 달라질 것도 없겠지만 그저 불편한 마음이 싫어 소아 병동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병동으로 가는 복도에서 눈에 들어온 작은 방문 하나. ‘소아 놀이방’ 이라고 되어 있지만, 줄어든 소아 환자로 현재는 사용되지 않고 가끔 인턴들이 쉬는 곳으로 인계되고 있는 곳이었다. 도현은 그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방의 한쪽에는 2층 침대 하나가 있었고, 컴퓨터 하나. 그리고 그 옆 한쪽에는 지금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소아 발달용 장난감이며 동화책들이 쌓여있었다.
방을 둘러보던 도현은 컴퓨터 옆에 꽂혀있는 ‘소아과학’ 이라고 써있는 책을 하나 집어 펼쳐보았다.
책을 펼치자 보이는 첫 문구, ‘소아는 어른의 축소판이 아니다‘. 도현은 당직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기에 책장을 넘기며 천천히 교과서를 읽어갔다.
* * *
띠리리-
벨소리에 잠이 깬 도현은 깜짝 놀라 콜폰을 집어들었다.
“네, 소아과 인턴 이도현입니다“
“선생님, 소아 응급실입니다. 1년차 선생님이 인턴 쌤한테 연락해서 ecg 좀 바로 찍어달라고 부탁하셔서요.“
“저요? 아,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자리를 보니 몇 장씩 넘겨진 책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다. 살짝 머리를 털어 잠을 떨쳐낸 도현은 자리를 정리한 뒤 서둘러 방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