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아는 성인의 축소판? - 4

by 구름돌

어린 도현은 초록색 색연필을 쥐고 커다란 종이에 한글자, 한글자 꾹꾹 눌러가며 큼직한 글씨를 정성스럽게 써 내려갔다. 남들보다 눈에 띄기 위해 초록색 색연필을 쥐었지만, 행여 그마저도 잘 보이지 않을까 색연필로 몇 번이고 덧칠하며 또박또박 적어갔다.


'서리야, 네 책상 위에 내 물건들 안 넘어가게 조심히 쓰고 있어! 얼른 나아서...'


끝맺지 못한 문장을 잠시 멈추고 도현은 색연필을 든 채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오른편을 바라봤다. 한동안 아무도 앉지 않았던 그 자리. 여전히 텅 빈 책상은 해가 들어오며 창가 쪽으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비어 있는 책상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도현은 다시 글을 이어 썼다.

커다란 종이에는 도현 외에도 반 친구들이 남긴 삐뚤빼뚤한 편지들이 이미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건강하게 나아서 오면 우리 또 떡볶이 먹으러 가자'

'보고싶어 서리야'

'이서리! 모서리라고 안 놀릴 테니까 얼른 와'


익숙한 말투들이 담긴 문장들이 하나하나 펼쳐져 있었다.


"도현이가 마지막이지?"


담임선생님이 다가와 다 쓴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있는 도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도현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색연필을 내려놓았다. 선생님은 종이를 살짝 들여다보더니,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봉투와 함께 롤링페이퍼를 조심스럽게 모았다.


"이 편지랑 선물은... 선생님이 서리한테 꼭 잘 전달해줄게. 다들 응원해주고 있다고..."


선생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끝내 무언가를 말하려다 멈춘 표정. 도현은 그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서리에게 다시 편지를 쓴 일은 없었다. 그 롤링페이퍼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도현은 한 학기 넘게 짝꿍이 없는 채로 지냈다. 당시 그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처음 전학 온 학교에서 처음 만나 함께 등하교도 같이 하던 짝꿍을 더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그 나이에도 아무 말 없이 하루 종일 울었던 날이 있었다는 것만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 * *


'도망?'


학생 때부터 '이번에 인턴이 중간에 그만뒀다더라', '어느 과 레지던트가 휴가를 간 뒤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더라' 하는 등의 얘기들을 도시괴담처럼 들어왔었다. 그 때는 대수롭지 않게 듣고 웃어 넘겼었는데, 이 괴담 속으로 들어온 도현은 '도망' 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새벽에 응급실에서 보였던 지쳐버린 눈빛 때문이었을지, 환아의 사망진단서를 쓸 때 비쳤던 눈물 때문이었을지, 무엇이 그녀를 버티지 못 할 정도로 몰아넣었는지 도현은 알 수 없었다.


"거, 그래도 이로아 선생 오래 버텼지"

"4년차 치프. 오늘은 괜히 연락해서 찾지 말고 몇 일 쉬도록 둬"

"네 교수님. 병동 일들은 제가 커버하겠습니다"


레지던트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컨퍼런스룸의 분위기는 심각할 것이라는 도현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이런 일은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러운 교수들.


"저도 한 3일 바람 쐬고 나니까 다시 병원에 돌아오고 싶어지더라구요"

"한백광 교수가 1년차 때 누가 쫓아올까봐 제주도까지 갔댔지?"

"하하. 그 땐 진짜 제주도에서 낚시나 하면서 평생 숨어살까 했었죠"


결국 그 날 진행되었어야 할 컨퍼런스는 교수들의 옛 레지던트 시절 무용담을 듣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로아가 없어도 소아 병동의 일상은 평소와 같이 지나갔다. 아주 조금의 병동 일과 몇몇의 처방거리들이 도현에게 넘어왔을 뿐, 4년차 김은경은 누구를 탓하거나 힘든 내색 하나 없이 사라진 이로아의 일들을 대신 하며 빈자리를 채웠다.


"근데, 다들 생각보다 태연하시네요..."

"네?"


한창 처방을 내고 있던 김은경이 도현을 돌아봤다.


"아, 힘드실 법한데 이로아 선생님 찾지도 않고 뭐라고 하지도 않으시길래..."

"하하"


김은경이 크게 한 번 웃고는 처방을 마무리하고 대답했다.


"간만에 소아과에 들어온 소중한 1년차라서 몇일 쉬다가 돌아와주기만 해도 고맙죠. 일이야 뭐 나는 익숙한 것들이니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도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


"혼자서 많이 힘들었을거라... 바람 좀 쐬고 나면 괜찮아질거에요"

"역시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드셨을까요...?"

"음 일이 많기도 하고, 1년차는 혼자만 있는데 바로 윗년차 선배도 없고, 아이들이 좋아서 소아과 들어왔을텐데 자꾸 아픈 아이들만 보고, 또 죽기도 하고... 아이들은 귀엽고 예쁜데 또 보호자 대하는건 너무 힘들고"

"아... 그렇겠네요"

"그리고 나도 1년차랑 2년차 때 도망가봤어서, 무슨 심정일지 이해돼요"


김은경은 놀란 눈을 하고 있는 도현을 보며 깔깔 웃고는 핸드폰 바탕화면에 있는 애기 사진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 애가 아직 돌이라 오늘 내일 당직을 서야 하는게 조금 걱정이긴 한데... 어쩔 수 없죠 뭐"

"아니면 저라도..."

"하하, 아니에요. 어차피 인턴 선생님 당직 서면 백업도 필요하고. 선생님 어제 당직이었으니까 얼른 퇴근하세요"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퇴근을 서두르던 도현은 문득 허전한 느낌에 걸음을 멈췄다. 가운 안을 더듬다가 주머니에 있어야 할 무언가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 지갑...?'


주머니에 있었어야 할 그것이 없었다. 곰곰이 기억을 더듬던 도현은 전날 밤, 소아 병동 옆의 '소아 놀이방'에서 잠깐 눈을 붙였던 일이 떠올랐다. 피곤함에 못 이겨 책을 보다 깜빡 졸았떤 기억. 아마 그때 빠졌던 모양이었다.

도현은 마지못해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방이라 당연히 텅 비어 있을 터였다. 별생각 없이 문을 벌컥 열었는데, 안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도현은 문 앞에 멈춰섰다.


"이로아 선생님...?"


책상 앞, 컴퓨터 앞에는 이로아가 앉아 있었다. 전날 새벽의 그 지쳐버린 얼굴과는 달리, 지금의 이로아는 평소보다 훨씬 단정한 차림이었다. 질끈 묶은 머리, 옅은 청바지와 깨끗한 후드 집업. 도현이 그동안 봤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당황한 듯 짧게 인사를 건넨 이로아는 멋쩍어서 괜히 마우스를 만지작거렸다.

도현은 문턱에 선 채, 그녀와 화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고, 짧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 더 쉬고 오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조심스럽게 내뱉은 도현의 말에 이로아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중환자실 환자들, 오후 검사 결과 나올 시간이라서요..."

"...아..."


이로아의 대답은 단순했지만, 그 속에 어떤 감정들이 담겨져 있었을지 도현은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근무복을 벗고 병원을 나서면서도, 병원 밖의 공기를 마시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병원 복도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어도 그녀가 겪얶을 감정은 회오리처럼 마음 속을 맴돌았을 것이다. 탈진한 무력감과 동료들을 향한 미안함과 또 스스로를 향한 죄책감, 벗어나고 싶었던 절박함과 자신을 붙잡는 책임감이 한데 뒤엉켜 만들어낸 말없는 소란, 떠나려는 발끝을 붙잡는 잔여의식, 그런 것들이었을까.


"...괜찮으세요?"

"하하. 네"


도현의 말에 이로아는 가볍게 웃어 보이며 눈은 다시 컴퓨터 화면으로 돌아갔다.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밝은 표정이었다. 무언가 자신을 짓누르던 짐을 벗어던진 듯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나갔다가 너무 먹고 싶었던 마라탕부터 먹고... 근데 또 먹고 나니까 병원 생각, 환아 생각이 계속 나더라구요."

"병원에 중독되신 것 같아요."

"하하. 그런가 봐요."


도현은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지갑을 주워 들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다시 뵙게 돼서... 다행이에요."

"네. 고마워요."


도현은 문을 조용히 닫고 나왔다. 병원 밖으로 나오는 복도의 공기가 괜히 더 상쾌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소아과 1년차의 작은 일탈은 조용히 끝이 났다. 병원의 일상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시작되었다.


keyword
이전 12화소아는 성인의 축소판?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