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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마주하다 - 2

by 구름돌

"선생님, 죄송한데... 산모A NST 가 이상한 것 같아요! 한 번 봐주셔야 될 것 같아요"

"으어억..."


도현의 말에 2년차 레지던트 아랑은 기괴한 신음을 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직 잠이 덜 깬 눈을 간신히 뜨려고 애쓰며 다시 물었다.


"뭐, 뭐라고요?"

"산모 A 분 NST 가 갑자기 변해서요! Late deceleration 같습니다"


아랑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양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비비며 문을 열고 나왔다. 아직 잠이 가시지 않은 눈. 그 밑으로는 다크서클이 짙게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이내 모니터 앞으로 다가가 도현이 가리키는 쪽을 보자마자, 그녀의 눈빛이 바뀌었다. NST 파형을 시간 순서대로 돌려보며 살펴보던 아랑의 표정은 어느새 진지한 얼굴로 바뀌었고, 말없이 장갑을 끼며 산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산모분. 내진 좀 할게요"

"으... 선생님 아까보다 진통이 심해지는 것 같아요..."


산모 A의 온 몸에는 땀이 흥건했고 얼굴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현은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옆을 떠날 수는 없었다. 지금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라는 것은 분만실 내의 모두가직감하고 있었다. 긴장으로 조용해진 공기 속, 모두의 시선은 아랑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내진을 하며 손 끝을 느끼고 있는 아랑의 표정이 점차 굳어갔다.


"분명 괜찮았었는데..."

"선생님... 우리 아기, 괜찮나요?"

"..."


분만실을 짓누르는 짧은 침묵.


"지금... 태아 위치가 뒤집어진 것 같아요. 유도분만으로는 위험할 수 있어서, 바로 수술 해야 할 것 같아요"

"하아... 선생님... 뭐든요... 뭐든 얼른 해주세요..."


진통이 더 잦아지는지, 산모 A의 호흡은 점점 거칠어졌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남편의 손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와는 다르게 아랑은 곧바로 침착하게 움직였다. 서둘러 간호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동시에 콜폰으로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바로 수술방으로 갈 준비 해주세요. 처방은 바로 낼테니까 얼른요"


그 뒤로는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였다.


"네 교수님, 2년차 유아랑입니다. 지금 산모 A, 응급 섹션 필요할 것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전화를 하며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손. 이런 상황이 이제는 익숙해진 아랑은 교수님 컨펌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응급수술 스케줄을 올리고, 수술에 필요한 처방을 입력하고 마취과 당직 번호를 확인했다. 그 움직임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옆에서는 간호사들이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산모의 팔에 IV 라인을 새로 잡았고, 몇몇은 수술방으로 이동할 침대 준비를 하고 또다른 간호사는 응급수술에 필요한 동의서들을 출력하고 있었다.


"마취과 선생님, 산부인과인데요. 지금 산모분 응급 섹션 해야 됩니다. Level A 요. 네 지금 바로 들어가야 돼요. 바로 환자분 끌고 갈게요"

"이송 주임님 오시는데 시간 좀 걸린대요"

"기다릴 시간 없어요. 인턴 선생님, 저랑 같이 끌고 가요"

"아, 네!"


도현은 아랑과 함께 산모 A의 침대를 밀면서 복도로 나섰다. 아랑은 산모와 배우자에게 수술의 내용과 합병증에 대해 빠르게 설명하며 동의서를 내밀었다. 산모는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울먹거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배우자도 허둥지둥 동의서에 서명을 하였다.


"인턴 선생님, 저 먼저 가서 수술방 준비 좀 하고 있을게요. 그대로 수술방까지 들어와줘요"

"저, 저 수술복이 아닌데... 들어가도 되나요?"

"급한 상황이니까. 앞에까지는 괜찮아요. 안에서 제가 받을게요!"


아랑은 그 말과 함께 먼저 수술방으로 전력으로 달려나갔다.분만실에서 수술방까지는 5분 정도의 거리.

수술방으로 향하는 그 복도에는 침대 위에서 흐느끼는 산모와, 그녀의 손을 잡고 연신 눈물을 훔치는 배우자, 그리고 당혹스러움을 감추고 있는 도현이 있었다.


"선생님... 괜찮겠죠?"

"어..."


도현은 산부인과 전공이 아니었다. 부인암 수술은 봤지만, 분만을 본 적도 제왕절개 수술을 본 적도 없었다. 책 속의 지식이 현실로 돌진해오는 순간. 두려움과 책임이 한꺼번에 목덜미를 잡아챘다.


'저도 처음이라서요. 저도 무서워요'

'책에서는 제왕절개를 해야한다고만 배웠는데... 합병증은 10%라고 하던데...'


도현은 차마 꺼낼 수 없는 말들을 속으로 삼켰다. 덜컹거리며 바퀴가 튀는 소리만이 들리며 어색한 침묵이 복도를 감쌌다. 그때 도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복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의사 이도현' 이라고 쓰여진, 하얀 가운을 걸친 자신이 보였다.


"...괜찮을 거에요"

"네?"


자신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이지만 그것이 환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지 도현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말이 스스로에게 돌아와 본인을 일으켜 세우는 주문이 되었다. 이제는 흐렸던 시야도 선명해지고 두근거리던 심장도 진정이 되기 시작했다.


"산모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까 아기 맥박도 잘 있었고, 초기에 잘 발견이 되어서 괜찮을 겁니다"

"그쵸, 괜찮겠죠?"

"네. 괜찮으려고 바로 제왕절개 하는 거니까요. 교수님도, 저희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큰 의미가 있는 말이 아니었음에도 산모와 배우자의 눈빛이 미세하게 누그러지는 것을 느끼며, 도현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 뒤로는 수술실까지의 복도를 정신없이 달려갔다. 산모의 맥박을 나타내는 기계음과 간혹 '길 좀 비켜주세요!' 하는 도현의 외침이 병원 안을 울렸다.

수술실 앞 통제구역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아랑은 어느새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헐떡이는 숨과 이마에 맺힌 땀방울로 그녀가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알 수 있었다.


"인턴 선생님! 제가 입실하고 준비할테니까 선생님도 수술복 갈아입고 들어오세요. 어시스트 한 명 더 필요해요"

"네 알겠습니다"


서둘러 탈의실로 향해 옷을 갈아입는 동안 도현의 심장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처음 산부인과 인턴 인계를 받을 때 들었던 내용들을 서둘러 곱씹으면서.


'섹션 어시스트 때 뭐 하라 했더라'


2주나 지난지라 인계 받았던 기억이 희미해진 상태였다. 섹션 관련한 인계 사항이 너무 간단했다는 것만 기억이 나는 도현.

그때, 단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


'주는 대로 잘 잡고, 잘 당겨라'


숨을 몰아쉬며 수술방으로 향한 도현. 이미 환자는 옮겨져 있었고, 마취는 마친 상태였고 수술이 진행되려는 순간이었다.


'손, 손부터 씻고 와야지'


간호사에게 가운과 장갑을 준비해달라고 한 뒤 서둘러 손을 씻고, 수술 가운을 입었다. 그 사이에 교수와 아랑은 이미 수술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어느새 교수의 손에는 메스가 들려 있었다.


"마취과 선생님, 시작하겠습니다. 인턴아, 내 왼쪽으로 와라"


그 순간, 도현은 또 하나의 생명의 경계선 위에 섰다.


"인턴, 잡아!"


순식간에 교수는 피부를 가르고, 리트랙터를 걸어 도현에게 내밀었다. 아니 거의 집어 던진 리트랙터를 도현은 간신히 붙잡고 당겼다. 무엇을 당기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단 하나 기억하는 그대로, 휙휙 날아오는 기구들을 도현은 그저 열심히 붙잡고 당겼다. 그 정도로 수술을 빠르고, 정신없이 진행되었다. 저 부풀어 있는 배 속에 새로운 별이 세상으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받아주세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볼 새도 없이, 어느 순간 교수의 양 손에는 한 생명체가 들려 있었다. 소중한 아기였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소아과에 아기를 넘겨주고, 출혈 부위를 지혈하는 그 짧은 순간. 모두가 침묵한 채 한 가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응애~"


아기의 울음소리가 수술실 안을 울리자, 그제서야 모두가 긴장의 끈을 놓고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교수와 아랑이 수술을 마무리 하는 동안, 도현은 수술에 집중할 수 없었다. 도현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소아과 선생님들에게 안긴 채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우렁차게 포효하고 있는 아기. 이제 막 태어난 생명이었다.


수술은 큰 문제없이 마무리 되었고, 마취에서 깬 산모도 무사한 것이 확인되자 그제서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고 소란스럽던 병원도 안정을 되찾았다.


“인턴 선생님, 새벽에 진짜 고생했어요”


이제는 눈 밑의 다크서클이 어디까지 내려갔는지 보이지도 않는 아랑이 눈을 거의 감은 채로 도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도현은 긴 하루가 드디어 끝났음을 느끼며 분만실을 나왔다.

도현의 손에는 편의점에서 산 생수가 들려 있었다. 오늘은 어쩐지 그 무엇도 첨가되지 않은, 맑고 깨끗한 물을 마시고 싶어서였다.

아침이 된 병원은 출근하는 사람들, 이른 시간에 외래를 접수하러 온 환자와 보호자들로 북적거리며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또 다른 시작. 세상은 그렇게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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