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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마주하다

by 구름돌

수술실 한쪽 구석.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오는 작은 식당에는 인턴과 레지던트들 그리고 교수 몇명이 제각각 자리에 흩어져 늦은 점심을 때우고 있었다. 반쯤 식은 밥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빨간 국, 눅눅해져버린 돈까스 몇 조각. 도현은 이제는 익숙한 구성의 식판을 앞에 두고 묵묵히 그것들을 입에 욱여넣었다.

그때, 앞자리에 누군가 식판을 들고 앉았다.


"오랜만이네"


그 목소리에 도현이 고개를 들자, 초록색 수술복 위에 하늘색 수술모를 눌러썼음에도 보이는 묘한 차가움. 익숙한 얼굴이었다.


"차슬기, 너도 산부인과였었지"

"응, 산과. 너는 부인과?"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진 어색한 침묵. 저번 내과 인턴 때 종종 함께 일하며 조금은 가까워졌지만, 아직 묘한 거리감이 남아 있는 사이였다. 그래도 이렇게 뜻밖에 마주치니 반가움이 생겨났다.


"지금 누구 교수님 파트였더라?"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슬기였다.


"위남모 교수님 파트"


슬기는 연신 바쁘게 움직이던 숟가락도 내려놓고 감탄하듯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 좋겠다. 위 교수님이 난소암 쪽 항암 연구도 엄청 많이 하셔서 이번에 Nature 에 논문도 실으셨잖아. 나도 항암 연구 관심 있어서 산부인과 돌 때 위남모 교수님 파트 돌고 싶었는데, 나는 산과에 걸려 버려서..."


신나서 떠들던 슬기가 조금 당황한 도현의 표정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도현은 슬기를 본 뒤로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자신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는게 부끄러웠는지 슬기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하, 아니. 신기해서."

"...아쉬워가지고"

"종양내과 가고 싶댔었지. 항암 연구에 진짜 관심이 많구나"

"...응"


도현은 어딘지 모르게 차슬기가 친근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그만큼이나 좋아하는 것에 눈을 반짝거리는 모습에 순간 슬기가 빛나 보였다.


"근데 산과 수술도 재밌지 않아?"


분위기를 바꿔보려 도현이 물었다.


"음... 맨날 분만만 해서..."

"분만, 무섭고 신기할 것 같은데"


슬기는 밥을 한 순갈 크게 떠서 입에 넣은 뒤, 피식 웃었다.


"처음엔 솔직히 무서웠지. 수술은 엄청 빨리 진행되고, 피도 생각보다 엄청 나고... 그러다 어느 순간 아기는 그냥 갑자기 툭 하고 나오고"


아직 밥이 한 가득 담긴 입에 반찬들을 밀어넣으면서 우물거리며 이어서 말했다.


"첫 주에는 신기했는데, 매일 보니까... 좀 질리더라."

"그렇구나..."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국을 한 숟갈 떠 넣었다. 국물의 간이 너무 세서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말없이 넘겼다. 슬기는 그런 국물도 개의치 않고 후루룩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분만실 당직도 하지 않아?"


허겁지겁 밥을 먹던 슬기가 문득 물었다.


"응. 근데 이상하게 내가 당직 들어가면 분만이 없어. 그래서 다들 나 분만실 당직인 날에는 좋아하더라."

"아, 진짜?"


슬기는 계속 식판만 바라본 채 입으로 반찬을 이것저것 집어 넣으며 대꾸했다.


"나는 '삼신할매'래"

"응?"


슬기는 슬쩍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당직일 땐, 분만일도 많이 남고 안정적이던 산모가 갑자기 진통을 하고, 꼭 한 번씩은 씨섹 (Cesarean section;제왕절개) 케이스도 생기더라고. 나한테 분만의 기운이 있다더라"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크게 웃어버렸다. 차슬기 특유의 무표정에 담긴 농담은 묘하게 중독성이 있었다.

그 이후로 말없이 식사를 이어가던 둘은, 어느새 식판을 깨끗이 비워버렸다. 그 시간은 단 15분.


"이제 다음 케이스 준비하러 가봐야겠다"


* * *

오후 늦게서야 수술이 다 끝난 도현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수술실 밖으로 나왔다. 병원은 어느덧 낮의 활기는 사라지고 적막이 가득했다. 불은 훤히 켜져 있지만, 복도에는 간혹 늦은 퇴근을 하는 의사와 간호사들만 보였을 뿐이다. 도현은 그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아직 끝나지 않은 하루를 시작하러 가고 있었다.


'오늘은 분만이 있으려나'


분만실 당직을 서는 때에는 항상 복잡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생명이 태어나는 경이로움, 동시에 언제든지 위급한 상황으로 돌변할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함. 이 순간이면 항상 두려움과 기대감을 느끼는 도현이었다.

분만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간호사가 반가운 듯 웃으며 말했다.


"어머, 내공 좋은 선생님 오셨네!"

"...내공이요?"


도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왜, 병원에 보면 꼭 일 몰리는 선생님들 있잖아요. 그런 분들한테는 '내공이 안 좋다'고 하고... 반대로 도현쌤처럼 꼭 아무 일 없고 조용히 넘어가는 분들은 '내공이 좋다'고 해요. 우리끼리 하는 말이에요."


도현은 머쓱하게 웃었다. '내공'이란 단어가 무협지에 나올법한 말이라 오글거리기도 했지만, 묘하게 뿌듯함이 밀려오기도 했다.


"제가 내공이 좀 좋긴 하죠"

"오늘 OBGY (산부인과) 2년차 쌤이 내공이 안 좋긴 한데... 도현쌤 있어서 희망이 보이네요"


분만실 한 구석 컴퓨터 앞에는 기름진 머리를 뒤로 묶고 한 손으로는 처방을 내면서, 한 손으로는 콜폰을 받고 짜증을 내고 있는 레지던트가 있었다.


"아, 급한거만 말해주세요. 바빠요 바빠"


그러고는 콜폰을 책상 위에 쾅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는 바람에 콜폰이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도현의 발 밑까지 날아온 콜폰을 주워서 건네자 그제서야 2년차 레지던트는 도현을 보았다.


"아, 그 내공 좋다는 인턴썜이구나"

"하하. 네..."

"제발 오늘은 선생님 덕분에 조용히 넘어가면 좋겠네요"


그렇게 시작된 분만실 당직. 도현의 임무는 단순했다. NST, 즉 Non-Stress test 모니터를 산모들에게 부착하고, 화면을 지켜보는 일. 화면 상 이상이 생기면 레지던트에게 바로 알리는 것이 도현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도현은 분만실 한 켠 의자에 앉아 NST 파형이 흐르는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는 선.


'저게, 배 안의 아이 심박동이구나'


현재 분만실에 있는 3명의 산모의 NST 파형은 변동성도 정상, 심박수도 규칙적이었다. 정말 도현의 내공 덕분인지 분만실은 놀라울 정도로 고요했다.옆에서는 그와는 대조되게 2년차 레지던트만이 병동과 분만실을 오가며 숨 돌릴 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덧 새벽 3시, 마지막으로 분만실과 MFICU (Maternal-Fetal Intensive Care Unit;산모-태아 집중치료실) 의 산모까지 확인하고 돌아온 그녀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더니 눈을 감은 채 도현을 불렀다.


"도현쌤. 지금 다들 안정적이니까... 나 진짜 30분만 잘게요. 진짜 30분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옆방으로 사라졌다. 도현은 그 처량한 뒷모습을 보며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았다.


'무슨 일이야 있겠어...'


하지만, 그로부터 15분쯤 지났을 무렵.

도현의 눈에, 파형 하나가 이상하게 걸렸다. 산모 A의 NST 파형이 아까까지와는 달랐다. 태아의 심박수는 170 가까이 치솟았다가 단기적인 변동성이 급격히 떨어졌다. 그리고 몇 초 후, 갑작스럽게 90대까지 떨어졌다가 회복되기를 반복하였다.


'Late deceleration...?' 베이스라인은 올라가고, variability 는 줄어 보이고...'


순간, 도현의 등줄기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의과대학에서 배웠던 전형적인 태아 저산소증의 징후. 도현은 벌떡 일어나 쪽방으로 달려가서 문을 벌컥 열었다.


"선생님, 죄송한데... 산모A NST 가 이상한 것 같아요! 한 번 봐주셔야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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