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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는 성인의 축소판?

by 구름돌

소아과 병동 스테이션. 한쪽 구석에서는 조금 상기된 표정의 도현이 서 있었다. 평소의 인턴답지 않게 셔츠와 넥타이를 맨 그의 몸짓에는 긴장감도 서려 있었다. 손에는 형광펜으로 줄을 긋고, 빨간 펜으로 주석을 달고, 포스트잇까지 붙인 환자 리스트가 들려 있었다.

고작 네명. 그런데도 이 네 명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새벽부터 EMR 을 뒤지고, 교과서를 읽어보고 과거 검사 결과들까지 확인하느라 한숨도 못 잔 도현이었다.

의과대학 시절, 소아과 수업에서 가장 먼저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소아는 성인의 축소판이 아니다'


성인 환자를 볼 때 많이 봤던 피검사 수치이지만, 소아에서는 그 의미와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 도현은 더욱 더 긴장해서 준비할 수 밖에 없었다. 아직 세상에 나온지 일년도 채 되지 않아 환자의 나이를 나타내는 항목에 0Y6M 라고 쓰여진 것에서 이 병원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감이 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 내리는 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한백광 교수가 가운 주머니에 양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인턴 이도현입니다"

"아, 반가워. 회진 돕시다"


도현은 수십번 시뮬레이션 한대로, 교수의 앞으로 후다닥 앞질러 가면서 1호 환아 쪽으로 향했다.


"1호 A 환아는 오늘 루틴 lab 결과 나왔는데요, BUN 은 그대로인데 Cr (크레아틴) 수치가..."

"1호? A 환아는 오늘 lab 안 나갔어. B 환아지? Cr 좀 높긴 한데 이전보다 많이 좋아졌더라"


도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말을 끊는 한백광 교수. 도현은 그의 말에 당황해서 서둘러 명단을 다시 살펴보고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손에는 명단도 들고 있지 않은 그의 머릿 속에는 본인 환자들의 모든 검사 결과가 있으리라.

도현이 차트를 다시 살펴 보느라 머뭇거리는 사이, 한백광 교수는 자연스럽게 본인의 환자를 찾아 회진을 돌기 시작했다. 1호로 들어가 커튼을 젖히자, 침대에 누워있는 A 환아가 보였다. 저 작은 소아용 침대를 절반도 채우지 못 한 채, 세상을 향해 밝게 웃으며 날아다녀야 하지만 그러지 못 하고 그저 힘없이 누워 있는 모습이 아이 같으면서도 아이 같지 않다고 느껴졌다. 그 옆에는 도현과 또래로 보이는 보호자가 아이의 손을 잡은 채로 도현과 한백광 교수를 반갑게 맞아줬다.

한백광 교수는 익숙하게 환아의 상태를 확인하고, 앞으로 진행될 항암 치료 날짜를 알려주고는 다음 환아에게로 향했다. 고민도 하지 않고 정확한 검사 수치와 예정된 치료 날짜까지 말하는 그것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있을까. 본인 환자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

그 때, 밖으로 나가려던 도현에게 A 환아 침대 머리맡에 붙어 있는 이름표가 눈에 들어왔다.


'소아혈액종양과 교수 : 한백광 / 담당주치의 : 이도현'


'주치의'라는 단어가 주는 부담감. 아직은 인턴으로서 시키는 일들만 하면 됐을 도현에게 그것은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그 낯설음에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환자 차트로 가운 가슴 한 켠에 써져 있는 이름표를 슬쩍 가려버렸다.


"3호 환아는 내가 말한대로 진통제 좀 챙겨주고, 2호 환아는 오늘 복부 x-ray 검사 좀 해볼게요"

"네, 교수님 처방은 이로아 선생님한테 받을게요"

"1년차? 아니에요. 이로아 선생은 바빠서 못 내줄텐데"


회진을 마친 뒤 간호사와 회진 정리를 하는 한백광 교수. 도현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로아 선생님이 소아과에 단 두 명 있다던 레지던트 중 한 명인가보다 생각했다.


"처방 메모만 남겨주시면 제가 내겠습니다. 교수님"

"하하, 이도현 선생. 고맙긴 한데 처방은 내가 외래 중간중간 낼게. 오늘 고생했어요"


패기롭게 말한 도현도 소아과 처방은 인턴이 함부로 건들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한백광 교수가 본인을 믿고 맡기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한백광 교수의 피곤에 절여 있는 눈빛과 전날 당직을 서서인지 기름져 있는 머리를 보고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교수님, 오늘 외래 환자도 70명이나 있으신데...!"

"하하... 오늘도 점심은 글렀네"


그 말과 함께 한백광 교수는 터덜터덜 외래가 있는 4층으로 내려갔다. 그의 뒷모습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어딘지 단단해 보였다. 늘 부족한 인력 탓에 일주일에 두 세번은 당직을 서고, 입원환자들도 일일이 손수 다 챙기면서도 협진이니 컨퍼런스니 학회니 타 과와의 일에도 안 끼는 곳이 없는 그였다. 50살이 다 되어가도록 무엇이 그를 이렇게까지 버틸 수 있게 하는 것일까.

도현은 그런 한백광 교수를 생각하자 어딘지 가슴 한 켠이 뭉클하고 간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인턴 선생님, 수고하셨어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병동 간호사와 인사를 하며 다시 의국으로 향하는데, 도현의 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네, 소아과 인턴 이도현입니다"

"...선생님, 여기 32병동인데요. 라인 정리 할 환아 있어서요"

"네, 바로 갈게요"


전화를 끊고 나서야 도현은 문득 멈춰섰다. 평소와는 다른 괴리감이 느껴져서였다.


'라인 정리...?'


라인 정리. 의미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소아과에서 그 단어를 들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 했을 뿐이다.


'방금 콜 한 간호사... 울먹인 건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던 그 미세한 떨림이 귓가에 다시 떠올랐다. 도현은 가운 주머니에서 괜스레 볼펜을 쥐었다 놓기를 반복하다가, 천천히 병동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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