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 선생님, 13호 환자분 TID (하루 세 번) 드레싱 하시는 분이라 밤에도 해주셔야 돼요"
"아, 네. 곧 갈게요"
도현은 전화를 끊고 오후 11 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를 봤다.
'하아...'
깊은 한숨과 함께 내고 있던 처방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병동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평소보다도 무거웠다. 오늘만 벌써 세 번 째 드레싱. 혹시나 은근슬쩍 한 번 정도는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어김없이 전화가 왔다고 생각하는 도현이었다.
"아이고, 선생님. 저 때문에 잠도 못 주무시고 죄송해요"
얼른 끝내고 자러 갈 생각만 하고 있던 도현이 표정을 읽었는지, 곽상동 환자가 말을 꺼냈다. 언제나와 같이 악의 없이 온화한 목소리로.
"아, 아니에요"
"선생님은 손이 참 따뜻하셔. 잘 생기셔서 그런가"
"에이, 아닙니다"
도현은 드레싱 하러 오기 귀찮아하던 것이 민망해 서둘러 소독을 마쳤다.
"자, 다 됐습니다. 내일 아침에 또 올게요"
"감사해요 선생님. 푹 주무시고 내일은 천천히 해주셔도 돼요. 그리고 이거..."
곽상동은 침대 옆에 쌓여 있는 박스에서 두유팩 하나를 건네줬다. 도현은 괜찮다며 사양했지만, 이런 거라도 주고 싶다고 하는 곽상동과 실랑이를 하다 옆의 환자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고 나왔다.
곽상동 환자의 옆에는 아내분이 인자하게 눈웃음을 지어주면서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도현이 손에 들고 있는 음료수에서는 어쩐지 따뜻함이 느껴졌다.
당직실로 돌아온 도현이 마스크를 내리며 의자에 기대 앉자, 먼저 당직실에 와 있던 정환이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어, 곽상동 환자분 루틴 드레싱?"
"응? 어떻게 알아?"
"그 분은 드레싱할 때마다 꼭 음료수 주시잖아. 저번 달에 내가 호스피스 병동 담당이었을 때도 매일 받았지."
들고 있던 두유를 책상에 올려두고 고개를 끄덕이는 도현.
"아, 형이 저번 달이었지. 환자분 젊은 분이시던데."
"응. 마흔셋. 위암 수술하고 항암도 다 했는데, 결국 재발하고 여기저기 퍼져서 호스피스 병동에 계시다고 하더라고..."
"그랬구나... 환자분도 그렇고 보호자분도 밝으셔서 그런 느낌을 못 받았는데."
"그런 느낌?"
"응. 그 왜... 죽음을 앞둔 그런 사람의 느낌?"
정환은 말없이 있었으나 도현의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듯했다.
"나도 처음 호스피스 병동 담당 시작할 때는 겁먹고 있었는데, 곽상동 환자분 덕에 생각이 많이 바꼈어"
정환의 '겁먹었다' 라는 표현이 도현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호스피스 병동 인턴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느껴졌던 어딘지 모를 불편함. 이제 인턴 생활이 적응이 된지도 오래이지만, 도현도 모르게 자꾸 뚝딱거리고 환자나 보호자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 했었다. 다른 병동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그 공기가 싫어서 호스피스 병동으로 드레싱을 하러 갈 때마다 발걸음이 무거워졌었다.
정환의 말을 들은 순간, 그 모든 것들이 이해되었다.
'나는 겁먹고 있었구나'
죽음을 받아들이고 삶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는 '호스피스' 라는 단어가 주는 압박감에 지레 겁먹고 있던 도현이었다. 어떤 행동이 실례가 되진 않을지, 말조심을 해야 하진 않을지, 복장이라던가 걸음걸이도, 드레싱을 하는 방법도 무례해 보이거나 불편해하진 않을지 긴장한 채로 호스피스 환자를 대했다. 마치 성인이 된 후 처음 장례식장에 가는 모습처럼 과하게 조심스러웠고 어색했다.
매번 오는 인턴들에게서 그런 분위기를 느껴 곽상동 환자는 편하게 해주려 먼저 말을 걸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상처 부위에서 진물이 자꾸 나와 하루 세 번이나 드레싱을 받는 것이 짜증이 날 법도 했지만, 단 한 번도 얼굴을 찡그리거나 불만을 표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유쾌하게 말을 걸어줬을 뿐.
"그래도 TID 드레싱은 역시 귀찮긴 하지?"
"아냐, 상처가 많이 안 좋던데. 해야지 뭐"
* * *
도현의 당직실 책상 위에 하나둘 쌓여 가는 두유팩처럼, 호스피스 병동에서의 시간도 그의 일상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숨죽이며 걷더 그 복도, 낯설게 느껴지던 특유의 공기도 이제는 익숙했다. 죽음을 기다리는 병동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평범했다. 여느 병동의 환자들과 다를 바 없이, 아프고, 웃고, 서로 감사를 전하는 사람들이었다.
"선생님, 오늘은 꼭 점심 식사 전에 드레싱 하러 와주세요."
"지금 다른 일도 있어서요. 최대한 오늘 세 번 간격 맞춰서 할게요. 급한거 아니잖아요."
익숙함이라는 이름의 둔감함이 마음 속 긴장감을 서서히 무너뜨린 탓일까. 처음에는 핸드폰 알람까지 맞춰놓고 정확한 간격을 지켜서 드레싱을 챙기려 애썼던 도현도, 이제는 바쁘다는 핑계로 조금씩 시간을 못 맞추는 일이 잦아졌다.
오후 4시. 두 번째 드레싱을 할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도현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터덜터덜 호스피스 병동으로 향했다. 드레싱 물품을 챙기는 동안 한숨이 나왔다. 일도 아직 많이 밀려있고, 몸도 너무 피곤했었다.
'한 번쯤은... 그냥 건너뛰면 안 되나...'
변해버린 것은 도현 뿐이었는지,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곽상동은 언제나와 같이 온화한 표정으로 도현을 반겨주었다.
"오늘 많이 바쁘셨나 봐요"
"아, 늦어서 죄송해요. 일찍 왔어야 하는데"
"...콜록, 콜록"
평소였다면 괜찮다는 말과 함께 특유의 농담이 나왔어야 할텐데, 대신 돌아온 것은 가래가 가득한 기침소리였다. 한참 기침을 하는 곽상동은 평소와 다르게 어딘지 불편해 보였다.
"괜찮으세요?"
"오늘은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아요..."
그의 곁에 앉아 있던 아내는 손끝으로 담요 끝을 손끝으로 쥐고 있었다. 꾹 다문 입술과 붉어진 눈가.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도현이 드레싱을 마무리하는 순간, 기침을 멈춘 곽상동이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선생님"
"네?"
"실례가 안 된다면,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네? 무슨..."
"선생님 얼굴을 한 번만 볼 수 있을까요?"
도현은 그 말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호스피스 병동에 올 때에는 빼먹지 않고 마스크를 착용하던 도현이었다. 도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곽상동을 보았다. 평소처럼 농담일까, 진심일까. 그의 눈빛에서 평소와 같은 장난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
망설이는 도현에게 곽상동은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우리 선생님 얼굴을 못 봐서..."
그리고 덧붙인 말.
"떠날 때 기억하고 가고 싶어서요"
그 말은 너무도 담담하게, 마치 날씨 얘기라도 하듯 흘러나왔다. 무겁고 쓸쓸한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엔 어떤 평온함이 감돌고 있었다. 익숙한 병실 안에서, 전에 없던 낯선 침묵 속에서 도현은 말없이 마스크를 천천히 내렸다.
곽상동은 잠시 도현을 바라보더니, 아내에게 웃으며 말했다.
"거봐, 내가 이 선생님 미남이라고 했잖아..."
"아이고, 아니에요. 오늘 밤에 또 드레싱 하러 올게요"
"오늘은 늦었으니까... 괜찮아요. 저희가 주치의 선생님한테 잘 말씀드릴게요"
당황하는 도현에게 아내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거듭 괜찮다고 했다. 그녀의 눈빛에 담긴 어떤 것. 도현은 그걸 다 읽을 수 없었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병실을 나서려는 도현을 곽상동이 다시 불렀다.
"선생님, 이거요..."
그는 침대 옆에 가지런히 놓인 음료 박스 중, 가장 아래에 숨겨져 있던 비타민 음료를 하나 꺼내 건넸다.
"이거... 이거는 아끼던 건데, 얼굴도 보여주셨으니까 선물이에요"
도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음료를 받아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희미하게 웃어보이는 곽상동에게 도현도 살짝 웃어줬을 뿐이었다. 마스크를 다시 올리며 호스피스 병동을 나와 복도를 걷는 발걸음이 올 때보다도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기억하고 싶어서...'
그 말이 도현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기억하겠다는 말. 그것은 곧, 잊혀질 준비를 마친 자의 말이었다.
* * *
다음날 아침, 도현은 평소답지 않게 늦잠을 자버렸다. 당직 때에는 쪽잠을 자거나 거의 자지 않는 도현인데, 어쩐지 침대에 파묻혀 쓰러지듯이 깊이 잠이 들어버렸다.
서둘러 가운을 입고 빠른 걸음으로 호스피스 병동으로 들어섰지만, 어딘가 낯설었다. 복도는 조용했고, 준비되어 있어야 할 드레싱 물품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13호 드레싱 준비가 안 되어 있네요?"
"아... 13호 환자분, 새벽에..."
간호사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손가락으로 복도 끝을 가리켰다. 도현은 그 곳을 바라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호스피스 병동의 구석에 마련된 공간. 그 곳의 의미를 도현은 알고 있었다.
그 곳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는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흐의 "Jesu, Joy of Man's Desiring".
곽상동 환자의 병실에서 언제나 잔잔히 흘러나오던 음악이었다.
문 틈으로 보이는 방 안의 침대 위에는 하얀 천이 씌어져 있었고, 그의 손을 꼭 붙잡고 흐느끼는 아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그 동안 곁에서 참아왔던 슬픔을 몰아쉬듯이 슬픔을 울부짖고 있었다.
조용히 문을 닫고 그를 뒤로 한 채 의국으로 돌아온 도현은 멍하니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음료수들을 바라보았다. 두유, 비타 500, 아미노산 드링크... 무심코 쌓아둔 그것들은 어느새 작은 탑처럼 높아져 있었다. 그냥 드레싱 해줬다는 이유 하나로, 그가 매일같이 건네던 작은 정성이었다.
그저 음료수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하나하나가 곽상동이라는 사람의 흔적이었다. 누구보다 공손했고, 미안해했고, 유쾌했고, 담담했다. 그는 죽음을 향해 걷고 있었지만, 한 번도 그 걸음을 외롭고 슬프게 걸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배려했고, 그 따뜻함으로 작은 흔적들을 남겼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도현은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말없이, 그냥 조용히.
그러다 문득 맨 위에 놓인 노란색 비타민 음료를 하나 들어 올렸다. 어제 받았던 그 음료.
곽상동 환자가 '아끼던 거'라며 건네주던 순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스크를 내린 도현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 그리고 숨겨진 작별 인사.
도현은 음료를 따고는, 입에 가져가 한 모금, 한 모금씩 아주 천천히 마셨다.
처음에는 시었다.
곧이어, 약간 썼다.
그리고 마지막엔, 이상하리만치 달았다.
목을 타고 천천히 내려가는 그 온도와 맛이, 도현을 감싸 안는 것 같았다.
눈을 감은 도현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채 마음 속에서 천천히 작별을 완성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