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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젼 (Surgeon) 이도현

by 구름돌

도현이 외과 인턴이 된 지 2주.

정신없이 흘러갔던 처음 며칠과는 다르게, 도현은 이제 콜폰이 울려도 이전처럼 심장이 내려앉지 않았고 수술방에 들어가는 것도 편안해지고 있었다. 수술방 간호사와 마취과와 합을 맞추며 수술방 안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도, 수술방 기구들을 다루는 것도, 수술방을 정리하는 것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김동구 레지던트는 도움을 주지 않았다. 도현이 손이 빨라질수록 더 많은 일을 할 뿐.

처음에는 억울했고 화도 났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했다. 몸이 조금 고생하는 게 낫지, 쓸데없이 감정 소모를 하며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다만 아직도 힘든 건, 수술 중 김동구가 실수할 때마다 문시혁 교수의 욕설이 수술방을 뒤덮는 순간.


"야, 김동구. 석션 좀 제대로 해. 4년차 맞아?"


그럴 때마다, 수술방 안의 공기가 모두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문시혁 교수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도현은 여전히 깜짝 놀랐고,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교수가 수술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숨은 얕게 쉬게 되고, 그가 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게 되는 게 일상이 되어 있었다. 주요 질타 대상이 김동구였지만, 정작 그는 같은 실수를 매번 반복했고 여전히 수술 도중 우왕자왕했다. 수술이 끝나면 반성의 기미도 없이 특유의 넉살을 부리며 슬쩍 휴게실로 사라져 버렸고, 그가 흘리고 간 스트레스는 도현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떠안아야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공공의 적이 생긴 수술방에서 도현은 점점 그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도현은 김동구 덕분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빠른 시간 안에 수술방 생활에 적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씩 여유가 생기자, 도현은 수술 전 환자 영상이나 자료를 보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어떤 수술이 예정되어 있는지 미리 확인하고, 수술 관련 동영상을 유X브로 찾아보기도 했다. 퇴근 후에는 시원한 맥주 한 캔을 옆에 두고, 먼지가 쌓여 있던 해부학 교과서를 꺼냈다. 다음날 마주하게 구조물들을 미리 눈에 익히는 일이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즐거웠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날 수록, 그저 붉고 노랗게만 보였던 이질적인 덩어리들이 조금씩 교과서 속 해부 그림처럼 도현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머릿 속에 그려 두었던 그림과 눈앞에 펼쳐진 실제 해부학적 구조물들이 일치하는 순간, 도현은 처음으로 수술이 '재밌다'고 느꼈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미리 수술 영상을 보고 수술을 준비했다.

예정된 수술은 직장암에 대해 시행하는 저위 전방 절제술 (low anterior resection).

이미 여러 번 본 수술이었지만, 도현은 전 날밤에도 교과서를 펼처 들었었다. 하장간막동맥 (IMA), 좌결장동맥 (LCA) 등 이 수술에서 볼 수 있는 혈관들에 대해 다시 한번 복습했다.

그리고 지금, 도현은 이제는 익숙하게 교수가 건네주는 리트랙터를 붙잡고 당기면서 수술을 지켜봤다.

문시혁 교수가 핀셋으로 막을 보비로 지져서 가른 순간 혈관 하나가 나왔고,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작은 소리를 냈다.


“어?”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수술방에는 정적이 흘렀고 문시혁 교수의 손도 멈췄다.

딱히 잘못한 것은 없지만, 도현은 수술을 방해했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나고 마른침만 꿀꺽 삼키고 있었다.

너무 여유가 생겨 버려서였을까, 하필 가장 긴장하고 있어야 할 순간에 소리를 낸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고개는 들 수 없었지만, 문시혁 교수를 포함하여 수술방 안의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는 듯했다.


“인턴.“

“네, 교수님. 죄송합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도현의 예상과는 다르게 문시혁 교수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혼내는 어조가 아니라, 묻는 말투였다.


"지금 이 혈관 이름이 뭐지?”


도현은 순간 숨을 들이마셨다.

어제 본 교과서 속 그림을 다시 더듬어보며 대답했다.


“ left colic artery 같습니다“

“응. 근데 좀 이상하지?”


문시혁 교수는 도현이 소리를 낸 이유를 아는 듯했다.


“네… 보통은 IMA 에서 바로 left colic 이 갈라지는데, 지금은 sigmoid artery랑 같이 나오는 variation 같습니다."

“공부했나?”

“네, 들어오기 전에 조금 했습니다”

“…”


문시혁 교수는 아무 말 없이 도현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이내 다시 수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도현은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 차라리 맞다거나, 틀렸다거나 한마디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판정을 유예당해 긴장감만 더해졌다. 문시혁 교수의 속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십여분을 수술을 진행하던 문시혁 교수가 입을 열었다.


"인턴."

"네, 교수님."

"너, 서젼 (surgeon;외과의) 해라."

"...네?"


말이 너무 짧았다. 도현이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나중에 전공 뭐 하든 간에, 일반외과든 뭐든. 수술하는 과 하라고. 그게 너한테 맞을거다."


도현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니, 애초에 문시혁 교수가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건조했고, 얼굴엔 그 어떤 감정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짧고 무뚝뚝한 한마디에 담긴 뉘앙스는 분명히 전해졌다.

몇 초가 지나서야 도현은 겨우 짧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문시혁 교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수술은 계속 되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도현의 가슴 한가운데 어딘가에서는, 작고 단단한 무언가가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도현은 이 순간에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말 한마디가 인턴 이도현이라는 알에 처음으로 미세한 금을 낸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 벅찬 순간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도현은 이내, 그날의 대답을 조금 후회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김동구는 수시로 도현에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인턴쌤, 폴리 (foley) 를 누가 그렇게 넣으라고 가르쳐줬어요?"

"드랩 이렇게 해두면 다 컨타 (contamination;오염) 되는거 몰라요?"

"준비를 이렇게 느리게 해두면, 수술이 계속 딜레이 되잖아요."


도현이 무언가를 실수한 것은 아니었다. 3주 동안 똑같이 해오던 방식이었고, 그 동안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똑같이 했을 때에 김동구가 넉살스러운 말투로 칭찬까지 했던 것들이었다. 오직 한 가지 변한 것은, 도현에 대한 김동구의 마음 속 자리 잡은 질투심. 그 감정은 투명하게 들여다보일 만큼 노골적이었지만, 도현은 모른 척했다. 그저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반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일주일만 참자라는 생각으로 도현은 자신의 일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외과에서의 4주간 인턴 생활도 끝이 났다.

마지막 날 아침, 평소처럼 수술실에 들어서자, 수술방 간호사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아유, 인턴쌤 텀체인지 된다면서요. 그나마 선생님 덕분에 수술방 분위기 괜찮았는데"


도현은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네 오늘까지 하고, 내일부터는 내과 인턴으로 가요."

"벌써요? 아쉽다. 이렇게 조용조용, 일 잘하는 인턴이 흔치 않은데."


옆에서 대화를 들은 마취과 간호사도 거들었다.

그 말들이 과장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괜히 마음이 찡했다.

혼자 참고, 혼자 이겨낸 줄로만 알았던 날들이 사실은 어딘가에서 이렇게 기억되고 있었다.

어쩐지 문시혁 교수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4주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훌륭한 서전이 되어서 뵙겠습니다'

어떤 인사를 하며 마무리를 할지 속으로 여러번 되뇌었다.


김동구 레지던트와 수술 준비를 하고 기다리는데, 문시혁 교수가 왠일로 바로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 왜 늦으시지?"

"아, 교수님 아침에 집에 일이 생기셔서 조금 늦으신댔어요"


수술방 간호사가 물어보자, 그제서야 김동구가 대답했다. 다들 약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말없이 기다렸다. 김동구 레지던트도 수술을 진행할 생각은 없어 보였기에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삼십분쯤 지났을까, 수술실 문이 열리며 문시혁 교수가 들어왔다.

문시혁 교수가 들어옴과 동시에 날아온 것은 4주간 들은것 중 가장 큰 호통.


"야! 김동구! 내가 너 인시젼 (incision;절개) 해보라고 했잖아!"

"아, 아.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은 수술실 상황을 보고 문시혁 교수의 화가 폭발해버렸다.


"이 멍청한 자식. 4년차나 되었으면서 인시젼도 못 하고 뭘 하겠다는거야?"

"..."

"너는 앞으로 어디 가서 외과의사라고 하지 마라"

"..."

"어휴, 답답한 새x. 어쩌다가 이런 놈이..."


계속되는 욕설에 김동구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도현은 그런 김동구가 조금은 안쓰러워 보였다. 이 정도로 욕설을 들을 정도인가 싶었고, 무엇보다도 어떤 이유로든 폭언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여느 때보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수술을 마쳤고, 교수가 나갔지만 김동구는 평소의 넉살을 부리긴 커녕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멍하니 조금 있다 수술방을 나가는 김동구의 눈에는 눈물이 살짝 맺혀있는 듯했다. 그렇게 문시혁 교수와 김동구와는 작별인사를 하지 못 한 채, 외과 인턴으로서 마지막 수술이 끝이 났다.


수술방을 정리한 뒤 휴게실로 들어간 도현은 김동구의 뒷모습을 보고 살짝 멈칫했다.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는 그 뒷모습이 평소보다도 움츠러들어 보였고, 너무 슬퍼보였다. 정수기에 물을 받으러 가면서 슬쩍 바라본 김동구의 핸드폰 바탕화면에는 아기의 사진이 있었다. 김동구는 한참이나 그 사진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짠해보였기 때문일까, 인간적으로 보였기 때문일까. 도현은 망설이다가 김동구를 살짝 두드렸다.


"저기, 선생님."

"아, 아. 인턴쌤."

"저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아, 그래요."


도현을 보고 흠칫 놀라는 김동구의 눈시울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특유의 더듬거리는 말투도 지금은 어쩐지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 커피 한 잔 하죠."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김동구를 따라 간 곳은 휴게실 옆의 식당. 그 곳에 있는 커피 자판기에서 내린 믹스커피를 한 잔을 도현에게 건넸다. 김동구는 자신의 커피도 하나 더 내리고, 도현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어색한 침묵 속에 마신 믹스 커피는 뜨겁고, 너무나 달았다.


"저기, 인턴쌤. 고생 많았어요"

"아닙니다."

"..."


김동구는 잠시 말없이 종이컵에 담긴 커피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꼭 적성에 맞는, 하고 싶은 과를 선택하세요"

"네?"

"선생님이라면 뭐든 잘 하겠지만, 잘 선택하길 바래요"


그렇게 김동구는 자신의 이야기를 짧게 들려줬다. 인턴을 마치고 대학병원 일이 너무 적성에 맞지 않아 군대를 갔고, 그 사이에 아내를 만나 딸아이가 태어났다고 했다. 군의관을 마친 후에 취업을 하려고 했으나 의과대학 자체도 4수를 하고 들어온 터라 나이가 많았고말주변이 없어 피부미용을 하는 병원에서는 거부당하거나 금방 잘렸다. 그렇게 찾은 곳이 당시 정원 미달이 되었던 일반외과였다고 한다. 아는 게 많이 없어서 윗년차나 교수님들에게 혼나기 일쑤였고, 남들보다 많은 나이에 레지던트 생활을 하려니 몸도 버티기 힘들었다고 했다. 적성에도 안 맞고, 힘겨웠지만 딸아이를 생각하며 지금까지 견뎌왔다는 것이다.


"아무튼 선생님. 4주 동안 고생했고, 나중에 또 병원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해요"

"네... 4주 동안 감사했습니다. 김동구 선생님"


도현은 처음으로 김동구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본 것 같았다. 그동안 수술방에서 보던 김동구가 어떤 마음가짐이었을지, 자신에게 가졌던 질투심이 어디서 나온 것일지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딸아이 사진을 바라보던 김동구의 눈빛이 자꾸 떠올라 마음 한 켠이 뭉쳐왔다. 도현은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마시지 않고 손에 들고만 있던 믹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조금 식어버린 그 커피에서는 단맛과 함께 지독한 쓴맛이 밀려왔다.

그렇게 도현은 인턴 첫 텀(term) 을 마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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