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직실 컴퓨터 앞에 엎드린 채로 잠들어 있던 도현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새벽 동안 콜 몇 개를 해결하고, 처방창과 씨름하느라 한 시간도 채 자지 못했다.
첫 당직은 무사히 지나갔지만, 아직 도현의 업무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병원 일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도현이 당직실을 나와 수술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몸이 무거웠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 눈꺼풀은 자꾸만 내려앉았고, 어깨 위엔 누가 올라탄 것처럼 짓눌렸다.
오전 7시 30분.
수술실 앞 전처치실. 수술을 앞둔 환자들이 침대에 누워 있었고, 마취과 간호사가 마지막으로 환자의 상태를 점검 중이었다.
도현은 외과 인턴으로서 마취과와 함께 환자를 수술방까지 모시고 가야 했기에 전처치실에 대기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자, 당직 중에는 볼 수 없었던 인턴 동기들이 쭉 서 있었다. 하나같이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긴장이 겹겹이 내려앉아 있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비슷한 하루를 보냈으리라.
도현은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를 바라보았다.
학생 때 수술방 실습을 돌면서 참관한 적은 있지만, 이제는 참관이 아닌 실전이었다. 인계 내용대로라면 환자를 옮기는 것 뿐 아니라 수술실 어시스트 (assist;보조)도 해야 했다.
본 적 없는 대장항문 수술에서 어떻게 어시스트를 할 수 있을지 온갖 상상을 해보는 도현이었다.
도현이 건네주는 메스를 받은 교수님이 멋지게 배를 가르고, ‘컷’ 소리에 맞춰 깔끔하게 봉합된 실을 자르는 도현. 그 환상적인 호흡에 수술이 지체없이 진행되고 능숙한 도현의 모습을 칭찬하는 그런 상상.
“GS (일반외과) 선생님?”
“아, 네.”
“이제 들어가면 됩니다“
그 사이 준비를 다 마친 마취과 간호사의 소리에 도현은 현실로 돌아왔다. 긴장이 조금 풀린 도현의 마음 속에는 이제 기대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침대의 고정을 풀자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환자가 실려있는 침대는 생각보다도 무거웠다. 사람의 무게가 손으로 느껴지자 다시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수술실 앞에 도착 후 버튼을 누르자 문이 옆으로 스르르 열렸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치고, 형광빛 수술등이 천장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수술실 특유의 냄새, 가볍게 소독약이 섞인 냉기가 피부를 감쌌다.
도현은 마취과 간호사와 함께 수술방 안으로 침대를 밀고 들어갔다. 수술침대 옆에 환자의 침대를 바짝 붙이고, 엉거주춤하게 환자와 침대를 동시에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
"선생님, 침대 고정해주셔야죠"
"아, 네네."
환자를 먼저 옮겨야 한다는 사실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도현의 몸은 아직 익숙치 못해 어딘지 어색하게 뚝딱거리고 있었다.
환자 침대를 고정하고, 환자를 수술침대로 옮겼다.
그 순간, '환자를 옮길 때 떨어지지 않게 꼭 잡으라' 는 인계 내용이 떠올랐다.
환자를 수술대 위로 옮기고 나서 도현은 서둘러 환자의 팔과 다리를 꽉 붙잡고 섰다.
갑작스레 자신을 붙잡는 모습에 환자도 놀랐지만, 더 놀란 것은 마취과 교수.
"인턴 선생님, 아직 마취 전이니까 안 잡아도 돼요. 침대 빼고 니 밴드 (knee band) 부터 좀 해주세요"
"아... 네, 죄송합니다"
도현은 머쓱하게 대답하며 손을 뗐다.
마취과 교수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눈빛은 싸늘했다. 할 일을 똑바로 하라는 눈빛.
자꾸 실수를 하고, 뚝딱거리는 자신의 모습에 도현은 얼굴이 화끈거리고 등에는 땀이 나기 시작했다.
환자의 침대를 다시 수술방 밖으로 옮기고, 환자를 니밴드로 고정한 뒤에는 한 걸음 물러서서 마취가 시작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산소 마스크가 환자의 얼굴을 덮고, 약이 투여되자 환자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기기 시작했다.
심박수가 안정되어 가며, 그에 맞게 일정한 기계음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 수술이 시작되는구나. 정신 차리자 이도현'
"수술 준비하셔도 됩니다"
마취과에서 마취가 끝났다고 신호를 보내고, 도현은 카트에서 소변줄을 꺼내 준비했다.
손을 소독하고 장갑을 끼며 자세를 잡는데, 마취과 교수가 옆에서 물었다.
"혹시 이 수술, 몇 시간쯤 걸려요?"
질문을 받은 도현은 멈칫했다.
"아... 제가 인턴이라서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음, 파트 레지던트는 어딨어요?"
"..."
도현이 대답을 하지 못 하자,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아요"라고 짧게 말했다.
수술방 안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도현이 소변줄까지 다 넣었고 마취과와 간호사들이 다들 수술 시작 준비를 마쳤지만, 외과 레지던트는 아직 오지 않았다.
수술을 진행하기 시작해야 할텐데, 인턴인 도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구한테 연락을 해봐야 하나...'
도현이 수술방 벽에 붙은 연락처를 보고 있는 순간, 수술실 문이 갑자기 열리며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덩치 큰 4년차 외과 레지던트가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인턴 이도현입니다. 마취과 교수님께서 수술 시간 여쭤보셨어요."
도현은 얼떨결에 인사를 하고, 마취과 쪽을 가리켰다.
"아, 네네!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네요. 두 시간 정도 걸릴 겁니다!"
레지던트는 마취과 교수에게 대답하며 넉살 좋게 사과 했다.
그리고 도현을 바라보며,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인턴쌤, 반가워요! 4년차 김동구에요. 잘 부탁해요."
순간, 도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성격 좋은 분이시네.'
하지만 그 인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자, 이제 수술 자세 잡아주세요."
김동구 레지던트는 도현에게 그렇게 말하곤, 뒤로 물러나 핸드폰을 꺼냈다.
도현은 당황했지만, 인계장에서 읽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그리고 전에 봤던 수술 자세 사진들을 기억해내며 환자의 자세를 맞춰가기 시작했다.
'팔은 고정하고, 다리 거는 기구를 달고... 다리는 어느 정도로 벌려야 되더라...'
뚝딱뚝딱.
설명만 듣고 사진만 봤을 뿐, 처음 해보는 작업이라 서툴렀고 사람의 다리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혼자서 들고 옮기기에는 벅찼다.
잠시 레지던트를 돌아봤지만, 여전히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는 김동구.
도현은 도움을 요청할까도 생각했지만, 관심없는 김동구의 모습에 포기하고 다시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간신히 마무리하고 나니, 온몸에 땀이 맺혔다.
김동구는 고개를 한 번 들어서 보고는 대충 확인했다.
"잘했어요. 손 씻고 들어와요."
그렇게 말하며, 먼저 수술실을 나갔다.
도현은 벌써 지쳐서 숨을 헐떡이며, 그 뒤를 따라나섰다.
배운 대로 손을 깨끗이 씻고, 수술복을 입는데 아직은 영 어색하기만 했다.
서툴지만 천천히, 멸균은 유지하면서 인턴이 된 후 첫 수술복을 입는 것에 성공했다.
그 뒤로는 손이 오염되지 않도록 팔짱을 낀 채, 방해되지 않게 수술실 안쪽 한켠에 섰다.
김동구 레지던트는 도현보다 훨씬 능숙한 손놀림으로 수술복을 입고, 수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서툴러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드랩 (drape;천막, 포)을 치고 석션 등 수술에 필요한 기구들을 놓는데, 버벅거리거나 자꾸 떨어뜨리는 모습.
'4년차인데... 원래 저런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준비가 되어 가자, 수술실 문이 조용히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그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말없이 한 사람이 들어왔을 뿐인데도, 수술방 안의 온도와 습도가 내려가는 듯 했다.
문시혁 교수.
뛰어난 실력으로 젊은 나이에 대장항문외과 과장의 위치까지 올라선 사람.
실력과 함께 무서운 성격으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마취과 간호사부터 수술 간호사, 그리고 김동구 레지던트까지 모두가 자세를 고쳐 서고, 눈빛이 달라졌다.
교수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컴퓨터로 환자 사진을 확인하고, 손을 씻고 들어왔다.
말을 하지 않아도 수술실 간호사들이 분주히 움직여 수술복을 입혀주고, 장갑을 건넸다.
기계처럼 반복되는 동작. 그 안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교수는 수술대 앞에 서자마자 한 번 수술 필드와 트레이를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김동구를 째려봤다.
고개를 들지 못 하고 침만 삼키고 있는 김동구.
말은 없었지만, 표정이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문시혁 교수가 한숨을 쉬고는 직접 기구들의 위치를 바꾸고, 드랩을 조정했다.
금세 훨씬 단정하고, 깔끔하게 서전 (surgeon;수술의) 이 편한 구조로 변한 모습에 도현은 감탄했다.
그리고-
"칼."
교수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간호사가 빠르게 칼을 건넸고, 교수는 곧바로 절개를 시작했다.
살이 갈라지고, 칼이 지나간 자리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자 도현은 수술이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아직은 수술방이 낯설고 무서웠지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중요한 건 오직 하나.
시키는 대로, 정확히, 실수 없이 수술을 따라가는 것.
교수의 칼이 지나간 자리는 정교했고, 핀셋과 보비 (전기소작기)가 교차하는 속도는 막힘이 없었다.
그 속에서 도현의 역할은 세컨드 어시스트.
교수님이 수술하는 필드가 잘 보이도록 리트랙터로 벌려주고, 고정하는 역할이었다.
단순해 보일지 몰라도,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되는 자리.
혹시라도 놓치거나 기구를 잘못 건드리면 수술이 어그러질 수도 있고, 환자에게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도현은 어느새 온 몸에 힘이 들어갔다.
리트랙터를 악력으로 틀어쥐고, 팔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인턴"
교수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
군기가 바짝 들어 있던 도현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네, 교수님!"
그 반응에 옆에 있던 김동구조차 살짝 놀란 눈치였다.
교수는 말없이 도현 쪽으로 손을 내밀더니,
도현의 손등 위에 가볍게 자신의 손을 얹었다.
"손에 힘, 빼도 돼. 긴장하지 마라"
긴장 속에 잠깐 동안 멈춰 있던 시간.
그 짧은 접촉이, 도현을 순간 얼어붙게 만들었다.
문시혁 교수의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고, 부드러웠다.
그 무표정하고 냉정해 보이던 사람이, 자신의 긴장 상태까지 느끼고 있었다는 것에 도현은 조금 놀랐다.
도현은 숨을 깊게 내쉬고, 팔에 들어간 힘을 조금 뺐다.
조금 전까지는 오로지 '실수하면 안 된다'라는 생각 뿐이었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수술을 다시 바라보니, 문시혁 교수의 손끝이 단순히 기술적으로 '정교하다'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세했다.
마치 환자를 소중하게 다루는 것처럼.
살을 가르는 그 손이, 이상하리만치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보였다.
'멋잇다.'
도현은 그 순간 그 모습이 멋있게 느껴졌다.
그렇게 수술은 일정한 리듬을 타며 계속됐다.
장기를 박리하고, 종양을 떼어내고, 출혈을 잡으며.
그렇게 언제부터인가 도현도 문시혁 교수의 손에 호흡을 맞춰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교수가 팔을 옆으로 움직이다 환자의 다리에 닿았다.
순간 교수는 '아이씨' 하는 소리를 내었고, 수술방 안은 얼어붙었다.
"김동구"
레지던트의 손이 멈췄다.
"4년차나 되었으면서, 수술 준비 하나 똑바로 못 하나?"
“…”
“…멍청한 자식”
갑작스런 폭언에 놀랐고, 잠깐 들었던 존경심도 사라져 버렸다.
수술방의 공기가 내려앉고, 누구도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
김동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고, 도현도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자세를 잘못 잡은 본인을 탓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억울하기도 했다.
상급자가 봐주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일텐데.
그렇지만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이후로는 정적 속에서 수술이 계속됐다.
마침내 마지막 실밥을 묶고 수술이 끝났고, 문시혁 교수가 수술복을 벗으며 물러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수술실 간호사의 말에 교수는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수술실을 나갔다.
수술방 문이 다시 닫힌 걸 확인하고 나서야 모두가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