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억, 허억. 여기 ABGA 할 환자가 몇 호죠?”
계단을 뛰어 올라온 탓에 숨을 헐떡이며 스테이션 간호사에게 물었다.
“아, 인턴쌤? 여기 스티커 붙여뒀어요”
도현은 뜻밖에 침착한 간호사를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며, 알콜솜과 주사기가 담긴 트레이를 들고 스티커에 적힌 병실로 향했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병실 커튼을 젖혔으나, 들려오는 건 보호자의 작은 비명소리였다.
“아우, 깜짝이야! 선생님, 말 좀 하고 열어요!”
“아, 아. 죄송합니다...”
침대 옆에 앉아 있던 여성 보호자가 소리치는 바람에 당황하며 도현은 다시 커튼을 쳤다.
급한 마음에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못한 도현이었다. 잠시 기다리니, 커튼을 열고 보호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세요?”
“김XX 환자분...?”
하지만 침대 위에는 이불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환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 남편은 잠깐 화장실 갔어요”
갑자기 들이닥친 인턴에게 놀란 보호자는 이제 진정이 된 듯했다.
‘엥...?’
도현이 상상한 상황과는 전혀 달랐다. 혼자서 화장실을 갔을 정도면, 환자는 멀쩡하다는 말이 아닐까.
'숨이 찬 게 아니었나...?'
잠시 뒤, 볼일을 본 환자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침대로 걸어오는 환자의 모습은 지극히 평온해 보였다.
도현은 스티커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65병동 3호실 3번. 분명 이 환자가 맞을 터였다.
"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김XX요”
환자의 이름도 스티커에 적혀 있는 것과 일치했다.
"혹시 숨이 차거나 그러진 않으세요?"
"아, 아까는 가슴이 좀 답답했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도현은 혹시 간호사가 잘못된 환자 스티커를 준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음, 그래요? 잠시만요“
다른 환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지고 식은땀이 났다.
다시 스테이션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옆 침상에서 다른 환자를 보고 있던 간호사가 커튼을 걷고 들어왔다.
옆 환자의 수액을 갈아주면서도 귀를 열고 대화를 듣고 있던 김미애 간호사.
그녀는 도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했다.
"아이고, 김XX 님. 아까 숨 차고 답답하다고 하셔서 주치의 선생님이 피 검사 좀 해보자고 하셨거든요~"
간호사는 능청맞게 환자분에게 설명하며, 침대에 눕도록 했다.
그제야 환자도 침대에 누우며 팔을 걷었다.
"인턴 선생님이 손목에서 피 좀 뽑아 가실 거예요."
"아, 네네. 피 검사 좀 할게요.“
도현은 속으로 김미애 간호사에게 절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마치 알에서 갓 나온 새가 어미새를 바라보듯.
3월 1일.
인턴은 곧 새가 되어 날아가겠지만, 이제 막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왔을 뿐이다.
병동 경력 5년 차인 김미애 간호사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말 없이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커튼을 치고 나갔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시작하게 된 ABGA.
도현은 배운 대로 알코올 소독액으로 손을 닦으며, 술기 과정을 다시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환자의 동맥을 느끼기 위해 손목을 눌러보지만,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었다.
아무리 자리를 바꿔가며 눌러봐도 맥박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현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분명 여기가 맞는데...’
도현이 연습했던 실습용 기계는 이미 바늘자국이 수업이 나 있어서,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동맥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인턴 시작 전 서로 연습 삼아 주사를 찔러본 동기는 젊고 마른 남자. 그에 반해 체격이 있는 김xx 환자의 동맥은 보다 깊숙한 곳에 숨어 있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도현은 애먼 환자의 손목만 꾹꾹 눌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환자와 보호자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뭐가 잘못됐나요? 제가 뚱뚱해서 이상한가요?’
슬쩍 본 환자와 보호자의 표정은 도현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도현은 애써 시선을 피했지만, 그 눈빛이 자꾸만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당신이 의사는 맞나요? 이걸 해본 적은 있나요? 지금 나한테 실험하는 건가요?’
도현의 속으로만 울려 퍼지는 목소리들에, 손끝은 더 떨리고 있었다.
술기를 하는 의사보다 받는 환자가 더 불안하고 무서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의사가 더 떨어서는 안 될 일.
도현은 마음을 다잡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다시 집중했다.
마침내,
손끝에서 아주 희미한 맥박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조금 따끔합니다.”
“으윽-”
알코올 솜으로 소독하고 주사기를 찌르자, 환자가 움찔했다.
도현도 그 고통을 알고 있었다. 동기끼리 서로 연습하며 느낀 고통.
‘금방 끝내드릴게요. 죄송해요’
하지만, 패기와는 다르게 피가 나오긴커녕 아무 반응 없는 주사기.
도현은 배운 대로 주사 바늘의 위치를 살짝 옮겨 보았다.
다시 무반응.
한 번 더 주사 바늘의 위치를 옮기자,
“아! 아픈데요”
“이제 거의 다 됐습니다.”
이번에는 환자가 놀라서 살짝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도현의 입에서 저절로 나온 말. 어쩐지 명절에 ‘이제 거의 다 도착했다’라고 하시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제발, 제발...’
다시 왼손으로 맥박을 느끼며, 동맥이 있을 만한 곳으로 주사 바늘을 옮긴 순간,
서서히 주사기 안에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됐다... 진짜... 됐다.’
도현은 속으로 만세를 외쳤고, 온몸의 긴장이 순간 풀려버렸다.
단지 주사기 하나에 맺힌 피이지만, 지금은 뭔가 세상을 이긴 기분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피가 느리게 나왔지만, 도현은 첫 ABGA를 성공했다는 것이 기뻤다. 그와 동시에 묘하게 자신감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기 5분 동안 꾹 누르고 계세요.”
도현은 마지막 지혈까지 놓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인턴으로서의 첫 술기였다고 생각하며, 김미애 간호사에게 채혈한 ABGA 주사기를 갖다주었다.
“음, 하하... 수고하셨어요.”
간호사의 묘한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현은 지금은 몰랐다. 의사로서의 첫 술기를 성공적으로 마친 것에 만족할 뿐.
도현은 환자를 한번 대하고 나자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11시 36분...’
85병동으로 돌아와 이제 막 환자 세 명의 루틴 잡을 해결했을 뿐인데, 어느새 점심시간.
병동에는 환자들에게 배식하는 밥차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시간에 환자들에게 드레싱을 하러 가도, 돌아오는 건 한결같은 말.
“밥 먹는 중인데,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두 번 연속으로 병실에서 퇴짜를 맞고 갈 길을 잃은 도현은 병동 복도에 멍하니 서서 환자 명단만을 뒤적였다.
동선은 이미 꼬일 대로 꼬여버린 상태. 밥이라도 먹을까 했지만, 하루 종일 긴장한 탓인지 입맛은커녕 속만 쓰렸다.
띠리리-
“네, 인턴 이도현입니다”
“선생님! 111병동인데, 엘튜브 언제 넣어줄거에요? 환자 밥을 못 주고 있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날카로운 간호사의 목소리가 도현의 귀를 때렸다.
“아, 지금 거의 다 왔어요”
깜빡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기에,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버렸다. 도현이 있는 별관과 111병동이 있는 본관과의 거리는 10분 남짓. 뛰는 듯 걷는 듯, 빠른 걸음으로 도현은 길을 나섰다.
헐레벌떡 병동에 도착한 도현을 보자마자 간호사가 쏘아붙였다.
“아유, 선생님. 보호자가 아침부터 계속 스테이션에 와서 컴플레인 했어요”
“...죄송합니다”
준비된 기구를 챙겨 들고 환자에게 가자, 옆에서 보호자가 매섭게 째려보고 있었다.
“아이고, 늦어서 죄송해요. 얼른 해드릴게요”
최대한 능청을 떨어 보았지만,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환자는 물론 보호자도 팔짱을 낀 채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무거운 공기 속에서, 도현은 엘튜브를 열심히 넣었다.
그 뒤로는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도현은 알 수 없었다.
본관과 별관을 왔다갔다 하며 종아리는 터질 것 같았고, 콜폰은 쉼없이 울렸다.
콜폰의 내용은 주로 늦어지는 술기들의 독촉 전화들.
손에 익지 않은 술기들을 하나씩 할 때마다 도현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고, 어느새 가운 안 근무복은 땀으로 흠뻑 젖어버렸다.
손목의 스마트워치에는 ‘1만 걸음 달성!’이라는 문구가 눈치 없이 반짝였다. 축하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었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최대한 웃는 표정으로 친절하게 대하려고 하였지만, 점점 지쳐가며 전화를 받는 도현의 목소리도 날카로워져만 갔다.
띠리리-
오늘만 수십 번째 보는 번호. 85병동이었다.
별관에서 다시 85병동 쪽으로 가고 있던 도현은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아, 지금 가고 있어요”
“...”
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이어졌다.
‘아차, 실수했다’
정신이 들어 사과하려는 순간,
의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하, 도현아. 나 우진이야.”
“어, 우진?”
삼수를 한 도현과 나이가 같지만, 먼저 외과 레지던트가 된 백우진.
의과대학 시절 선후배 사이지만 나이가 같아서 친하게 지냈었다.
“외과 인턴 이름에 네 이름이 있어서 병동 전화로 전화해 봤어. 많이 힘들지?”
힘드냐는 말을 들어서일까, 12시간 만에 잠시 숨을 돌리게 되어서일까. 어쩐지 도현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응, 정신이 없네”
도현은 짧게 대답했지만, 목 끝이 살짝 떨렸다.
“하하, 원래 첫날이 제일 힘들어. 그래도 잘 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우진은 학교 다닐 때도 이런 친구였다. 따뜻하고 정이 많은 친구. 이런 우진이 험하고 힘든 외과 레지던트를
한다고 할 때는 놀라기도 했고, 따뜻함 속에 확고한 신념을 가진 모습이 멋져 보였다.
“회의실 컨퍼런스 준비는 오늘 내가 했으니까 걱정 말고, 다음주부터 챙겨줘~”
“아”
도현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 오늘 인턴 업무 중 하나. 회의실에서 컴퓨터를 켜두고 컨퍼런스 준비를 해두는 것.
“고마워...”
“오늘 밥도 못 먹었지? 병동에 커피 사놨으니까, 나중에 와서 먹고”
그렇게 끊은 전화기를 도현은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어느덧 시간은 저녁 7시 40분.
그러고 보니, 밥은커녕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그것을 인지하자 배고픔이 밀려오고 입술이 바짝 마른 것이 느껴졌다.
도현은 오늘 하루, 누군가에게 쫓기듯 앞만 보고 달렸온 기분이었다. 우진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정신이 들었고, 그제야 돌아본 곳에는 아무도 쫓아오고 있지 않았다.
도현은 다시 남아 있는 일들을 정리해 보았다.
드레싱 세 개만 하면 오늘 일은 얼추 정리가 되는 상황. 동선을 정하고 차근히 하나씩 드레싱을 해결해 나갔다.
마지막으로 85병동에 다시 돌아온 도현은 스테이션 책상에 놓여 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보았다.
우진이 두고 간 커피.
도현은 잠시 의자에 털썩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얼음이 반쯤 녹아버린 커피는 너무 차갑지도, 그렇다고 미지근하지도 않았다. 커피가 도현의 입술을 타고, 목구멍을 넘어 배 안으로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배 안에서 다시 온몸으로, 도현의 부족한 수분을 채우듯이 세포 하나하나로 퍼져 나가는 듯했다.
10칼로리도 안 되는 아메리카노가 이렇게 달고, 청량할 줄이야.
도현은 생각했다.
인생에서 이렇게 맛있는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다.
아직 인턴 첫날은 끝나지 않았지만,
그렇게, 도현은 의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