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새벽 6시.
정규 출근 시간인 7시보다 한 시간 이른 시간. 도현은 인턴 당직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한 손에 쥔 인계장은 이미 모서리가 헤어지고, 종이도 손때로 구겨져 있었다.
‘7시에 85병동 스테이션 뒤에 루틴잡 종이를 확인하고, 드레싱을 하고, 점심 지나면 회의실에 컴퓨터를 켜고...’
전날 두 시간 동안 전임자에게 인계받은 내용, 그리고 인계장에 형광펜으로 줄 그어둔 내용을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그런데도 마음속은 잔잔해지기는커녕, 물결이 끊임없이 넘실거리며 요동치고 있었다.
컴퓨터에 켜둔 EMR (Electronic Medical Record ; 전자의무기록).
도현은 EMR 화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화면을 아무리 봐도, 어제 전임자가 보여준 것과는 다르다.
‘분명 처방창이 여기쯤 있었는데...’
손끝이 점점 차가워지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빰바밤-
그 순간 경쾌한 핸드폰 알람 소리에 정신을 차린 도현은 황급히 알람을 껐다.
6시 50분.
이제는 병동으로 향할 시간이다.
처방 내는 법을 연습하려고 한 시간이나 일찍 온 것이었는데, 결국 처방창을 찾다가 시간을 다 허비해 버렸다.
“으으음...”
알람 소리에 잠이 깼는지, 옆에 있던 2층 침대 위에서 사람이 뒤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전날 당직을 선 인턴.
아니 이제 3월 1일이 되었으니, 레지던트가 된, 전(前) 인턴이다.
그 모습이 어째서인지 도현을 현실로 끌어당겼다.
‘후우’
도현은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가운을 입었다.
가운 가슴 한켠에 새겨진 ‘이도현’. 그 앞에 붙은 ‘의사’라는 두 글자.
파란색 근무복에 흰 가운. 전형적인 인턴의 복장이다.
도현이 어려서부터 꿈꿔오던 모습 그대로인데, 막상 지금은 두렵기만 했다.
‘괜찮아. 할 수 있다.’
도현은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이며 병동으로 향했다.
8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7시 1분.
첫날이라 서둘렀지만, 엘리베이터는 생각보다 느렸다.
‘하, 첫날부터 지각이라니’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한 도현의 마음도 모르고 층마다 멈추는 야속한 엘리베이터가 야속하기만 하다.
띠리리-
7시 2분, 근무가 시작하고 2분만에 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의사가 된 이후, 첫 콜이다.
도현은 목소리에 긴장감이 묻어나지 않도록, 목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네, 외과 인턴 이도현입니다”
“선생님, 여기 111 병동인데요. 엘튜브 (L-tube) 셀프 리무벌 하신 분이 있어서 다시 넣어주세요”
‘셀프...? 혼자 뺐다는 건가?’
“아, 네 알겠습...”
“스테이션에 준비해 둘게요”
뚝-
눈 깜짝할 사이에 전화가 끊겼다.
도현은 뚝 끊어진 전화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얼른 수첩을 꺼냈다.
[엘 튜브, 111 병동]
그런데...
‘잠깐, 111이 아니고 112였나?’
긴장해서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분명 111로 들은 것 같은데, 왠지 112 같기도 하고. 콜폰을 아무리 뒤져봐도, 녹음 따윈 없었다.
‘하, 일단 111, 112 병동 둘 다 가서 물어보자. 다음에는 끊기 전에 물어봐야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침 루틴잡을 하기 위해 다시 85병동으로 가는 길. 스마트폰으로는 ‘엘튜브 삽입’ 유X브를 검색하면서 걸었다.
의사 국가고시 실기시험에서는 포함되지 않았던 술기. 인계장에는 ‘젤을 잘 바르고 열심히 넣으시면 됩니다’ 라는 한 줄짜리 설명뿐이었다.
‘손을 씻고, 젤을 바르고, 환자에게 침을 삼키라고 하면서 천천히 밀어 넣는다’
5분 6초짜리 유X브 동영상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남자는 55~65cm... 어? 아까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못 들었는데...’
수첩을 뒤져보고,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봐도 그런 얘기는 없었다.
동영상에서 마지막에 튜브가 잘 삽입되었는지 청진기로 확인하라고 하는데, 무슨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전임자에게 인계 받을 때에도 엘튜브를 넣을 환자가 없어서 넣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완벽하게 하고 싶었는데, 허술함 투성이였다.
도현은 첫날부터 꼼꼼하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했다.
시간이 지난 뒤에 되돌아보면, 그런 것쯤은 병동에서 확인하며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환자에게 술기를 하면서 확인하거나 병동에 물어보면 충분한 것들이고, 술기를 하는 데에도 그렇게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의 도현은 뭐가 중한지 모르는 3월 1일의 인턴.
온갖 걱정과 함께 스테이션에 도착하니 간호사들이 컴퓨터마다 짝지어 앉아 정신없이 업무 인계를 하고 있었다.
도현이 상상했던 ‘살갑게 인사하고 웃으며 안부를 묻는 첫날’ 같은 장면은 어디에도 없었다.‘
도현은 혼자 조용히 오늘의 루틴잡이 적힌 종이가 있는 스테이션 뒤편으로 갔다. 집어든 그 종이 안에는 외계어들이 가득했다.
p-care, foley insertion, simple dx, PCD irrigation ( / ) ...
그나마 눈에 익은 단어는 foley (foley catheter;소변줄) 하나뿐.었다.
‘아니, 이런 약어들이 있다는 얘기는 안 했잖아...’
도현은 전날 인계해 준 전임자가 괜히 원망스러웠다.
‘하루면 충분하다’ 고 하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이삼일에 걸쳐서 인계받고 싶었는데, 계속 하루면 충분하다고 했었다. 그렇게 겨우 만나 받은 인계 사항들도 이미 도현이 수십 번 읽어본 인계장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냐, 이미 지나간 일에 얽매이지 말자.’
지금 주어진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전임자도 미안해하며 최대한 많은 내용을 알려주려고 했었다. 두 시간 만에 콜을 받고 일을 하러 떠나버렸지만.
도현은 우선은 눈앞의 암호부터 해독하기로 하고, 네X버에 약어들을 하나하나 검색하기 시작했다.
‘dx은 드레싱 (dressing), p-care 는 회음부간호 (perineal care)...’
의학용어 정리라고 쓰여진 블로그에 들어가니, 약어들에 대한 해석이 있었다. 블로그의 제목은 ‘나의 신규간호사일지’.
천천히 목록과 대조하며, 약어들을 해석하며 드레싱 물품들을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전임자가 몇 호부터 돌면 효율적인 동선이라고 했는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1호부터 차근히 돌자...’
85병동 1호.
첫 업무는 foley insertion.
드레싱 카트 위의 포장된 소변줄에는 ‘85 : 01 : 이XX’ 라고 환자 정보가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다행히 자신 있는 술기였다.
실기시험을 준비할 때부터 가장 빠르고 완벽하게 수행했던 술기. 실기 시험 당일에도 마침 문제로 출제되어 만점을 받은 항목이었다.
술기 과정을 속으로 되새기며 필요한 물품들을 챙기는 순간,
띠리리-
다시 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네, 외과 인턴 이도현입니다”
“선생님, 65 병동 간호사 김미나입니다. 지금 ABGA 처방 난 환자가 있어서, ABGA 좀 부탁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ABGA. 인턴 업무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동맥혈 채혈.
환자의 동맥혈을 뽑아 산소 분압, 이산화탄소, 산-염기 상태 등을 빠르게 확인할 수 있는 검사이다.
환자 상태가 안 좋을 때 가장 먼저 확인하기도 하는 검사였다.
‘ABGA가 필요한 거면, 환자가 안 좋은 상황 아닌가?’
도현은 실기 시험 때 공부했던 내용들을 다시 생각하며, 65병동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를 탈 시간도 없어 계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