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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 인턴, 첫 스크럽 - 2

by 구름돌

"인턴 선생님"

"네"


문시혁 교수가 나가고 숨을 돌린 것도 잠시, 김동구가 수술실 밖으로 도현을 불렀다.


"환자 포지션 잡는거, 인계 안 받았어요?"

"아뇨, 받았는데... 아직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모르면 물어봤어야지"

"..."


물어볼 분위기나 되었던가.

도현은 억울함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무언가를 말한다 한들 김동구에겐 들리지 않을 것 같아 꾹 참았다.


"죄송합니다..."

"포지션 잘못 잡으면, 수술 중에 큰일 날 수도 있어요. 다음부턴 똑바로 해요"

"네..."


그러곤 김동구는 휴게실로 가버렸다.

도현은 말없이 가만히 서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수술실로 들어왔다. 방금 있었던 일이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하고 싶었지만 우선은 할 일을 끝내야했다. 수술실의 나머지 도구를 정리하고, 환자를 깨울 준비를 했다.

보통 한 명이 정리를 하면, 다른 한 명은 침대를 끌고 들어와 환자를 옮길 수 있도록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도와주는 이가 없었기에 도현은 혼자 해야했다.


"하아..."


몸도 마음도 힘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혼자 거친 사막에 내던져진 기분.


"인턴 선생님, 천천히 하셔도 돼요"

"아유, 김동구 선생님은 도와주지도 않고 어디 간거람"


수술방에 혼자 남겨진 인턴이 안쓰러웠는지, 혹은 도현이 내쉰 한숨이 너무 컸는지 수술실 안에 있던 마취과 교수와 수술방 간호사가 한마디씩 거들며 도현을 위로했다.


“하하… 감사합니다”

“인턴 쌤, 그래도 교수님이 관심 가지신거. 선생님이 잘 해서 그래요~“


연륜 있어 보이는 수술방 간호사의 말 한마디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위로하기 위해 괜히 하는 말인 것을 알면서도, 도현은 어쩐지 울컥했다.


“에이… 많이 부족하죠”

“첫 날에 이렇게까지 하는 인턴 쌤은 못 봤다니깐~ 잘 하고 있어요“


도현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스크 너머로 보인 간호사의 눈웃음이 어쩐지 마음을 건드렸다.


‘그래, 괜히 기죽지 말자’


도현은 우울감을 떨쳐내며 자신을 북돋았다.

억울함과 자책감에 파묻혀 늪으로 빠지기보단, 그 수렁을 헤쳐나오는 도현이었다.

도현은 다음 수술까지 잠깐 비는 시간 동안 다시 인계장을 읽어보고, 수술 자세를 검색해보며 이번에는 보란듯이 해내리라고 다짐했다.

다음 수술에서도 역시 김동구 레지던트는 별다른 도움 없이 뒷짐만 지고 있었지만, 도현은 더 이상 그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행히 두번째 수술은 큰 문제 없이 끝이 났다.

앞의 수술과 비슷한 수술이기에 도현은 조금 더 익숙하게 수술 준비를 하고, 어시스트를 할 수 있었다.

문시혁 교수도 수술이 끝나자 아무런 말 없이 수술복을 벗고 나갔다.

말이 없다는 건, 적어도 크게 틀리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도현은 그제서야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안도의 한숨.


꼬르륵-


안도의 한숨은 아무도 듣지 못 했을 것이다. 도현의 배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모든 소리를 덮어버릴 정도로 크게 났다.

혹시나 누가 들었을까 싶어 얼굴이 빨개졌으나, 다행히 들은 사람은 없는 듯했다.

수술과 수술 사이에 밥을 먹었어야 했는데, 여유가 없던 도현은 미처 식사를 할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수술방을 정리하고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어느덧 출근한지 33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33시간 동안 먹은 것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뿐이었다.


'그래도 이제 퇴근까지 4시간밖에 안 남았다'


병원에서 33시간 동안 있었다는 것보다도, 이제 겨우 4시간만 버티면 된다는 사실이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집에 가면 시원한 맥주 한 캔에 치킨을 뜯어 먹으리라 다짐하는 도현.

입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외과 수술 단톡방'에 수술이 끝나고 나왔다는 사실을 올리자 2년차 이승진 레지던트에게 전화가 왔다.


"네, 인턴 이도현입니다"

"인턴 선생님. 지금 7번방에서 나온거죠? 그럼 5번방으로 바로 좀 가주세요"

"5번방이요. 네 바로 가겠습니다"


5번방에서 진행 예정인 수술은 응급으로 시행되는 ’내시경을 이용한 충수돌기 절제술‘.

그러나 도현이 환자를 입실시키고, 마취가 끝날 때까지도 아무 레지던트도 오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데…’


도현은 다시 이승진 레지던트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인턴 이도현입니다. 5번방 인덕션 (induction; 진정 유도) 끝났는데 아무도 안 오셔서요”

“네? 김동구 선생님 안 왔어요?“

“네…”

“입실했다고 교수님 노티는…하…“

“아, 제가 전화드릴까요?”

”아뇨. 선생님은 김동구 선생님 전화해보고, 교수님 노티는 제가 드릴게요“


또 김동구였다.

이승진 레지던트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김동구에 대한 태도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이 갔다. 아직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도현은 김동구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김동구가 전화를 받자, 주변에서는 자동차 소리가 났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인턴 이도현입니다. 5번방 들어오셔야 한다고 들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네? 거기 어차피 김수호 교수님이 다 하실거에요“

“어… 그럼 어시스트는요?”

“아, 제가 일이 있어서 좀 나와서… 인턴쌤 부탁해요”


황당한 말과 함께 김동구는 전화를 끊었다.

외과 레지던트가 수술 말고 무슨 일이 있다는 말인가.

도현은 스트레스가 밀려왔다.


‘일단 드랩이라도 쳐놓자’


우선 더 지체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아까 본 대로 해둬야겠다 싶어 손을 씻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도현이 진땀을 흘리고 있는 사이 김수호 교수가 들어오며 냅다 소리쳤다.


"아직도 준비 다 안 해놨어?"

"아, 죄송합니다 교수님. 제가..."

"됐고, 빨리 준비하자. 가운부터 줘요"


수술방으로 들어오는 발걸음과 말투만으로도 얼마나 성격이 급하고 불같은지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수술 준비가 완료되었고, 김수호 교수는 환자 복부에 구멍을 낸 뒤 내시경과 수술 기구들을 집어넣었다.

눈 앞에서 펼쳐지는 난리통을 따라가지 못 하고 멍하니 있던 도현은 김수호 교수의 호통에 정신을 차렸다.


"뭐해! 이거 잡아"


김수호 교수는 오른손에는 수술 기구, 왼손으로는 내시경을 쥐고 도현 쪽으로 내밀고 있었다.

도현은 얼떨결에 내시경을 받아들고 화면을 보았으나 도현에게 보이는 것은 그저 빨갛고 노란 조직들일 뿐.

예쁘게 색칠되어 있고 친절하게 이름까지 써둔 해부학 교과서만 알고 있던 도현에게,

지금 눈앞의 화면은 마치 물감을 흘려놓은 미술 시간의 실수작 같았다.

붉고 노랗고 미끈거리는 것들이 서로 얽혀서, 어디가 장이고 어디가 혈관인지, 아무것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스콥 (scope;내시경) 하나 제대로 못 잡아?! 내가 보려는 곳을 보여줘야지"

"죄, 죄송합니다"


또다시 김수호 교수의 호통이 날아들었다.

도현은 최대한 흔들리지 않게 내시경 카메라를 고정하려 했지만,

팔은 점점 떨려오고 눈은 멀미가 날 것처럼 핑 돌기 시작했다.

내시경 화면은 살짝만 움직여도 요동쳤고, 그 속의 장이며 혈관들은 방향감각을 시험하듯 뒤섞였다.


"너 몇 년 차야?"

"... 인턴입니다."


도현은 '분명 또 혼나겠지'라는 생각을 했으나, 정적만이 흘렀다.

인턴이라는 말에 김수호 교수도 조금 놀란 듯했다.


"인턴이야?"

"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교수의 말투가 바뀌었다.


"...그래. 카메라는 이렇게. 여기서 기울이면 화면이 돌아가니까, 이렇게만 돌리고. 이건 초점 맞추는거"


조금 전과는 다른, 낮고 차분한 목소리.

김수호 교수는 내시경 카메라를 한 손으로 직접 잡고 천천히 설명해주면서 수술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하나 따라했다.

아직은 서툴렀지만, 아까처럼 화면이 요동치지는 않았고 교수는 별다른 말 없이 수술을 이어갔다.


결국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김수호 교수가 나간 뒤, 도현은 마취에서 깨어난 환자를 옮기고 수술방 정리를 한 뒤에야 수술방을 나갈 수 있었다.

탈의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천근만근. 온몸은 천으로 감싼 돌덩이처럼 무겁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문득 시계를 보니 오후 8시.

퇴근시간을 한 시간이나 넘긴 시간이었다.


탈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안에 김수호 교수가 앉아 있었다.

교수와 눈을 마주친 도현은 순간 걸음을 멈췄다.


"아, 환자분은 잘 깨셨습니다."

"그래요."


도현의 눈에 들어온 것은 교수의 한 손에 들려 있던 보라색 음료수.


"2년차한테 상황은 들었어요. 화내서 미안해요. 오늘 고생했겠네."


김수호 교수는 어딘가 어색한 말투로 도현에게 음료수를 건넸다.


"그... 요즘 애들이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이거 사왔는데. 단 거라도 먹고 힘내라고"


도현은 놀란 얼굴로 두 손으로 음료수를 받아들었다.

보라색 스무디는 살짝 녹아있었지만, 매우 차가웠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교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말없이 나갔다.

닫힌 탈의실 문을 바라보다, 도현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음료수를 한 모금 빨아마시자 텁텁하고 차가운 단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블루베리 스무디... 고등학교 때 많이 마셨었는데.'


언제부턴가 당연히 커피만 마시면서, 스스로 어른이 된 줄 알았다.

단맛은 어린애들이 먹는 음료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단맛이 참 위로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금... 아직도 블루베리 스무디가 어울리는 새내기일지도 모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른이 된 줄 알았지만,

병원이라는 세계 안에서는 여전히 어린 신입생에 불과했다.

그렇게 단 한 모금의 스무디가,

도현의 오늘 하루를 조금 덜 쓰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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