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환의 눈 앞에는 바삭한 후라이드 치킨이 황금빛을 뿜으며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김이 나고 기름이 뚝뚝 흐르는 다리를 한 손으로 집어 베어 불려는 찰나, 알람 소리에 정환은 눈을 떴다.
심장내과 인턴 배정환의 하루는 새벽부터 시작된다. 환자 열댓 명의 심전도(ECG) 를 찍는 것이 첫 번째 일과. 교수님들의 회진 전에 ECG 를 모두 마쳐야 했기에, 다른 내과 인턴들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해야 했다. 정환은 손이 느렸기에 한 시간이나 이른 시간인 6시부터 일을 시작했다.
정환은 오늘도 똑같이, 정신없이 심전도 기계를 덜덜 끌고 다니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정환의 바램은 단 하나,
'오늘은... 제발 치킨을 먹자'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지만, 정환은 늘 다른 인턴들보다 퇴근이 늦었다. 퇴근 후에는 너무 지쳐서 간단히 허기만 채우고 금새 잠이 들어 버렸다. 하지만 내과 인턴을 시작하고 일주일이 지난 시점, 이제는 조금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오늘은 정말로 제시간에 퇴근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꿈에도 나온 치킨. 그것을 꼭 먹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는 정환이었다.
그 순간, 콜폰이 울렸다.
"네,네. 인턴입니다"
"선생님, 52호 환자 ABGA 지금 바로 좀 해주세요."
시간은 벌서 7시 20분. 교수님들이 회진을 돌기 시작하기까지 10분밖에 남지 않았고, 아직 ECG 는 세 명이 더 남았다. 그 뒤에는 MRI sedation (진정 MRI) 가 예정되어 있었다.
'하, 이걸 어떡하지...'
정환은 잠깐 고민하다가 인턴 단톡방에 메시지를 올렸다.
[배정환] 혹시 ABGA 좀 도와주실 수 있는 분 계실까요...? 제가 일이 겹쳐 버려서요ㅠㅠ
메시지를 전송한 후, 정환은 괜히 민망해졌다. 단톡방을 조금 위로 올리자, 최근 몇일간 자신이 보낸 도움 요청 메시지들이 보였다. 간혹 도움을 요청하는 다른 인턴들도 있었지만, 압도적으로 정환의 비중이 높았다. 메시지를 읽지 않은 사람의 숫자는 빠르게 줄어 들었지만, 기대와는 달리 아무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다들 바쁠 시간이지...'
우선 ECG 라도 얼른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정환은 거의 뛰다시피 심전도 기계를 밀고 다녔다. 그렇게 마지막 환자의 ECG 까지 마치고 핸드폰을 확인하자 시간은 7시 29분. 야속하게도 단톡방에 답장은 아직도 없었다. 콜폰으로는 MRI 방에서 독촉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정환이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 그 순간, 알림음과 함께 짧게 올라온 답장 하나.
[차슬기] ㅇ
역시 또 차슬기였다.
인턴 동기인 차슬기는 일처리가 빨라서인지 다른 사람들의 일을 종종 도와주곤 했다. 물론 대부분은 정환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다만, 평소 말수도 적고 짧은 메시지처럼 무뚝뚝하고 차가운 성격 탓에, 제대로 말을 뭍여본 적은 없었다.
[배정환] 너무너무 고마워요!! :) 꼭 제가 보답할게요!
고마운 마음에 차슬기에게 이모티콘과 함께 감사 인사를 보냈으나 역시나 답장은 없었다. 혹시 단톡방이라서 답장을 못 하나 싶어 차슬기에게 개인 메시지도 보내 두었다. MRI 방에서 진정 약물을 투약하고, 검사가 끝날 때까지 상주해야 하는 한 시간. 틈틈이 핸드폰을 확인했으나 메세지 옆이 1이라는 숫자만 사라졌을 뿐.
'나중에 마주쳤을 때 커피라도 한 잔 사야겠다'
밀려오는 씁쓸한 마음을 삼키며 언젠가는 꼭 보답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오늘 중요한 정시 퇴근을 향한 길이 아직 많이 남았기에, MRI 방에서 빠져나오며 남은 일들을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점심도 먹지 못 하고, 제대로 앉지도 못 한 채 하루종일 병동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으나 어느덧 시간은 저녁 5시를 향하고 있었다. 근무복과 가운은 땀으로 흠뻑 젖어버린 채였다.
정환은 컴퓨터 앞에 털썩 주저 앉으며 EMR 에 잔뜩 쌓여있는 처방메모와 기록지들을 확인했다.
'빨리 하면 2시간... 아니, 3시간...'
이제 정환이 꿈에 그리던 치킨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황금빛 다리와 바삭한 껍질, 청량한 기포가 올라오는 맥주가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정환은 처방들을 정리하며 한 손으로는 가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고 배달 앱을 켰다. BXQ, 굽X... 수많은 치킨 업체들을 돌려보며 고민이 더욱 커져갔다.
간만에 먹는 치킨이라 더욱 신중해지는 정환. 간장 반, 후라이드 반 한 마리를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다시 컴퓨터 화면에 집중했다.
'이제 거의 다 했다'
거의 마무리가 되어 치킨을 결제하려는 순간,
띠-- 띠-- 띠--
머리 위에서 울려 퍼지는 익숙한 안내음. 정환은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별관 6층, 615호. 종양내과. 성인 코드 블루]
* * *
오전 6시 30분. 차슬기는 굽이 없는 검정 구두와 셔츠, 슬렉스 바지를 차려 입은 채 종양내과 병동에서 환자 명단을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종양내과 한유라 교수의 회진을 따라가기 위해, 이미 새벽에 루틴잡도 다 끝낸 상태였다. 회진을 따라가는 것이 원래 인턴잡이 아니지만 차슬기는 종양내과가 하고 싶어 인턴도 자원한 만큼, 교수님께 직접 부탁해 회진도 따라다니고 있었다.
"32호 환자분. NSCLC (비소세포폐암) 로 오늘 항암 예정인 분입니다"
교수님 앞에서 가이딩 하는 레지던트 뒤를 바짝 따라 붙으며, 교수와 레지던트가 하는 말들을 모두 받아적는 차슬기. 중요한 말이든 아니든, 그들이 하는 말 한 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커피 한 잔 하지. 인턴도 시간 괜찮지?"
"네. 괜찮습니다."
콜폰을 슬쩍 봤으나, 아직 차슬기에게 걸려온 콜은 없었다. 잠시라도 여유가 생기면 틈틈이 쉬어둬야 하는 것이 인턴이지만, 교수님과 커피 한 잔 하는 시간이 오히려 본인에게 더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차슬기였다. 전날 당직을 서서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순간에도 눈꺼풀이 조금씩 내려갔지만, 한유라 교수가 레지던트와 함께 쓰는 논문에 대해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그때, 차슬기의 핸드폰이 울렸다.
[배정환] 혹시 ABGA 좀 도와주실 수 있는 분 계실까요...? 제가 일이 겹쳐 버려서요ㅠㅠ
'또 정환 오빠네...'
차슬기는 잠깐 망설였다. 꼭 본인이 도와줘야 할 일은 아니었고, 학생 때부터 동경하던 한유라 교수와 커피를 마시는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잠시 핸드폰을 켜둔 채 단톡방을 지켜보았지만, 메시지 옆의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었지만 아무도 대답은 하지 않았다.
'ABGA 면 그래도 금방 하니까'
5분 정도 지나도 아무도 답변이 없는 단톡방을 보며, 차슬기는 마음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교수님, 심장내과 인턴이 백업 요청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응, 그래요. 내일 회진 때 봐요"
카페를 나가는 차슬기를 보며, 한유라 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인턴. 똑똑하고, 일도 참 잘하는 것 같지?"
"네, 교수님. 병동에서도 평이 좋더라고요"
52호 환자 앞.
손목으로 바늘이 들어가자 주사기에 피가 차 오르고, 차슬기는 주사 부위를 알코올 솜으로 눌러줬다.
그런 차슬기를 환자가 눈을 껌뻑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안 아프게 주사 잘 놓으시네요"
"환자분이 잘 참아주셔서 그래요."
차슬기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부어 오를 수 있으니까 여기 5분만 꾹 눌러주세요"
"네, 감사해요. 선생님"
사용한 알코올 솜을 버리고 라벨까지 붙인 ABGA 주사기를 간호사에게 건네자, 간호사도 웃었다.
"선생님은 항상 라벨까지 정갈하게 붙여주셔서 좋아요."
차슬기는 이번에도 살짝 미소를 지으며 짧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인턴 의국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내과 교과서를 펼치려던 순간, 핸드폰에 알림이 울렸다.
[배정환] 너무너무 고마워요!! :) 꼭 제가 보답할게요!
무표정한 얼굴로 화면을 보던 차솔지는, 답장을 하지 않고 휴대폰을 덮었다. 잠시 뒤, 이번에는 개인톡 하나가 왔다.
[배정환] 나중에 커피라도 살게. 진짜 고마워!
차슬기는 고개를 갸웃했다.
'시간 아깝게 굳이...? 나중에 동료 평가만 잘 해주면 되지.'
메시지에 답변은 하지 않은 채,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교과서를 몇 장 넘긴 순간, 이번에는 콜폰이 울렸다.
"네, 종양내과 인턴 차솔지입니다."
그 순간, 다시 부드럽고 살가운 말투로 돌아간 차슬기였다.
* * *
도현은 오늘만 벌써 세 번째 복수천자를 시행 중이었다.
소화기내과 인턴으로 배전된 후 처음 며칠은, 사람 배에 바늘을 찌르고 복수를 뺀다는 사실 자체가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보다도 빠르고 정확하게 복수천자를 할 수 있다는 자부심까지도 생겼다.
'처음에는 그렇게 떨리더니, 사람은 참 적응의 동물이야'
처음 내과 인턴을 시작할 때는 수술방에 들어가는 외과 인턴 때보다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었는데, 막상 병동에서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콜 덕분에 지루할 틈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환자에게 줄 약을 정하고 처방을 내리는 일을 하니 정말 의사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복수천자처럼 직접 손으로 하는 술기를 하는 순간에는 묘한 즐거움도 있었다.
세 번째 환자의 복수 천자를 하고, 배액관을 거치해두었다. 천천히 복수가 빠져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도현은 환자게에 말했다.
"한 시간 뒤에 다시 와서 바늘 뺼게요. 그동안은 편하게 계세요"
그 순간, 콜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하니 종양내과 병동. 인턴을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전화번호 끝자리를 보면 어느 병동에서 전화했는지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네, 내과 인턴 이도현입니다."
"선생님, 종양내과인데요. ECG 한 분만 지금 찍어주세요."
"아, 그런데 종양내과 인턴은 차슬기 선생님 아닌가요?"
"네, 근데 연락이 안 돼서요. 그리고 지금 당직은 선생님이시길래..."
시계를 확인한 도현의 눈에 6:59에서 7:00으로 넘어가는 숫자가 들어왔다.
'차슬기... 시간 진짜 칼 같이 지키네.'
"네. 제가 당직 맞아요. 지금 바로 갈게요."
종양내과 병동에 도착한 도현은 ECG 기계를 끌고 환자 옆에 섰다. 모든 일이 낯설던 3월과는 다르게, 한 달이 지난 도현에게 심전도를 찍는 일쯤은 이제 식은 죽 먹기였다. 심전도를 붙일 만큼만 옷을 조심스럽게 젖히는 것도 익숙해졌고, 전극을 바로 붙이면 차갑기 때문에 손으로 조금 데워줘야 환자가 놀라지 않는다는 노하우까지 생겼다.
심전도 결과를 인쇄해 간호사에게 건네고 ECG 기계를 정리하려는 순간, 옆 병실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여기 코드 블루 방송 띄워요!"
내과 1년차 레지던트가 얼굴이 상기된 채로 복도를 뛰쳐나와 소리쳤다. 도현은 반사적으로 ECG 기계를 한 쪽에 던져두고,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갔다. 병실 안에서는 3년차 레지던트가 환자에게 CPR 을 하고 있었다.
"내과 인턴입니다. 손 바꾸겠습니다!"
도현의 말에 CPR 을 하던 레지던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셋에 바꿀게요. 하나, 둘, 셋!"
그 말에 맞추어 도현은 망설임 없이 자리를 바꿔 들어가 곧바로 흉부압박을 시작했다.
손 아래로 환자의 갈비뼈가 눌리는 감각이 그대로 전해졌다. 주변에서는 간호사들이 시간을 재며 약물을 투여했고, 1년차 레지던트는 계속해서 간호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3년차 레지던트는 담당 교수님에게 전화로 현재 상황에 대해 노티를 하고 있었다. 보호자는 병실 한편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고, 다른 병실의 환자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처치실로 바로 옮길게요!"
침대가 복도를 따라 움직이자, 도현은 침대 위에 올라타 CPR 을 이어갔다. 쿵, 쿵, 쿵. 박동 없는 가슴을 계속해서 누르는 동안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 병원 스피커를 통해 방송이 울려 퍼졌다.
띠-- 띠-- 띠--
[코드 블루. 코드 블루. 별관 6층, 615호. 종양내과. 성인 코드 블루.]
이제 방송을 들은 내과 당직 인턴과 레지던트들이 달려올 터였다. 조금씩 숨이 차는 것이 느껴졌지만, 도현의 손에 온전히 의존해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환자의 심장 박동을 멈출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곧이어, 다시 한 번 스피커가 울렸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본관 10층, 호흡기내과. 성인 코드 블루.]
도현은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뭐야? 본관도 코드블루야?"
주변 모두가 동시다발적으로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귀를 의심하는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방송은 다시 한 번 '본관 10층 코드블루' 라며 반복하고 있었다.
1년차 레지던트가 급히 전화를 끊으며 말했다.
"선생님, 거기 지금 2년차 선생님 혼자 계신다고 합니다."
"다른 당직 인턴들은?"
"한 명은 MRI 킵 중이고, 한 명은 전주까지 전원 킵 가서 없다고 합니다..."
"어떡하지? 우리도 여기 손 모자란데..."
본관의 코드 블루 환자도 걱정되긴 하지만, 지금 눈앞의 환자도 버려두고 갈 수는 없는 상황. 우선 지금 할 일을 하기로 했다. 1년차가 병원에 남아 있는 내과 레지던트들을 수소문하기로 하고, 3년차는 교대로 도현과 함께 CPR 을 이어갔다. 도현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팔에 감각이 사라질 즈음, 1년차가 소리쳤다.
"지금 본관에 인턴 두 명 와서 괜찮을 것 같대요!"
'인턴 두 명? 지금 당직 인턴은 더 없을 텐데...'
일단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CPR 을 이어갔다. 그로부터 10분쯤 후, 기적같이 환자의 맥박이 돌아왔다.
"ROSC (return of spontaneous circulation;자발순환회복) 되었습니다!"
맥박을 촉지해 본 3년차의 말과 함께 CPR 을 마쳤다. 돌아온 환자의 맥박에 맞추어 일정하게 울리는 기계음을 들으며 도현은 다리가 풀릴 것 같았다.
"여기는 우리가 정리할 테니, 인턴 선생님은 얼른 본관으로 가서 도와줘요"
도현은 다시 힘을 내 뛰기 시작햇다. 야간의 별관에서 본관으로 이어지는 복도는, 조명이 반쯤 꺼져 있었고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고요한 복도를 울리는 건 달리는 도현의 발소리 뿐.
그때였다. 복도 건너편에서 터덜터덜 걸어오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도현아!"
소리친 건 정환. 달려가던 도현을 붙잡고 말했다.
"본관 코드블루 가는 거면, 안 가도 돼."
"네?"
"나랑 슬기가 갔다 왔어. 지금 ROSC 돼서 돌아오는 중이야."
"아... 형이랑 슬기가..."
"두 번째 코드블루 방송 뜨자마자 슬기한테 전화가 왔어. 당직 인턴 손 모자랄 것 같다고."
도현은 옆에서 말없이 있는 차슬기를 바라봤다.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그녀가 퇴근이 지난 시간에도 앞장서서 도와주러 왔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도현의 시선을 의식한 듯, 차슬기가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아, 아니... 아까 옷 갈아입느라 콜을 못 받았었는데... 혹시 그 때문에 뭔가 잘못된 건가 싶어서..."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는 모습은 도현에게 꽤 낯설게 느껴졌다. 언제나 완벽한 기계인 줄만 알았던 차슬기가, 갑자기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도현아, 슬기야... 뭐라도 좀 마시자."
정환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도현은 정환 슬기와 아직은 어색한 사이였기에 망설였고, 슬기도 같은 눈치였다. 그럼에도 정환의 손길을 거부할 수는 없어 도현과 슬기는 정환에게 이끌려 병원 1층 카페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불이 꺼져 묻이 닫힌 카페. 어쩔 줄 몰라 서 있던 찰나, 차슬기가 무언가를 가리켰다.
"저거."
그 손끝엔 어두운 병원 로비 한켠에서 은은하게 불빛을 내고 있는 자판기가 있었다. 셋은 자판기에서 각자 캔 음료수를 하나씩 꺼내들고, 로비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톡' 소리와 함께 열린 음료수 캔에서 올라오는 시원한 기포. 도현은 그걸 한 모금 들이켰다. 시원한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며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며 생기를 불어넣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치킨 먹으려고 했는데, 늦어져서... 오히려 다행이다."
정환의 말에 슬기가 피식 웃었다.
"정환 오빠, 당연히 일 남아서 병원에 있을까 봐 먼저 전화한 거에요"
"아, 그래?"
"오빠 이번 달 안에는 칼퇴근 못 할 걸"
정환은 민망한 듯 얼굴이 붉어졌고, 이내 세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불이 꺼진 병원 로비 한가운데, 세 사람의 웃음소리가 은은하게 퍼졌다. 웃음이 잦아든 뒤, 도현은 남아있는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평소엔 잘 마시지도 않던 탄산음료가 이상하리만치 달고 시원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기포가 터지는 느낌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이 순간만은 평생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도현의 마음 깊숙한 어딘가를, 그 생각이 조용히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