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눈동자 <백색 궁전>
분수대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또 들렸다.
“주리야! 어서 와. 난 무혁이 형의 동생. 이민우야.”
“이민우라고?”
임주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는 이민우가 누구인지 몰랐다.
반면 손정기 반장은 이민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민우는 임무혁의 탈출을 도운 물뱀파 행동 대장이었다.
손반장이 임주리에게 말했다.
“이민우라는 자는 오빠의 의형제 같습니다. 어서 분수대 뒤로 가세요.”
“아, 그래요? … 알겠어요.”
임주리가 고개를 끄떡이고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분수대 뒤로 향했다.
또각! 또각! 여자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손정기 반장이 들었다. 무척 긴장한 듯 침을 꿀컥 삼켰다.
잠시 후 임주리가 분수대 뒤로 사라졌다. 발소리가 그쳤다.
공원이 다시 고요해졌다.
바람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이제 끝난 건가?’
손반장이 안도했을 때, 다시 분수대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손정기 반장. 당신도 분수대 뒤로 와야겠어.”
“뭐라고?”
손정기 반장이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는 분수대 뒤로 가고 싶지 않았다. 분수대 뒤는 너무나도 어두웠다.
어둠 속에 임무혁이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임무혁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덤빌 것만 같았다.
“젠장!”
손반장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이곳에서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김덕기 형사과장이 분명히 말했었다. 임무혁의 요구를 충실히 따르라고 … 충실히 따르면 고속 승진을 약속했다.
김과장은 인천남부경찰서 내에서 실세 중의 실세로 통했다. 경찰 서장도 그에게 꼼짝도 못 했다.
차기 경찰서장으로 유력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지시를 잘 따르는 건 출세를 위한 지름길이었다.
“알았다.”
손정기 반장이 짧게 답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는 한 대 정도는 맞아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불륜의 대가를 끝내고 싶었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손반장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분수대 뒤로 향했다.
분수대 뒤는 어둠 그 자체였다. 가로등 불이 닿지 않는 곳이라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이민우, 나는 마약반 손정기 반장이다.”
손정기 반장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말했다.
그때! 거친 말이 들렸다.
“이 시궁창 쥐새끼! 아주 더러운 새끼! XX.”
욕설과 함께 검은 그림자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뒤이어 커다란 타격음이 들렸다.
퍽! 퍽!
“억!”
쓰라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손반장이 갑자기 날아온 주먹을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다. 쿵! 하며 큰 소리가 들렸다.
“으으으!”
손정기 반장이 신음을 내뱉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입에서 피를 뱉어냈다.
어둠 속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손정기! 이제, 시작이다. 너는 죽을 만큼 맞아야 해! 그래야 정신을 차릴까 말까다!”
“뭐라고? 이, 이놈이!”
손반장이 서둘러 일어났다.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를 향해 반격하려 했다. 하지만 상대는 싸움의 달인 이민우였다.
인천 제1의 조폭 물뱀파 행동대 대장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이민우는 발차기의 달인 재규어 임무혁보다 실력이 떨어졌지만, 최상급의 싸움꾼이었다. 손정기 반장은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아이고!”
손반장이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그가 두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미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봐주세요!”
이민우가 추상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혁이 형은 너는 때리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무혁이 형과 다르다. 쓰레기한테는 매가 약이다.
할 일이 없어서 부하의 부인과 바람을 피우냐? 그게 상관이, … 경찰이 할 짓이냐?
너는 겉만 번지르르한 가짜 경찰이다! 나라를 좀먹는 해충에 불과해! 오늘 본때를 보여주마!”
“제발 봐주세요! 정말 잘못했습니다.”
“웃기지 마!”
이민우가 다시 주먹을 날렸다. 폭격기가 가차 없는 폭격을 가하는 거 같았다.
“악!”
결국, 손정기 반장이 모진 매를 견디지 못하고 의식을 잃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렇게 뻗었다.
이민우가 바지 주머니에서 흰색 손수건을 꺼냈다. 그 손수건으로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제발 그만 해요. 이러다 사람이 죽겠어요.”
어둠 속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임주리였다. 임주리가 말을 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죠? 저 사람이 새언니랑 바람을 피웠다는 말이에요? 손반장님은 오빠 상관인데 설마 그럴 리가요?”
이민우가 손에 묻은 피를 다 닦고 답했다.
“저놈은 형수와 바람을 피웠습니다. 그 일로 무혁이 형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신 응징을 한 거뿐입니다.”
“정말이에요?”
“저자가 스스로 불륜을 실토했는데 … 아직도 저를 의심하나요?”
“알겠어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죠? 처음 뵙는 분 같은데 ….”
“저는 무혁이 형과 오랜 인연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무혁이 형이 저를 구해줬습니다.
그때부터 무혁이 형과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지금 무혁이 형과 함께 백궁과 싸우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오빠는 어디에 있어요. 여기에 있나요?”
“무혁이 형은 여기에 없습니다. 제가 대신 왔습니다. 지금 전화 해보세요.”
이민우가 말을 마치고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을 임주리에게 건네며 말했다.
“단축키 1번을 길게 누르세요.”
“네, 알겠습니다.”
임주리기 임무혁에게 전화 걸었다. 신호가 가자, 곧 목소리가 들렸다.
“주리니?”
오빠의 목소리였다. 임주리가 오빠의 목소리를 듣고 울컥했다.
그녀는 유치장에 갇혔을 때 오빠 때문에 경찰에 잡혔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동생과 오빠 모두 백궁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백궁을 잡으려다가 오히려 적에게 당하고 말았다. 동생은 구치소에 수감됐고 오빠는 지명수배자였다.
“오빠!”
임주리가 크게 외쳤다. 임무혁이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주리야. 다행히 목소리가 좋구나.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다친 데는 없어. 오빠도 괜찮아?”
“응, 나는 괜찮아. 민우 말을 잘 따라, 어머니도 옆에 있어. 이따 보자.”
“응, 알았어.”
임주리가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기쁜 나머지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민우가 그 모습을 보고 씩 웃었다.
“잘 됐군.”
이민우가 손정기 반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몸을 뒤졌다. 재킷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최근 통화 목록을 살폈다.
그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장 최근에 통화한 자는 인천남부경찰서 김덕기 형사과장이었다. 백궁 조직원이었다.
이민우가 김과장에게 전화했다.
삐리릭!
벨소리가 울리자, 바닷가 별장 응접실에 긴장감이 흘렀다. 백궁 주요 인사들이 몸을 떨었다.
김덕기 과장이 발신자를 확인하고 서둘러 말했다.
“손정기 반장의 전화입니다. 임무를 완수한 모양입니다.”
신재순 시장이 고개를 끄떡이고 말했다.
“그렇군요. 그럼, 어서 전화를 받으세요.”
“네, 알겠습니다.”
김과장이 전화를 받았다. 그가 말했다.
“손반장. 그래, 어떻게 됐어?”
이민우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김덕기 과장이군. 백궁 멤버인 ….”
“뭐라고?”
김덕기 과장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핸드폰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손정기 반장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낯선 목소리였다. 그가 급히 말했다.
“너는 대체 누구야? 손정기 반장은 어디에 있는 거야?”
이민우가 당당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임무혁의 동생 이민우다.”
“헉! 이, 이민우!”
이민우라는 말에 김과장이 또 한 번 놀랐다.
이민우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보낸 손정기 반장은 매를 실컷 맞고 곤히 자고 있다. 사람을 보내라. 병원에 입원해야 할 거 같다.”
“손반장을 때렸다고? 감히 경찰을 때려?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줄 싶으냐?”
“뭐라고? 참 어이가 없군. 지금 너희는 내 걱정을 할 때가 아닌 거로 아는데 증거를 그냥 확 풀어버릴까?”
“아니, 아니, 제가 … 말실수했습니다. 이민우 선생님, 고정하세요.”
김덕기 과장이 쩔쩔매기 시작했다. 바로 꼬리를 내렸다.
이민우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가 말했다.
“약속대로 보스 남궁철을 넘기겠다. 남궁철은 분수대 뒤편 큰 나무 아래에 있다. 수면제를 먹고 꽁꽁 묶여 있다.
다음 지시를 내리겠다. 인천지하철 공영역으로 가라. 보관함 7번을 열어라. 비밀번호는 0034다. 안에 쪽지와 테이프 하나가 있다.”
“네? 테이프가 있다고요? 증거 영상이 담긴 테이프인가요?”
“그렇다. 세 개 중 하나를 미리 넘기겠다. 우리에게 잘 협조하면 남은 두 개도 모두 넘기겠다.
우리는 백궁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너희와 싸워봤자 서로 죽을 뿐이다. 그래서 윈윈하기로 했다. 바로 상부상조지. 이정길했던 것처럼 ….”
“보관함 비밀번호가 003 뭐라고요?”
“0034다. 0034! 이만 전화 끊겠다.”
전화가 끊겼다. 김덕기 과장이 이 사실을 신재순 시장에게 보고했다. 신시장이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그가 말했다.
“역시 임무혁 그자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군. 서로 싸워봤자, 좋은 건 하나도 없어. 서로 윈윈하는 게 제일 좋은 거야.
그래야 피해도 적고 파국도 없어.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우면 결국, 다 같이 죽는 거지. 임무혁, 합리적인 친구군. 흐흐흐!”
전해식 의원도 한시름을 놓은 표정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임무혁이 현명한 선택을 했습니다. 분명 돈을 요구할 거 같습니다. 먼저 돈을 최대한 준비하겠습니다.”
신시장이 고개를 끄떡이고 말했다.
“그래요. 맞습니다. 돈을 준비하세요. 그리고 어서 지하철 보관함으로 사람을 보내세요. 가서 테이프와 쪽지도 확보하세요.
아! 분수대에 있는 남궁철도 데려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김덕기 과장, 어서 움직이세요.”
“알겠습니다. 신속하게 움직이겠습니다.”
김덕기 과장이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백궁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때
차 한 대가 울창한 수풀로 달려갔다. 창고 앞 공터였다. 그곳에 임무혁, 최운성, 윤진희가 이민우와 임주리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