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눈동자 1편 <백색 궁전>
인천 지하철 남동구역 보관함 12번에 한 사람이 달려왔다. 인천 남부 경찰서 마약반 반장 손정기였다.
그가 서둘러 비밀번호 ‘5629’를 입력했다.
삐리릭!
디지털 신호음이 열리고 12번 보관함이 열렸다. 손반장이 급히 보관함 안으로 한 손을 넣었다. 보관함 안에 쪽지 한 장이 있었다.
쪽지에 적힌 번호는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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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2378 □□□□
여기로 전화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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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손정기 반장이 두 손을 비볐다. 쪽지에 적힌 번호대로 전화 걸었다. 신호가 두어 번 거자,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그 목소리를 듣고 손반장이 급히 말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무혁아, 나야 손반장이야. 지금 어디에 있어?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전화를 받은 사람은 임무혁이었다.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반장님이 직접 전화하셨군요.”
“그래, 이러지 말고 어서 자수해. 사방에 경찰이 쫙 깔려있어. 네가 잡히는 건 사실상 시간 문제야.”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럼, 객기 부리지 말고 어서 자수해. 그럼 정상참작 받을 거야.”
“정상참작이라고요? 황당하군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입니다. 당신들이 나에게 누명을 씌워놓고 선처하겠다는 말인가요?”
손정기 반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임무혁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손반장은 상관인 김덕기 형사과장의 지시를 받았다. 그 지시를 충실히 따라야 했다.
“무혁아 간곡히 말한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 어리석은 짓 하지 마.”
“…….”
임무혁이 잠시 뜸을 들였다.
“이런!”
손정기 반장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임무혁을 회유해야 했다. 그게 김과장의 지시였다. 그러다 그게 통하지 않으면 임무혁의 지시를 따라야만 했다.
침묵을 지키던 임무혁이 입을 열었다. 무척 낮은 목소리였다.
“반장님, 동생과 함께 영륜 공원으로 … 최대한 빨리 오세요. 다른 사람이 오면 안 됩니다. 명심하세요.
다른 사람이 오면 이번 거래는 취소입니다. 원천 무효입니다.”
“아, 알았어. 그렇게 할게. 동생 주리는 구치소에서 풀려나 경찰서에 있어. 영륜 공원은 경찰서에서 근방이야. 곧 갈 수 있어.”
“영륜 공원에 도착하면 분수대로 오세요. 거기서 제 전화를 기다리세요.”
“알았어. 그리하지.”
임무혁이 전화를 끊었다.
손정기 반장이 김덕기 과장에게 전화했다. 통화 내용을 보고해야 했다.
신호가 가자, 김과장이 바로 받았다.
“손반장이야?”
손반장이 급히 말했다.
“과장님. 임무혁과 방금 통화했는데 회유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대신 동생과 함께 영륜 공원 분수대로 오랍니다. 다른 사람이 보이면 이번 거래는 최소랍니다. 원천 무효랍니다.”
“알았어. 어쩔 수 없지. 처음부터 회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어. 어서 경찰서로 돌아와. 임주리랑 함께 영륜 공원으로 가.”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지원 병력은 있나요?”
“뭐?지원 병력이라고?”
“네, 저 혼자 영륜 공원으로 가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임무혁은 지금 독기가 바짝 올랐습니다. 저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김덕기 과장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손정기 반장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임무혁을 보기가 껄끄러웠다. 그는 임무혁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렀다.
그걸 임무혁이 알았다. 그래서 임무혁이 두려웠다. 성난 임무혁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김과장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원은 없어. 임주리랑 단둘이 가. 이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야. 어서 서둘러! 잘 처리하면 고속 승진할 거야.”
“네에? 지원이 전혀 없다는 말인가요?”
“그래.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임무혁의 조건에 따라야 해. 지금 임무혁이 키를 쥐고 있어.”
“대체 왜 그래야 하죠?”
김덕기 과장이 그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부하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가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손반장, 군소리하지 말고 어서 내 지시에 따라! 총도 두고 가. 임무혁의 지시에 따라! 그게 자네가 할 일이야. 명심해!”
“아, 알겠습니다.”
손정기 반장이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손반장이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만 했다. 그는 백궁 조직원이 아니었다. 그래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다.
그에게 있어 임무혁은 잡아야 할 지명수배자에 불과했다.
현재 백궁은 긴급회의 중이었다. 주요 인사들이 한적한 바닷가 별장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지금은 백궁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고문인 서울시장 신재순이 대통령 당내 경선을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 구설수가 있으면 안 됐다.
임무혁이 22년 전 참사의 증거를 인터넷에 폭로할 경우, 그 여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먼저 조작된 사진이라고 조작된 영상이라고 우길 수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경선까지 두 달이나 남았다. 그 사이에 진실이 밝혀질 수 있었다.
진실이 밝혀지면 백궁 실세인 서울시장 신재순에게 자칫 치명타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신시장이 조심하기로 했다. 최대한 임무혁의 비위를 맞추기로 했다.
이 일은 전에도 있었다. 백궁의 말단 조직원인 이정길이 참사 현장을 녹화해서 백궁을 협박했다. 그때 백궁은 이정기ퟝ르 살살 달랬다.
그에게 엄청난 돈과 쾌락을 선사하고 폭로를 무마했다. 이정길은 그 어마어마한 쾌락에 빠져 22년 동안 증거를 폭로하지 않았다.
아니 쾌락을 놓치기 싫어서 증거를 폭로할 리 없었다.
백궁은 쾌락에 빠진 이정길을 조만간에 제거할 심산이었다. 그렇게 일을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었는데 임무혁이 산통을 깨트렸다.
산통을 깨트린 정도가 아니라 조직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였다.
22년 전 이정길은 참사 녹화 영상 복사본을 백궁에게 보냈다. 그 영상을 본 백궁 수뇌부는 기절초풍했다.
영상에 백궁의 중간 보스와 행동대가 모두 찍혔다. 그들은 백궁의 미래였다.
그래서 이를 무마하기로 했다. 당시 백궁 1 인자였던 인천 시장, 주은성이 이정길을 살살 달랬다.
“어쩔 수 없군.”
손정기 반장이 서두르기 시작했다. 어서 경찰서로 가서 임주리와 함께 영륜 공원으로 가야 했다.
영륜 공원은 수풀이 우거진 한적한 곳이었다. 멋진 분수대와 인공 폭포가 유명한 곳이었다. 지금은 가을이라 분수대와 인공 폭포는 가동을 멈췄다.
***
새벽 3시가 되었다. 아주 깜깜한 시간이었다. 탁 트인 공원이라 다른 곳보다 훨씬 어두웠다. 간간이 있는 가로등 불만이 공원을 비췄다.
오늘따라 공원 불빛이 밝지 않은 거 같았다. 느낌상 그런 거 같았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공원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두 명이 내는 소리였다.
한 발소리는 보폭이 넓었다. 남자가 내는 발소리였다. 다른 발소리는 보폭이 좁았다. 여자가 내는 발소리였다.
손정기 반장이 무척 긴장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옆에 젊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녀는 임무혁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자 22년 전 참사의 생존자, 임주리였다.
임주리는 백궁 조직원인 새언니 계략에 빠져 마약 밀수 혐의로 유치장과 구치소에 갇혔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얼굴이 수척했다.
둘이 커다란 분수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임주리가 무척 두려운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손반장에게 말했다.
“오빠가 여기로 있다고요?”
“그래, 네 오빠랑 여기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빠한테 너를 넘길 거야.”
“아! 그렇군요.”
임주리가 참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가슴에 두 손을 모았다.
유치장에서 오빠가 지명 수배됐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무척 걱정하고 있었다.
오빠가 22년 동안 사무친 원한을 갚기는커녕 오히려 잡혀서 죽을 것만 같아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그래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입맛이 전혀 없었다.
밥을 먹어도 흙을 먹는 거 같았고 국을 떠먹어도 진흙을 퍼먹는 거 같았다.
한편, 그 시각 백궁은 한적한 바닷가 호화 별장에서 대책 회의가 한창이었다. 이곳은 커다란 응접실이었다. 회의를 위해 의자 20개가 준비됐다.
상석에 고문, 서울시장 신재순이 앉았다. 그의 옆에 인천시 국회의원 전해식과 서울 부시장이 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멀리 감치 떨어져 앉았다. 김덕기 과장은 맨 끝자리에 있었다.
전의원은 백궁 회장이었고 서울 부시장은 백궁 부회장이었다.
직책상 백궁 회장이 전권을 휘둘러야 하지만, 백궁 고문 신재순 시장은 차기 대통령을 노리는 자였다.
그래서 현재 백궁에서 고문이 가장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는 직책은 낮았지만, 서열 1위였다.
신시장이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입술에 침을 덕지덕지 묻혔다. 무척 긴장한 거 같았다.
그는 평생소원이 이루어질 순간에 다가왔다. 그것은 대한민국 1 인자가 되는 거였다.
그동안 물밑 작업을 착실히 해왔다. 그래서 차기 대통령 적합도 여론 조사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2위와 15퍼센트 차이였다.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가면 대한민국 대통령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그렇게 되면 대한국은 마약 카르텔 백궁의 손아귀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이 마약 소굴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백궁에게 있어 마약은 자금줄이었고 사람을 조종하는 강력한 무기였다.
백궁은 마약 생산국과 긴밀한 연계 속에서 그동안 커다란 이익을 얻었다.
그렇게 얻은 자금으로 여러 알짜배기 사업을 벌였고 많은 돈을 대중에게 살포했다.
신재순 시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손정기 반장이 잘하겠죠?”
그 말을 듣고 김덕기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답했다.
“고문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손정기 반장은 제가 믿는 부하입니다. 잘 처리할 겁니다.”
“그래야죠.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일단 임무혁의 말을 잘 따라야 합니다. 대선이 코앞이라면 그냥 뭉게고 나갈 수 있지만,
운이 없게도 대선이 한참 남았습니다. 이때 22년 전 참사 영상이 세간이 퍼지면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동안 많은 역경을 헤치고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여기에서 꺾일 수는 없습니다.”
“매우 지당하신 말입니다.”
전해식 의원이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신재순 시장이 김덕기 과장에게 말했다.
“손정기 반장에게 전화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김과장이 손정기 반장에게 전화 걸었다. 신호가 가자, 손반장이 바로 전화 받았다.
“네, 과장님.”
“지금 도착했어?”
“네, 도착했습니다. 임무혁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직 특별한 일은 없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자네 임무는 임주리를 임무혁한테 넘기는 거야. 그것만 신경 써.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손정기 과장이 전화를 끊었다. 그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 숨소리가 공원에 크게 들렸다.
임주리가 침을 꿀컥 삼켰다. 그녀가 분수대를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무혁 오빠,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임주리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에 답하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5분의 시간이 흘러갔다. 뭔가가 일어날 듯한 시간이었다. 긴장감이 계속 더해갔다. 조만간에 무슨 큰일이 터질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분수대 뒤에서 나는 소리였다. 남자 목소리였다.
“주리야. 분수대 뒤로 와.”
그 소리를 듣고 임주리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오매불망 오빠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애타게 기다리던 오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응?”
손정기 반장도 그 소리를 듣고 긴장했다. 그도 부하인 임무혁의 목소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분수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임무혁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긴장감이 한층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