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유강인 18편 <검은 자서전과 악의 비밀>
다음날
2025년 11월 18일 오전 10시 24분
유강인이 잠자리에서 뒤척였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이불을 걷어찼다. 눈꺼풀 속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꿈을 꾸는 듯했다.
보였다. 여러 사람이.
백두성과 천일수 그리고 김정태가 보였다.
웃음소리도 들렸다.
고혜정 팀장이 비웃고 있었다. 옆에 미지의 여성도 보였다. 이동희 대리 같았다.
백두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뭔가를 말하려는 거 같았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갑자기 나타난 검은 옷을 입은 괴한이었다.
유강인이 백두성을 구하려고 달려갔을 때
그의 몸이 흔들거렸다. 귓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강인아, 전화가 왔어. 어서 일어나, 급한 전화래.”
어머니, 장승희의 목소리였다.
“으으으~!”
유강인이 신음을 내뱉고 천천히 눈을 떴다.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마주했다. 앞에 어머니가 있었다. 핸드폰을 들고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유강인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
“강인아, 급한 전화가 와서 어쩔 수 없이 깨웠어. 이제 피곤은 다 풀렸어?”
유강인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가 아들의 한 손을 꼭 잡고 말을 이었다.
“아이고, 우리 아들 얼굴이 반쪽이 됐어. 몸보신해야겠어. 저녁에 소갈비 먹으러 가자.”
유강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어제저녁, 유강인은 천일수 기념관에서 물증을 확보하고 차를 타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다.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쓰나미처럼 몰려와 그를 덮쳤다.
그 모습을 보고 황정수와 황수지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탐정이 사건을 풀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모습에 감동했다.
3시간 후, 유강인 집 앞에 차가 멈췄다. 유강인은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이에 황정수가 유강인을 업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간 유강인은 계속 잠만 잤다. 12시간 동안 숙면에 빠졌다. 그렇게 몸에 쌓인 피로를 풀었다.
아들이 정신을 차리자, 장승희가 말했다.
“아들, 이호식 팀장님 전화야. 어서 받아. 녹취록을 만들었대.”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유강인이 서둘러 전화 받았다. 그가 말했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이제 깨어났습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한 일이지. 그동안 피로가 많이 쌓였던 모양이네. 유탐정, 몸은 괜찮아?”
“팀장님, 잠을 푹 자서 이제 개운합니다. 충분히 잤습니다. 녹취록을 만들었다고요?”
“응, 전문가가 녹취록을 만들고 공증까지 했어. 녹취록을 확인해보니 놀라운 내용이었어. 사진, 수첩도 마찬가지야.
서울청으로 어서 와. 수십 년 동안 감춰졌던 비밀이 이제야 수면 위로 드러났어.”
“알겠습니다. 바로 씻고 서울청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유강인이 전화를 끊고 황수지에게 전화 걸었다.
“수지!”
유강인의 목소리를 듣고 황수지가 기쁜 목소리로 답했다.
“집 앞에서 대기 중입니다. 잘 주무셨어요?”
“응. 덕분에 푹 잘 잤어. 곧 나갈 테니 기다리고 있어.”
“아침은 드셨어요?”
“아니, 지금 일어났어.”
“그러실 줄 알고 선임 조수님이 아침을 준비했어요. 불고기 김밥과 실론티를 사 왔어요. 초콜릿 과자도 듬뿍 준비했으니 어서 나오세요.”
“그래, 알았어. 차에서 아침을 먹으면 되겠군. 지금 시간이 … 어이쿠! 벌써 10시 반이네. 아침이 아니라 브런치가 되겠어.”
“네, 그렇죠. 아침 겸 점심으로 김밥 세 줄을 맛있게 드세요.”
“그래, 알았어.”
유강인이 전화를 끊고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세수하고 옷도 갈아입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뒤따라온 어머니가 아들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말했다.
“아들, 너무 무리하지 마. 서두른다고 일이 되는 게 아니야. 적당히 뜸을 들이는 것도 필요해. 그래야 밥이 잘 익어.
밥이 팔팔 끓으면 약한 불에 끓여야 해. 강한 불에 계속 끓이면 밥이 홀라당 다 타버려. 탄 밥은 먹을 수가 없잖아.”
유강인이 고개를 끄떡였다. 가슴에 새겨야 하는 금과옥조와 같은 말이었다. 그가 답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급할수록 여유를 갖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어머니.”
유강인이 말을 마치고 현관문을 열었다. 급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공동 현관문에서 나가자, 탐정단 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탐정단 밴 뒷좌석이 활짝 열렸다. 차에서 나온 황정수가 환하게 웃으며 두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유강인이 씩 웃고 차를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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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청 강력범죄수사대 사무실 문이 열렸다. 유강인과 조수 둘이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는 이호식 팀장, 차수호 반장, 정찬우 형사, 백정현 형사, 우동식 형사를 비롯한 많은 형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강인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너도나도 할 거 없이 손뼉을 쳤다.
어젯밤 충남 서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차수호 반장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유강인 탐정님,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맞아요. 탐정님 덕분에 드디어 비밀이 드러났습니다. 장장 60년간 감춰졌던 비밀이 베일을 벗었습니다. 하하하!”
“역시 유강인 탐정님이야. 우리 서울청 출신이라는 게 정말 자랑스러워.”
형사들이 손뼉을 치며 함빡 웃었다. 생일 축하 파티 같았다.
유강인이 정색하고 말했다.
“형사님들, 아직 축하할 때가 아닙니다.”
유강인이 두 손을 들었다. 그렇게 형사들을 진정시켰다. 축하는 나중의 일이었다. 아직 범인을 잡지 못했다. 축하는 범인을 잡고 받아야 했다.
“그렇지. 우리가 좀 오버했네.”
이호식 팀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앞으로 나왔다. 한 손에 서류 봉투가 있었다. 비밀이 담긴 증거였다. 그가 말했다.
“유강인 탐정님, 이제 회의실로 갑시다. 가서 증거를 확인하세요.”
“감사합니다. 팀장님. 존댓말까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팀장이 활짝 웃으며 말을 받았다.
“유탐정, 내가 기분이 좋아서 그래. 어서 가자고. 경찰청장님께서 우리 강력 1팀과 서해안 경찰서 강력반을 칭찬하셨어. 유강인 탐정과 함께 범인을 꼭 잡으라고 신신당부하셨어.”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럼, 어서 회의실로 가자고.”
이호식 팀장이 앞장섰다. 그 뒤를 유강인이 따랐다.
회의실 문이 열렸다.
탐정단과 수사팀이 자리를 잡았다.
유강인이 자리에 앉자, 조수 둘, 이호식 팀장, 차수호 반장, 정찬우 형사, 백정현 형사도 자리에 앉았다.
이호식 팀장이 서류 봉투를 유강인에게 건넸다.
유강인의 눈이 반짝였다. 입술에 침을 묻히고 침을 꿀컥 삼켰다. 이제 비밀을 확인해야 했다. 봉투를 열고 안에 있는 걸 꺼냈다.
내용물은 녹음테이프 녹취록과 수첩 복사본, 사진 복사본이었다.
유강인이 먼저 수첩 복사본을 살폈다. 찬찬히 그 내용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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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2월 3일 밤 8시 20분
의뢰인: 영화배우 정지숙
수고비: 십만 원(100.000원, 현재가 대략 1억 원)
목표: 영화배우 이두희
의뢰 내용: 신흥실업 윤창성 사장과의 불륜설을 퍼트릴 것. 헛소문을 최대한 퍼트려 평판을 떨어트려야 함. 연예계 은퇴가 목표.
1966년 5월 29일 밤 09시 20분
의뢰인: 영화배우 김정태, 영화배우 차연자
수고비: 십만 원(100.000원)
목표: 영화배우 하연미의 눈
의뢰 내용: 액션 연기 리허설 중 하연미의 눈을 공격해서 상처입힐 것. 캐스팅 탈락이 목표.
1969년 3월 23일 밤 8시 30분
의뢰인: 재흥 실업 김연지 여사
수고비: 십일 만원(110,000원)
목표: 영화배우 김연숙
의뢰 내용: 김연숙을 유산시킬 것. 의뢰인은 첩이 낳은 손주를 원치 않음.
1970년 9월 30일 밤 11시 20분
의뢰인: 세인 시멘트 회장 차흥민
수고비: 오십 만원(500,000원)
목표: 영흥 시멘트 사장 주철홍
의뢰 내용: 주철홍 사장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것. 주사장이 죽은 후 세인 시멘트에서 영흥 시멘트를 인수할 예정.
1972년 12월 1일 밤 12시 35분
의뢰인: 영화배우 김미려
수고비: 이십 만원(200,000원)
목표: 영화배우 성은주
의뢰 내용: 성은주가 출산할 때 아이를 몰래 빼돌려서 고아원으로 보낼 것. 아이 아버지는 JS 그룹 황태자 송해성임. 아이가 죽은 것처럼 감쪽같이 속일 것. 병원 측 매수가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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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9월 17일 밤 12시 05분
의뢰인: 영화감독 김찬수
수고비: 2억 원(200.000,000원)
목표: 영화감독 추창선
의뢰 내용 : 추창선 감독 핸드 프린팅 행사 때 감쪽같이 죽일 것. 맹독을 점토에 몰래 바를 것.
맹독은 CBn2 성분으로 신종 약임. 부검으로 독살을 밝힐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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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세상에!!”
유강인이 수첩 복사본을 읽고 깜짝 놀랐다.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 두 눈이 대형 쟁반처럼 커졌다.
비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차마 마주할 수 없을 만큼 추악했다.
헛소문을 퍼트려 상대방의 평판을 떨어트리는 건 약과였다.
눈을 다치게 해서 캐스팅에서 탈락시키고 아이 유산 및 유괴, 혼외자식 빼돌리기, 살해를 버젓이 의뢰하고 실행했다.
범죄 행위가 상상을 초월했다.
유강인이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생각에 잠겼다.
‘수첩 내용을 쭉 살피니 범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해결사야. 의뢰인들은 다 재계와 연예계 사람들이야. 범인은 재계와 연예계의 검은 욕망을 해결하는 자야.
잠깐, 재계와 연예계라면 … 두 번째 비밀 코드, 구왕자가 있잖아. 그들은 모두 재계와 연예계의 유명인사였어.
그중에서 한 명이 베일에 가렸어. 그자는 미스터김이야. 첫 번째 비밀 코드야.
세 번째 비밀 코드, 연풍 초등학교와 네 번째 비밀 코드, 교장이 서로 연결되었듯이, 첫 번째 비밀 코드, 미스터김과 두 번째 비밀 코드, 구왕자도 서로 연결되어 있어.
그렇다면 아! 그렇구나, 미스터김이 바로 해결사였어, 그자가 바로 범인이야. 미스터김은 난봉꾼 구왕자의 멤버였어. 구왕자와 어울리며 연예계와 재계를 속속들이 안 거야.
미스터김은 사람들의 첨예한 갈등을 이용해서 이런 일들을 벌인 거야. 거액을 노리고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무지막지한 일들을 수십 년 동안 저질렀던 거야.’
유강인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두 눈에 분노가 들끓었다. 분노가 마그마처럼 팔팔 끓어올랐다.
범인의 정체는 첫 번째 비밀 코드, 미스터김이었다. 그자는 60년이 넘게 온갖 범죄를 저질렀다.
백두성의 그 범행을 폭로하려 하자, 그 추악한 비밀을 감추기 위해 살인과 납치를 거리낌 없이 자행했다.
유강인이 백두성을 생각했다.
백두성은 이 참담한 비밀을 알고 있었다.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을 지켰다. 그는 승승장구해서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10인에 선정됐다.
최고의 영예에 오른 후, 그에게 남은 건 내려올 길밖에 없었다. 삶의 끝자락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결국,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비밀을 폭로하려 했다.
그 비밀을 유강인이 알게 됐다. 이제 미스터김을 잡아야 했다. 그자를 단죄해서 그 죄를 엄중히 물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었다. 하지만 2000년 9월에 벌어진 추창선 감독 살인 사건은 해당하지 않았다.
2000년 8월 이후에 발생한 모든 살인 사건은 공소시효가 폐지되었다. 그래서 추감독 살인 사건은 범인을 잡아서 단죄할 수 있었다.
유명한 감독인 추감독이 죽었을 때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사인은 쇼크사였다. 경찰이 조사를 시작했지만, 범인을 잡을 수 없었다.
이번 기회에 추창선 감독 살인 사건도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은 추감독의 혼을 달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