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모른다'_
간밤에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았고, 그걸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괜찮은 척하며 속이고 있었다. 그러다 잠이 깼는데, 무서웠는지 몸이 떨리고 슬펐는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제 오후 엄마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평소 전화를 거는 시간대와 달라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이 되었다. 바로 전화를 걸자, 엄마는 요즘 약이 잘 듣지 않아 힘들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진짜 하고 싶은 말씀을 하기 시작했다. "유튜브 보니까 해독박사라고 있던데, 통증을 좀 낫게 해 준다더라. 전화해서 물어보니까 마침 우리 집이랑도 안 멀더라. 거기 가보려고."
그 말을 듣자마자 내 입에선 다니는 병원은 어떡하고 무슨 해독이냐는 말부터 나왔다. 내 반응에 엄마는 역정을 내셨다. 오빠도 같은 반응이었다며, 너희들이 뭐라고 해도 자신은 가볼 거라고 했다. 이렇게 아프고 힘든 걸 너희는 모른다고,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고 싶다고.
'너희는 모른다.'는 말은 한순간에 나를 무장해제시킨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큰 무력감을 느꼈다. 그랬다. 내가 당사자가 아닌 이상 어떻게 그 고통을 함부로 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참견이란 걸 할 수 있겠는가. 병으로 인해 가장 고통스러운 이도 엄마이고, 병과 함께 살아온 이도 엄마이며, 그 누구보다 병에 대해 잘 아는 이도 엄마일 것이며, 통증을 줄이기 위해 뭐든 해보겠다고 하는 것 역시 엄마의 삶에 대한 의지다.
약이 안 맞다며 제법 큰 병원을 옮긴 것도 이미 3번째다. 그나마 더 이상 받아주는 곳이 없어서 마지막 병원은 꾸준히 다니고 있었는데, 증상이 나빠질 때마다 의사에 대한 불신은 커졌다. 의사는 더 이상 약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고, 진료 때마다 엄마는 아파죽겠다고 했다. 그래서 약 용량을 올려주면 어김없이 부작용으로 더 고생했다. 의사는 이게 최선이고, 이제는 수술밖에 도리가 없다고 했다.
한방으로 해보겠다며 직접 대면진료를 받지도 않고 값비싼 한약을 주문했다가 반품했던 일도 있었고, 넘어져 골절로, 무릎 인공관절수술로, 재활치료로, 치질 수술로, 병원 입퇴원을 수시로 반복했다. 그동안 가족들은 점점 지쳐갔다. 엄마가 파킨슨 병을 진단받은 지 어느덧 11년째에 접어들었다. 병 진단 이후 엄마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처음에는 너무 억울하다며 계속 우셨는데, 불면증까지 심해져 정신과에 갔더니 우울증 증상이라고 했고 약을 처방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황장애 약까지 처방받았다. 건강에 대한 염려가 높아짐에 따라 다양한 이유로 병원을 수시로 드나들었고, 먹어야 할 약은 계속 추가되었다.
병을 진단받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엄마를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복잡해진다. 자신의 병은 기분과 깊게 연관되어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되는데 가족들이 아무도 자신의 비위를 맞춰 주지 않는다며 원망하실 때,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뭐든 해보겠다고 하셨을 때, 나는 지지해 주었어야 했다고 했다. 사실 나는 엄마가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하실 때 말리고 싶었던 적이 더 많았다. 그러나 내 몸이 아닌 이상 가족이고 뭐고 간에 타인인 나는 힘이 없었다. 좀 더 신중할 것을 권하고, 엄마의 기분이 상할 새라 조심스럽게 만류하다 그쳤다.
사람이 용기를 내어 지금보다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시도해 보는 것은 분명 장려할 일이지만, 그 결과에 대해 낙관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엄마는 자기 행동의 결과에 대해 대부분 낙관적이셨다.
엄마는 가족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약한 존재인 동시에 아픈 것이 무기인 독재자가 되었다. 그 누구도 엄마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되며, 뭔가를 해보겠다고 하면 두말 않고 지지해 주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엄마의 통증은 악화되었고 어김없이 공황증상이 찾아왔다.
밤늦게 술에 취한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는 내게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라고 거듭 당부했다. 내가 못 하게 한다고 안 할 것도 아니지만, 지지해 주라는 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이 괴롭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너희는 모른다.'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네."라는 대답만 거듭하다가 겨우 전화를 끊었다. 그래, 내 부모이지만 내 부모 역시 엄연한 타인이다. 자식이라고 해서 그들이 겪는 고통을 다 알 필요도 없거니와 다 알 수도 없다. 결혼을 해서 각자 가정을 가지고 살고 있는 오빠와 내가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나마 집이 가까운 오빠는 자주 들여다 보기라도 하지만, 집이 먼 나는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너희는 모른다."라고 하실 때마다 마치 나를 질책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내게 다 알리니 내가 직접적인 도움이 되든 안 되든 내가 모르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안다고 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 내 의견은 아무런 힘도 없는데,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꼭 알아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안 좋은 소식을 들을 때마다 몸이 멀리 있어도 내 마음은 한순간에 지옥이 되었다. 내 마음이 어떤지 엄마, 아빠는 모르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들은 불안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감당하고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서 내게 그 불안을 떠넘긴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받지 않으면 되었다. 내게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것은 같이 불안에 휘말리는 것이 아닌 낙관적인 태도였다. 곧 괜찮아질 거라고, 다 지나갈 거라는 믿음을 굳게 가지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안심이었다. 어느새 나는 그들을 안심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같이 불안에 휘말리지 않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안심시키야 했다.
만약 나의 의견을 묻는다면 솔직하게 말할 수 있지만, 이미 굳힌 결심을 내게 묻는다면 내 반대 의견은 간섭이나 통제로 느껴질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할 것이다.
원래 엄마는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편안한 존재였다. 내가 아프면 가장 먼저 생각나고 그리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엄마에게 걱정을 끼쳐선 안 된다. 엄마는 어느새 파킨슨이라는 병과 함께 늙어 노인이 되었고, 몸과 마음이 아주 약해져 있기 때문에.
부모지만 타인이라는 것을 배워간다. 그 배움의 과정이 아프고 때때로 슬프다.
엄마의 노년기를 보며, 나는 훗날 나의 노년기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생로병사는 인간의 숙명이므로 건강한 몸이 평균적인 것이 아닌 건강하지 않은 몸이 오히려 정상의 범주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엄마의 병은 본인뿐만이 아닌, 우리 가족 모두를 그전과는 달라지게 만들었다. 나의 인생관 자체를 뒤흔든 일이었고, 여전히 진행 중이기도 하다. 앞으로 엄마의 병은 점점 진행될 것이고, 나는 펼쳐질 날들이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그 속에서 치열하게 삶의 의미를 찾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