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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스위치 Jun 29. 2023

Summer

너와 나의 연결고리

학교 다닐 적, 나의 별명은 '손미녀'였다. 얼굴미녀였으면 훨씬 더 좋았겠지만.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이 예쁜 손의 조건이라면, 나는 자신 있게 '내 손이 맞소이다'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내 손을 보면 늘 하는 말이 있다.

"손가락이 기네요"

"피아노 잘 치겠다"

기다란 손가락과 피아노 실력이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손을 보는 사람마다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니 어느 정도는 연관이 있나 보다.




일찌감치 나의 기다란 손가락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아봐서였을까.

엄마는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나를 동네 가정집에서 운영하는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이것이 조기교육인가 보다.

하지만 엄마의 조기교육 열망과는 다르게 나는 얼마못가서 학원을 그만두었다.

왜냐면 피아노선생님이 너무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어려서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피아노 학원에 대한 건 딱 두 가지가 기억이 난다.

초록색 대문집. 그리고 피아노 치는 손 모양이  달걀을 가볍게 쥔 것 같은 모양에서 흩트려질 때마다  내 손가락을 탁탁 때리던 선생님의 기분 나쁜 볼펜.

나는 볼펜으로 손가락뼈를 맞을 때마다 피아노학원에 안 가겠다고 울었다. 그 뒤로도 한참을 그 집 앞을 지나칠 일이 있어도 빙 둘러서 돌아가곤 했었다.  엄마는 나의 의견을 존중해서 그 후로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도 한 번도 피아노 배워보라는 소리를 꺼낸 적이 없었고 나도 다시 배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피아노 조기교육에 실패한, 손가락은 길지만 피아노는 못 치는 사람이 되었다.




비록 피아노는 잘 못 치지만 감상하는 것은 좋아한다. 평소에도 피아노 음악을 즐겨 듣는다. 예전엔 CD를 사서 들었지만 요즘은 스마트폰 하나면 되니 참 간편하다. 시간, 장소 구애받지 않고 유튜브로 즐기는 방구석 1열 연주회도 좋다. 

'와'하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피아노와 물아일체가 되어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의 모습은 아름다워 보인다.


몇 해전 어느 날, 지역 맘카페를 둘러보다가 피아노 전공하신 분인데 집에서 개인레슨을 하고 싶다는 글을 봤다. 출산을 하고 돌이 아직 지나지 않은 아기가 있는데, 하루종일 아기랑 있다 보니 우울하기도 해서 피아노 레슨을 시작하고 싶다는 글이었다.

그 글을 보고 '한번 배워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레슨을 시작하고 싶은 선생님의 심정도 알 것 같고, 나도 배우고 싶은 용기가 생겼다. 초록 대문집 이후로 피아노 학원 다닌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개인 레슨이라고 하니 용기가 생겼나 보다. 집에 아이들을 위해 들여놨던 디지털 피아노도 있으니 천천히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수업이 시작되었고, 바이엘부터 배워 나갔다. 수업할 때 선생님의 아기는 혼자서 놀기도 하고 때로는 유모차에서 나의 피아노 소리에 맞춰서 쌔근쌔근 잠을 자기도 했다.

몇 달쯤 배워갈 때 코로나가 한참 심해졌고, 수업을 받기 위해 선생님집에 방문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행여나 내가 코로나에 걸려 선생님의 아이까지 아프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다시 배우기로 하고 그렇게 짧은 배움은 끝이 났다. (그 후로 내가 이사를 가는 바람에 선생님과의 재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피아노를 배울 때는 내가 암으로 인한 모든 표준치료를 끝내고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가 생길 때였다. 여유가 생긴 만큼 두려움도 커졌다. 혼자 남겨진 시간에는 어김없이 공포가 찾아왔다. '나한테 미래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커다란 바윗돌 같은 무게로 나를 짓눌렀다. 무서웠고 또 무서웠다. 내가 죽는 것도 무서웠고, 나를 사랑하는 아이들이 엄마를 잃게 되는 것도 무서웠다. 그저 옆에만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피아노 레슨을 시작하고부터는 두려운 생각이 들 때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무조건 피아노 앞에 앉았다. 피아노를 치며 악보에 집중하다 보면 두려운 생각을 잊게 된다. 음악치료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피아노 치는 동안에는 내 마음이 편안해지니 음악이 주는 기능은 분명 있나 보다.

그때 정말 열심히 연습했던 곡 중에 하나는 히사이시 조의  'Summer'.

얼마나 많이 쳤는지 악보를 자연스레 외우게 됐고, 나의 뇌가 악보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손이 악보를 기억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손이 저절로 움직이는 듯하는 느낌을 받았다.




여름이 되니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던 나의 고통스러운 마음은 어느새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해져 있다.

물론 하루에 몇 번씩 우울감이 올 때도 있었다.

왜 하필 나인가 하는 생각들이 마음을 할퀴고 갈 때도 많았다.

혹여나 그때의 나처럼 불안과 두려움으로 잠 못 드는 이가 있다면 마음으로 안아주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을 내라고.

그리고 피아노 배워보는 거 어때?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네 잎 클로버 발견한 어느 여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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