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난 지금 행복하지가 않아."
4월의 어느 날, 밤 10시 40분경 올해 고1인 큰 아이가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에 오는 길.
버스정류장에 마중 나가 있던 나에게 말했다.
그러곤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울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려왔다.
무엇이 이 아이의 마음을 이토록 힘들게 했을까. 나는 지금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너만 힘든 게 아니야, 다른 아이들도 다 똑같이 힘들어'
이런 말 따위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무슨 일 있었어?"
"야자 시간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공부를 하려는데 갑자기 울컥하면서 울음이 나왔어.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음... 그랬구나, 많이 힘들었구나."
밤 11시가 넘은 시간 아이와 대화를 한참 동안 나눴다.
원하지 않았던 학교로의 배정, 입학과 동시에 시작된 내신 레이스, 얼떨결에 치른 첫 3월 모의고사,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의 부재.
모든 상황이 아이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나 보다.
지금껏 별말이 없이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1시에 집에 오기까지 학교에 잘 적응하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입학한 지 이제 겨우 한 달 반을 지날 뿐인데, 아이는 체감상 7-8개월 정도 학교에 다닌 것처럼 느껴진다는 얘기를 하며 어떻게 고3까지 버틸지 모르겠다고 했다.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마음이 좀 편할 것 같아? 엄마는 우리 딸이 성적이 안 좋아도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아."
"엄마, 나 야자 빼고 집에서 공부해도 돼? 학교 교실에서 다른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만 뒤처지는 것 같고 불안하고 괴로워."
"그래, 그럼 그렇게 해. 그게 더 집중이 잘되고 자기한테 맞는 효율적인 방법이면 그렇게 하면 되는 거지."
아이는 나와 대화를 나눈 그다음 날 바로 담임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그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일찍 집에 돌아온 아이의 얼굴 표정은 어제와는 달라져있었다.
"엄마, 나 학교에서 야자 안 하고 집에 오니까 정말 너무 행복해"
하며 자기 방으로 공부하러 들어간다.
얼마 전 EBS 영어강사인 정승익 선생님의 '어머니, 사교육을 줄이셔야 합니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공부를 못하고 싶은 아이는 없다고 했다. 치열한 입시경쟁에서 아이들은 힘들어하고 아이의 자존감을 부모가 지켜야 한다고 했다. 공부 못하는 아이는 갈 곳이 없다는 말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사실 나는 아이의 성적에 관대한 부모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보는 단원평가조차도 한 개라도 틀려오면 쉬운 걸 틀렸냐며 핀잔을 주기도 했고, 큰 아이가 초등 4학년 때 수학 단원평가 85점 받아오자 불같이 화낸 적도 있다.(큰 아이는 아직도 엄마가 85점 받아와서 화냈다며 서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게 된 건 5년 전 암환자가 되면서부터이다. 그제야 깨달았다.
생명 앞에서는 건강 앞에서는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 이후로 아이의 성적에 대한 기대와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보통 그렇다. 아이에게 교육비용을 투자한 만큼 성적이 안 나오면 아이가 미워 보이기 시작하고 마음이 조급해진다. 더 잘 가르친다는 학원을 알아보고, 더 다그치게 된다.
나 역시 그랬다. 학원을 그렇게 다니는데 왜 못하냐며 아이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내 아이가 남들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깨달았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그릇이 있다. 내가 아무리 쏟아붓고자 한들 그 그릇만큼만 담기는 것임을. 더 부어봐야 담기지 않고 흘러서 넘칠 뿐이다.
나는 아이의 행복한 얼굴을 보면서 생각한다.
'그래, 네가 행복하면 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