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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스위치 Dec 11. 2022

아빠처럼 살래요

마흔 중반의 깨달음

"저런 미친놈을 봤나"

이 나온다. 깜빡이도 넣지 않고 갑자기 끼어드는 옆 차 덕분에 차에 타고 있던 가족들의 심장이 쫄깃해진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아빠는 욕 하는 법이 없다. 아빠 입에서 고작 나올 수 있는 최고의 욕은

"고약한 양반이네" 이 정도가 전부.


그렇다. 아빠는 태생이 선비이다.


전화벨이 울린다.

"네네, 선생님. 제가 지금 바빠서 통화가 안될 것 같습니다."

"아빠, 누구 전화예요?"

"응, 광고 전화. 이 분들도 하루 종일 전화하는 직업인데 좋게 말하고 끊어야지."

귀찮을 법한 광고 전화에도 아빠는 친절 모드이다.




아빠가 교육행정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하신지도 벌써 십수 년 전이다.

어렸을 땐, 아빠가 학교에서 근무하시지만 직업은 '선생님'이 아니라는 것이 싫었다.

철없고 어린 마음에 '우리 아빠도 선생님이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었다. 왠지 교사라는 직업이 더 대우받는 직업 같아 보여서였다. (물론 지금은 내가 왜 공무원 시험을 안 봤을까 뼈저리게 후회한다.)

다섯 식구 살아가는데 아빠의 공무원 월급은 항상 빠듯했다.

사춘기 때는 모든 게 불만스러웠다. 우리 집에 내 방이 없다는 것도, 매번 언니 옷을 물려 입어야 한다는 것도, 다른 친구들에 비해 용돈이 터무니없이 적다는 것도 모두 다 싫었다.

그런 불만은 아빠를 향했고, 난 늘 툴툴거렸다. 아빠의 물음에 언제나 단답형이었다. 기분이 안 좋을 때는 그 마저도 입을 다물었다.  

욕심 없고 능력 없어 보이는 아빠가 그냥 싫었다.


16살, 딸아이의 나이.

사춘기를 겪는 딸아이를 보며, 지난날 내가 아빠한테 남겼던 행동들이 떠오른다.

지난여름, 딸아이와의 감정싸움으로 눈물이 났다. 심장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것처럼 가슴이 허했다. 나의 온 마음을 다 준 첫사랑한테 싸대기 한대 세게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몇 번의 감정싸움 끝에 꾹꾹 누르고 있던 서운함터져버린 날.

어른이라면 끝까지 참았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모진 말이 나왔다.


"그럴 거면 집에서 나가"

"넌 부모 고마움도 모르는구나"




아빠도 지금의 내 맘과 같았겠지? 얼마나 시리고 아팠을까. 근데 아빤 그걸 다 참고 있었구나.

한 번도 내 앞에서 거친 말을 내뱉은 적이 없다.

항상 "그래" 하시며 감싸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외벌이 공무원 월급으로 다섯 식구 먹고살며 세 자매 대학교육까지 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마흔 중반, 사춘기 아이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아빠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선비 같은 아빠는 본인보다 항상 가족 걱정이 먼저다.

엄마 걱정, 딸 걱정, 손주 걱정.

식사하셨냐는 물음에도, 날씨 추우니 감기 조심하라는 걱정에도, 운전 주의하라는 당부에

아빠는 언제나 그렇듯.

"염려 마라"


사춘기 때 아빠처럼 살지 않을 거라 다짐했던 나의 어리석은 생각.

지금은 아빠처럼만 사는 것도 사실 힘들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아빠 그때 제가 못되게 굴었던 거 죄송해요'

'아빠처럼 살고 싶어요.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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