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으면 당연히 모유수유를 할 생각이었다. 적당히도 아닌 완전 모유만 먹여 키우는 '완모'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세쌍둥이 임신 후, 모든 것이 불투명해졌다. 나의 모유양이 얼마나 될지 알 수도 없는 일이었고, 거기다 애는 셋이다. 세명을 먹일 양이될지 안될지의 문제보다, 셋 키우기도 힘이 든데 모유까지 먹이면서 키운 다는 것이 더 어려워 보였다. 욕심을 버렸다. 아이들을 낳고 초유까지만 먹인 후, 조리원에서 단유 마사지를 받고 집으로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출산 4일째, 돌덩이처럼 뜨겁고 아픈 가슴에서 처음 나온 모유는 단 한 방울. 아이를 낳으면 모유는 알아서 펑펑 나오는 줄 알았는데 고작 한 방울이라니.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이 니큐에 있는 동안 내가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모유를 니큐로 배달하는 것이었다. 열심히 마사지를 받으며 유축을 했고 모유양은 점점 늘었다. 젖병 바닥을 얇게 까는 정도로만 나오던 모유는 젖병 한 병을 채우고, 2병을 넘어 3병까지 늘었다. 많이 나올 때는 400ml을 넘겨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가 나와야 양이 많은 건지, 적은 건지 감이 전혀 없던 나는, 내 모유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했다.
아이들이 니큐에서 퇴원을 하고 함께 조리원에 있으면서 시간이 맞는 아이에겐 직수를 하고 그 외엔 유축한 모유를 줬다. 아이들 수유 시간에 맞춰 유축해 놓은 젖병을 들고 갈 때마다 관리사님들은 깜짝 놀라셨다.
"제 모유가 많은 편인가요?"
궁금한 마음에 물어보었다.
"그럼요, 이 정도로 나오는 사람 잘 없어요."
아, 그 정도로?
나의 모유는 세 아이를 다 먹이기에도 충분한 양이라고 했다. 기대하지 않았지만, 많은 양이 나온다는 사실이 기뻤다. 동시에 생각지도 않았던 고민에 빠졌다.
'원래 단유하고 집에 가려고 했는데, 어쩌지? 이대로 끊기엔 너무 아까운데...'
양이 적었다면 고민거리가 되지 않았을까? 모를 일이지만, 조리원에 있는 내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이 바뀌었다. 세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가 돌보는 게 얼마나 힘이 들지 감도 오지 않았다.
'내가 해낼 수도 있잖아?'
용기인지, 오기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겪어보기도 전에 지레짐작으로 못할 것이라고 단정 짓고 잘 나오는 모유를 끊기는 너무 아까웠다.
'그래, 너무 힘들면 그때 단유하면 되지.'
나는 일단 해보기로 했다. 아이가 셋이라 완모는 불가능하더라도 하는 데까지는 해야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아이들과 집으로 돌아온 후, 아이들을 돌보고 먹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고 잠이 부족했다. 한 아이를 차분히 품에 안고 하는 직수는 생각도 못할 일이었고, 배고프다고 우는 아이를 달래며 모유를 데우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둘 이상이 동시에 울면 모유를 데울 시간조차 없어 그때는 그냥 분유를 타서 주기 바빴다. 그 와중에 3시간마다 30분씩 앉아 유축을 하는 일은 나를 완전히 갈아 넣는 일 같았다. 쉬거나 잘 시간도 부족한데, 그 시간을 쪼개 유축을 해야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제 그만 단유 할까?' 고민하다가,
'아니야, 하는 데까지는 계속해보자. 지금 아니면 언제 먹여...'로 결론 나는 고민을 반복했다.
매일매일 마음의 갈등이 커져갔다.
처음에는 웬만하면 아이들에게 모유만 먹였지만, 아이들의 양이 늘어 한번에 100ml 이상씩을 먹기 시작하고, 나도 3시간마다 정확한 유축이 불가능해 분유의 비중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앞으로 아이들의 먹는 양이 늘어날수록 분유의 비중은 더 커질 터였다. 그럴수록 모유를 더 열심히 먹여야겠다는 욕심이 났다.
'그래, 하는 데까지 해보자.'
이것이 집착인지, 모성인지는 나도 모를 일이었다. 잠이 부족해 졸면서 유축을 하고, 너무 힘들어 울면서 유축을 했다. 하지만 유두가 찢어져 피가 나는 와중에도 약을 발라가며 유축을 하는 것이 단순한 집착만은 아닐 것이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