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완벽한 이과형 인간이다. 타고난 공대생 마인드를 가진 그는 정확한 수치와 정답이 나오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전형적인 무뚝뚝한 부산남자이다. 연애시절, 나는 그가 꽤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정말이지, 연애 한정 성격이었던 것을 결혼 후(특히 아이들을 낳고 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신혼 초, 집안일을 하던 내가 어쩌다 손을 다치는 일이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아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을 텐데, 남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혹시 못 들었나 싶어 더 크게 "아야!"를 외쳤다. 하지만 남편은 마치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처럼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내가 물었다.
"나 다친 거 못 들었어?"
"들었는데?"
아무렇지 않게, 남편이 대답했다.
"근데 왜 아는 척도 안 해?"
"왜 아는 척을 해야 해?"
남편이 반문했다.
"아니, 사람이 다쳤는데, 적어도 괜찮냐고는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괜찮냐고 물어보면 아픈 게 덜해져?"
남편은 말했다.
충격적이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그 일 이후로도 남편의 공감능력은 매번 처참했고, 매사 모든 일이 다 그런 식이었다. (정작 본인은 엄살이 심한 편이다) 여러 번의 반복과 싸움 끝에 남편은 이제 내가 조금만 "아야!"하고 소리치면 하던 일을 멈추고 바로 달려와 물어본다.
"괜찮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아주 기계적이고 학습적인 말이었지만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많이 발전했다.
세쌍둥이를 집으로 처음 데려 온 날, 배고프다고 동시에 우는 아이들 중 한 명에게 분유를 먹이라니 남편은 대뜸, "무서워서 못하겠어."라고 대답했다.
그럴 만도 했다. 남편은 아이들을 제대로 안아본 적이 없었다. 내가 있었던 조리원은 모자동실이 없어 남편은 조리원 기간 내내 유리너머 누워 있는 아이들을 눈으로만 봤을 뿐이었다. 남편이 아이를 안아본 건 단 한번, 대학병원 니큐에서 퇴원해 조리원 신생아실에 들어가기 전 잠시가 다였다. 그때 남편이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팔의 각도는 이상하게 휘어 경직되어 있었다. 한쪽 어깨는 비 정상적으로 솟구쳐있고 손목은 밖으로 꺾여 꼭 어딘가가 불편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이가 셋인데 못하겠다고 할 상황인가. 동시에 우는 아이 셋 모두를 나 혼자 먹일 수는 없었다. 화가 나는 마음을 누르고, 못해도 해보라고 했다. 남편의 자세는 내가 아무리 알려주어도 어색하고 이상했지만, 어쨌든 아이들을 먹였다.
어색해도 괜찮아
모유를 주로 먹는 우리 아이들은 응아만 하루에 한 명 당 6~8번을 했다. 아이들이 응아를 하면 물티슈로 큰 덩어리를 대충 닦고 안아 세면대 위에서 물로 엉덩이를 씻겼다. 세 아이를 낳고 몸이 덜 회복된 내가 하기엔 손목에 무리가 많이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그것도 못하겠다고 했다. 아이들을 떨어뜨릴 것 같아 무섭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들 응아를 씻기는 것은 전부 내 몫이 되었다.
아기 둘을 동시에 안는 것도 내 몫, 동시에 먹이는 것도 내 몫, 아이들 관련한 일 대부분을 남편은 무서워 못하겠다고 했다.
남편이 모든 걸 다 나에게 넘긴 건 아니었다. 아기들 젖병 세척과 빨래, 기저귀 버리기 등의 잡일과 집안일은 대부분 남편이 도맡아 했다. 나도 안다. 남편도 자기 나름 최선을 다 했다는 것을.
아이들과 집으로 온 후, 남편은 모든 상황을 힘들어했다.아기 한 명을 키우는 것도 힘이 드는데, 우리는 아이가 셋이었다. 남편과 나는 극한의 상황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매일매일이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남편은 본인의 피곤과 불편을 나와 아이들에게 짜증의 형태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부산 남자 특유의 친절하지 못한 말투에 덧붙여 본인의 기분을 숨김없이 나와 아이들에게 드러냈다.
남편은 아이들이 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니고, 잠이 오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우냐고 화를 냈다. 우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자신은 그 이유를 꼭 알아야겠다고 했다. 물론 이유가 있어서 아이들은 우는 것이겠지만, 어떻게 그 모든 이유를 다 알 수 있겠는가.
나도 그런 남편에게 불만이 산처럼 쌓여가고 있었다. 나도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나라고 어디서 배워 왔겠나. 거기다, 아이들을 낳느라 망가진 몸 어디 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통증을 견디며 세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남편은 아침에 산후 도우미 이모님들이 오시기 직전 방에 들어가 이모님들이 가신 후 다시 방을 나왔다. 별 다른 일이 없다면 남편은 오전과 오후 내내 잠을 잤다. 이모님들과의 대화와 인사도 모두 내 몫이었고, 모유수유를 하고 있던 나는 유축 때문에 잠을 길게 잘 수도 없었다.
이모님들이 돌아가시고 아이 셋이 다 잠이 들면 우리는 얼른 밥을 먹었다. 두 번째 셋 다 잠이 든 타이밍이 되면 남편은 날 위해 먼저 들어가 자라고 했다. 길어봐야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 안에 아이 한 명이 깨서 밥 달라고 울면 남편이 밥을 주었다. 하지만 두 명이 동시에 울면 나는 밖으로 바로 소환되었다. 누군가 토를 해도 나를 깨웠다. 누군가 응아를 해도 나를 깨웠다. 나는 낮에도 밤에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다음번 아이들이 다 자는 타이밍이 오면 남편이 방으로 들어갔다. 둘까지는 내가 먹이고(셋 동시에 깨면 남편을 불렀다), 토를 해도 내가 다 해결했고, 응아를 해도 내가 다 씻겼다. 전체적으로 남편은 나보다 잠을 훨씬 많이 잤다. 그런데도 남편은 본인이 피곤하다고 힘들다고 나에게 짜증을 냈다.
하루는 남편에게 따졌다.
"나보다 잠을 자도 네가 훨씬 많이 자면서, 너 피곤하다고 나한테 이렇게 짜증을 내는 게 정상이야? 나는 몸도 성하지 않은 사람인데, 누가 보면 네가 애 셋 다 낳고 와서 애들 혼자 다 보는 줄 알겠다?"
나의 말투도 좋을 리는 없었다. 쌓였던 화가 폭발했다.
내 말을 들은 남편은 오히려 더 화를 내며 나에게 따졌다.
"나는 피곤해하지도 말아야 돼?"
남편은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피곤해서. 나는 니 앞에서 피곤해하지도 말아야 하는데. 내가 잠도 더 많이 자서 미안하다. 잠을 안 자야지 내가."
사과를 빙자한 비꼬움에 더 화가 났다.
물론 남편도 힘들 것이다. 낮에 그렇게 잔다고는 했지만, 일이 있어 못 잘 때도 가끔 있었고, 밤낮이 바뀌는 일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니. 거기다 아이 보는 것을 나보다 유난히 더 힘들어했다. 아이 보는 일은 수학공식처럼 답이 떨어져 나오는 일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어설프고 무서웠을 것이다.
나는 목숨을 걸고 세쌍둥이를 낳았다. 임신 초부터 노산에 왜소한 몸으로, 좋은 말보다는 나쁜 말만 듣던 나였다. 다행히 아이들은 건강하게 낳았지만, 아이들을 낳고 난 후, 나의 몸은 처참할 정도로 망가지고 말았다. 내가 얼마나 아파하고 고생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남편이었다. 걷지도 못하고 혼자 앉거나 눕지고 못하던 모습들을 오롯이 다 본 사람은 남편밖에 없었다. 그런 내 몸은 아직 다 회복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뼈 마디마디가 아프고 시렸으며, 골반은 틀어질 대로 틀어져 앉아있는 것도 힘이 들었다. 그런 나에게 자기가 피곤하고 힘들다고 짜증을 그 정도로 심하게 내면 안 되는 일이었다. 남편은, 자신의 힘듦이 너무 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남편의 말을 듣고 너무 화가 났지만, 싸울 힘도 없었다. 그냥 남편과 말을 섞기가 싫었다. 이 사람과는 더 이상 못살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많이 노력한 삼둥이 아빠
2편에 계속...
*이른둥이: 미숙아, 조산아. 단어의 불편함으로 요즘에는 보통 이른둥이라고 부른다. 보통 37주 미만이나 2.5Kg 미만의 저체중아를 이른다. 우리 아이들은 34주 6일에 태어났다. 세쌍둥이는 보통 35주를 만삭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