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생활 반년차

by 김현


백수 생활이 길어지면 통장 잔고만 바닥나는 것이 아니다. 비상식량으로 쟁여둔 스팸도 바닥난다. 냉장고 어둔 김치와 계란도 바닥난다. 그뿐일까? 탁 세제도 바닥나고 창고에 쌓아둔 휴지도 바닥난다. 치약은 물론 매일 아침 하나씩 타먹던 커피 믹스마저 바닥난다. 아무런 수입 없이 하나둘 바닥나는 집안 살림을 보고 있으면, 내 자존감도 달아 닥나기 시작한다.






어떤 이유 때문에 제자리걸이든 백수는 백수다. 더 좋은 직장에 가고 싶어 자격증 공부를 하든. 내 꿈을 위해 자기 개발을 하고 있든. 뭐 아니면 그냥 노는 거든. 일을 안 하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래서 백수는 초조하다. 남들에게 "난 지금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거야" 라고 변명해도 불안하다. 백수는 백수니까.





남들은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도 알아주지 않는다.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하거나 내가 원했던 꿈을 이루지 않는 이상 내 노력을 믿지 않는다. 합격통지서를 보여주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그냥 집에서 시간이나 축내는 백수일 뿐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응원해도 백수 생활이 길어지면 의심한다. "얘가 뭘 하긴 하는 건가?"





난 이 점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남들은 내가 뭘 하지 모른다. 집에서 책을 읽든, 직장을 알아보든, 자격증 시험에 매달리든. 그들은 내가 뭘 위해 어떤 노력하는지, 어느 정도로 노력하는지 감도 못 잡는다. 하지만 종종 그들은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말한다. 마치 내가 헤매는 이유를 다 꿰뚫는 것처럼 말한다. 그리곤 사랑과 걱정이라는 채찍으로 내 살점을 찢고 도려내길 반복한다.





흔히 부모님 친구 애인은 나를 잘 안다고 말다. 하지만 내가 홀로 외롭게 싸우는 모습까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의 시야에 닿는 내 모습만 알 뿐이다. 궁극적으로, 나를 잘 아는 사람은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 나 자신의 밝은 면 어두운 면 썩은 면까지 모두 알 수 있는 존재는 나 자신이 유일하다.








백수 생활이 길어지면 기대는 실망으로 바뀐다.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 자괴감도 느낀다. 불안감도 커지고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자존감도 떨어진다. 옆에선 돌을 던지고 뒤에선 옷을 당긴다. 앞에선 걱정이라는 핑계로 채찍을 날린다.



그래? 뭐 그러라고 하지. 어차피 보여주면 그만이다. 어차피 증명하면 조용하다. 그전엔 설득 필요 없다. 굳이 이해시킬 필요도 없다. 그들은 결과가 아니면 믿지도 않는다. 그냥 난 내 갈 길을 가면 된다. 쭈굴거릴 필요도 없다. 기죽을 필요는 더더욱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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