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가 제시한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는 단순한 철학적 상상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가장 깊은 심층에서 울리는 질문이며, 인간 존재가 감당해야 할 궁극적 무게를 드러낸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되풀이된다. 자신을 긍정한 자만이 영원을 긍정할 수 있다." 이 말은 단순한 운명의 수용이 아니다. 그것은 무거운 세계를 등에 지고 웃을 수 있는, 새로운 인간(초인 : Übermensch, 超人)의 탄생을 요구한다.
영원회귀는 직선적인 시간관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일직선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니체는 이 선을 끊어버리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폐쇄적 순환(circular cycle)을 상상했다.
현대 물리학에서도 '폐쇄 우주 이론(closed universe theory)'을 통해 비슷한 가설이 등장한다. 우주의 팽창이 끝난 뒤 중력에 의해 다시 수축하고, 결국 대붕괴(Big Crunch)를 통해 또다른 대폭발(Big Bang)로 이어진다는 가설이다. 물론 이 이론은 아직 확정된 과학적 사실은 아니지만, 니체가 사유한 ‘존재의 무한 순환’에 현대 과학이 다시 다가서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니체는 이 영원회귀 사상을 통해 인간에게 가장 극단적인 질문을 던진다. "네가 지금 살아가는 이 삶을, 단 한 번이 아니라 무한히 반복해야 한다면, 너는 그것을 긍정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선악의 저편, Jenseits von Gut und Böse』(에서도 변주되어 나타난다. 그는 진정한 인간이 되려면 "운명을 사랑하라(아모르 파티 Amor Fati)"고 요구했다. 여기서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체념하거나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고통, 실패, 슬픔까지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태도를 뜻한다.
현대 과학적 시간 이해와 비교하면, 니체의 사유는 독특한 차이를 보인다. 현대 물리학은 엔트로피(entropy, 熵) 법칙에 따라 시간은 '비가역적(irreversible)'이라 본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모든 물리적 과정은 무질서 증가 방향으로 흐르며,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성을 갖는다. 그러나 니체는 이 비가역성을 거부한다. 그는 인간은 정신 차원에서 시간의 이러한 비가역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물리적 세계는 흐르더라도 인간 의식은 그것을 초월하여 반복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윤리학(ethics of existence)’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차가운 겨울 아침, 얼어붙은 손으로 따뜻한 커피를 들이켜며 바라본 해돋이. 니체에게 이 순간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이 조용한 순간조차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전제 아래 다시 본다면, 우리는 그 커피 한 모금, 그 햇살 한 줄기까지도 경이롭게 껴안을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비로소 삶은 무게를 가지며, 그 무게는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떠받친다.
또한 니체는 영원회귀를 통해 기독교적 시간관을 비판한다. 기독교는 직선적 시간관을 따른다. 시작(창조)이 있고, 끝(최후의 심판)이 있다. 그 사이를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 살아간다. 그러나 니체는 이를 '희망이라는 독(毒)'이라 부른다(『즐거운 학문, Die fröhliche Wissenschaft』). 그는 인간이 먼 미래의 구원을 바라보며 현재를 희생하는 것을 비판했다. 오히려 그는 현재의 순간, 이 찰나(Augenblick, 瞬間)을 영원처럼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간관은 동양 사상과도 흥미롭게 겹친다. 예를 들어 불교(Buddhism)의 윤회(Saṃsāra, 輪廻) 개념도 반복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니체는 윤회를 해탈(Mokṣa, 解脫)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반복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체'를 긍정한다. 이 차이는 명확하다. 불교는 반복의 사슬에서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지만, 니체는 그 사슬을 껴안고 노래하라고 요구한다.
한편, 현대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에서는 시간의 개념이 더욱 복잡해진다. 일부 해석에 따르면 시간은 고정된 흐름이 아니라 사건들 사이의 관계적 현상(relational phenomenon)일 뿐이다. 니체가 직관한 영원회귀는, 물질적 우주의 주기적 패턴(cyclic pattern)이나 다중우주론(multiverse theory)의 일부 가설과도 통한다. 니체는 철학자로서 과학자의 증거를 갖추지 않았지만, 존재의 심층에 대한 그의 직관은 과학의 언어로도 다시 해석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결국 니체의 영원회귀는 단순한 세계관이나 우주론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철학이다. 그는 인간에게 과거를 원망하거나 미래를 공상하지 말라고 말한다. 오직 이 순간, 이 호흡, 이 걸음 하나를 영원히 반복될 것처럼 사랑하라고 요구한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에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긍정의 철학자다"라고 선언했다. 그에게 영원회귀는 최종적 긍정의 철학이었다.
이 철학은 무겁다. 삶의 고통과 비극마저 껴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철학은 가볍다. 모든 순간을 긍정하는 자는 삶의 무게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작은 선택들, 소소한 일상들, 때로는 외로운 고통까지도 영원의 조각이라면, 그 조각 하나하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니체는 묻고 있다.
이제 독자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을 나는 다시 살아도 좋은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 니체가 말한 진짜 삶의 시작이다.
엘리아데의 원형 회귀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는 인간 존재가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이 단순히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영원회귀의 신화, The Myth of the Eternal Return』)에서 인간은 근원적 순간을 되살리기 위해 반복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이 반복은 과거에 대한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존재를 다시 생생하게 창조하는 '시간의 성화(聖化, sacralization)'다. 엘리아데에게 시간은 직선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신화적 행위를 통해 원형(archetype, 原型)으로 돌아가는 순환적 구조를 가진다.
그는 이 시간을 '원형회귀(原型回歸, eternal return)'라 불렀다. 원형회귀란 처음의 신성한 순간, 세계가 창조되던 신화 속 시간으로 끊임없이 돌아가려는 인간의 깊은 본능을 뜻한다. 이를테면 농경 사회의 사람들은 매년 씨를 뿌릴 때마다, 단순히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세계 창조의 신화를 다시 재현(enact)한다. 씨앗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우주가 처음 생성되던 신성한 탄생의 반복이다. 엘리아데는 "의식(ritual)은 단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 자체를 현재화하는 것이다"고 말했다(『성(聖)과 속(俗), The Sacred and the Profane』).
이러한 사고방식은 현대인의 감각과 다소 멀게 느껴질 수 있다. 현대인은 시계를 들여다보며 매일 '몇 시'를 확인하고, 과거는 지나간 것으로, 미래는 오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시간은 직선처럼, 일방향으로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 과학에서도 열역학 제2법칙을 통해 시간의 비가역성(irreversibility)이 설명된다. 모든 물리적 과정은 에너지가 균일해지는 방향으로 흐르고, 무질서(entropy)는 증가한다. 따라서 과학은 "되돌아감"이 아니라 "소멸"을 시간의 본성으로 본다.
그러나 엘리아데는 다른 차원을 본다. 그는 물리적 사건으로서의 시간 흐름이 아니라, 인간이 시간에 부여하는 의미를 주목한다. 사람은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신성한 순간을 현재에 재창조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매년 12월 25일에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자에게는 바로 그날, '신이 인간으로 온 사건'이 다시 현재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 순간, 시간은 단순한 직선이 아니라 '성화된 반복'이 된다.
엘리아데는 또한 원형회귀를 통해 인간이 "역사의 무게"를 가볍게 한다고 보았다. 현대인은 역사적 사건들에 눌려 살아간다. 전쟁, 실패, 고난,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짓누른다. 그러나 원시인이나 전통 사회의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사건마저도 신화 속 반복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만약 한 공동체가 기근을 겪었다면, 그것은 우주의 리듬 속 하나의 주기로 이해되었고, 곧 신성한 질서를 회복하는 의식이 뒤따랐다. 엘리아데는 "신화적 사고는 세계를 항상 회복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고 말했다(『영원회귀의 신화』, ).
이러한 원형회귀적 시간관은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의 일부 해석과도 은밀한 친연성을 가진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사건의 선후관계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이 밝혀졌다. 시간은 절대적 배경이 아니라, 상대적인 네트워크(relational network) 속에 존재한다. 엘리아데의 시간관은 과학적 시간 이론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지만, '시간이 고정된 흐름이 아니다'라는 점에서는 현대 과학과도 숨은 대화를 이룬다.
엘리아데는 또 하나 중요한 주장을 한다. 신화 속 원형은 인간을 존재론적 공포에서 구원한다는 것이다. 직선적 시간 속 인간은 종말, 죽음, 소멸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맞닥뜨린다. 그러나 원형회귀적 시간 속 인간은 죽음마저도 "다시 돌아오는 생명"의 일부로 본다. 예를 들어, 겨울의 죽음은 봄의 부활을 예비한다. 장례 의식도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다시 돌아올' 생명의 사이클 안에 위치한다.
일상적 예를 들어 보자. 매년 벚꽃이 지고, 다시 피어난다. 벚꽃이 떨어질 때 우리는 아쉬움을 느끼지만, 그 아쉬움 속에는 '내년에도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이 깃들어 있다. 이 희망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재생(recreation)한다는 원형적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엘리아데는 서양의 근대성(modernity)이 이 원형적 감각을 잃어버렸다고 진단한다. 그는 『역사와 영원, History and Eternity)』에서 "근대인은 최초의 시간, 최초의 세계와의 연결을 상실했으며, 그로 인해 무의미와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한다. 역사가 직선이 되어버리면, 인간은 과거를 지탱할 힘 없이 미래를 향해 쫓기게 된다. 그리고 이 쫓김은 존재 자체의 뿌리를 흔든다.
결국 엘리아데의 원형회귀 시간관은 단순한 과거 지향적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를 신성화하고, 세계를 회복하며, 인간을 구원하려는 심오한 의지다. 그는 과거를 단순히 이상화하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과거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현재 속에서 신화적 순간을 다시 살아내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성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묻는다. "내 삶의 어느 순간을, 나는 신화로 다시 살릴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다시 원형회귀의 문턱에 선다.
니체와 엘리아데의 차이점과 공통점
니체와 엘리아데는 전혀 다른 시대와 문맥에서 글을 썼지만, 두 사람 모두 '현대 인간'이 직면한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통찰했다. 그것은 바로 '시간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였다. 니체는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를 통해, 엘리아데는 원형회귀(Archetypal Return)를 통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현대인을 일깨우려 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살아야 한다면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에게 극한의 긍정을 요구했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이 아니라, 이 순간이 무한히 반복될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행동을 영원 앞에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단순한 도덕을 넘어선다. 니체가 요구하는 윤리는 '가장 사소한 행위조차 우주의 심장에 새겨진다는 자각'이다.
예를 들어보자. 퇴근길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순간, 우리는 단지 예의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니체에 따르면, 그 순간은 영원히 반복된다. 다시 말해, 나의 친절, 나의 무관심, 나의 조그만 악의조차 무한히 되풀이될 것이다. 이런 인식은 인간 존재를 근본부터 긴장하게 만든다. 단 한 번의 순간도 가볍게 넘길 수 없게 된다. 삶은 무거워지지만, 그 무게 속에서 삶은 비로소 빛난다.
현대 과학은 우리가 먼지와 같다고 말한다. 빅뱅(Big Bang)에서 태어난 별먼지로 구성된 존재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니체는 이 미미한 존재가 우주의 반복적 심장에서 무한히 살아진다고 외친다. 현대의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에서도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다. 시간은 휘어지고, 서로 얽히며, 절대적 흐름을 가지지 않는다. 니체는 과학을 넘어, 존재의 깊은 곳에서 '지금 이 순간'을 영원의 눈으로 보라고 요구한다.
반면 엘리아데는 『영원회귀의 신화』에서 '원형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현대인이 역사의 직선 위에서 목적 없이 표류하고 있다고 보았다. 산업혁명, 과학기술, 세속화가 인간으로 하여금 신화적 반복의 리듬을 잃게 만들었다. 엘리아데가 요청하는 윤리는 '무언가가 처음 시작되던 신화 속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능력'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통해, 인간은 다시 근원의 신성함을 살아내야 한다.
이를테면 생일 파티를 예로 들 수 있다. 현대인은 생일을 단순히 나이를 더하는 날로 여긴다. 그러나 엘리아데 식으로 보면, 생일은 단순한 통과 의례가 아니다. 생일은 '처음의 탄생'을 다시 새롭게 여는 의식이다. 매년 우리는 과거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다시 태어나는 신성한 순간을 다시 느낀다. 이렇게 살 때, 시간은 죽어 있는 숫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순간이 된다.
니체와 엘리아데 모두,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은 '시간에 대한 경외심'이라고 본다.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쪼개고, 생산성과 효율만을 중시하는 현대인은 '지금'을 '다음'을 위한 발판으로만 쓴다. 니체는 이에 대해 "목표 없는 행위가 진정한 예술이다"고 말했다(『즐거운 학문, Die fröhliche Wissenschaft』). 그는 우리에게 목적 없이도 순간을 긍정하는 용기를 요구했다.
엘리아데 역시 『성(聖)과 속(俗)』에서 "신성은 반복을 통해 현재화된다"고 강조한다. 그의 윤리는 새로움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 속에서 숨겨진 신비를 발견하는 데 있다. 오늘 아침 먹은 밥 한 그릇, 문을 열고 나간 순간의 공기, 작은 인사. 이런 반복을 통해 인간은 세계와 다시 연결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은 현대과학이 시간의 비선형성(non-linearity)을 받아들이는 흐름과도 맞닿는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 현상처럼 시간과 공간의 고정적 구분이 무너지는 현상을 설명한다.
시간은 절대적 흐름이 아니라 사건과 사건 사이의 관계로 재구성된다. 니체와 엘리아데 모두, 이 흐름을 인간적 차원에서 먼저 직감했다.
이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나의 하루를 다시 살아도 좋은가?" "나는 이 반복 속에서 신성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가?" 니체는 대답한다. "너는 네 삶을 사랑해야 한다." 엘리아데는 답한다. "너는 네 삶을 신화로 살아야 한다."
결국 니체가 요청하는 윤리는 절대 긍정이다. 지금 여기의 고통과 기쁨을 모두 껴안고, 이것이 영원히 반복될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반면 엘리아데가 요청하는 윤리는 원형의 기억이다. 반복 속에 숨어 있는 신성함을 되살리고, 존재의 근원을 현재 속에 호흡하는 것이다.
둘의 요청은 다르지만, 근본에서는 같다. 그것은 '삶을 가볍게 소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은 단지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기계가 아니라,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다. 그것이 니체와 엘리아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윤리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각자의 선택이다. 영원히 반복될 삶을,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매일 돌아오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다시 태어나게 할 것인가?
삶은 다시 돌아온다. 그러니 삶을 두 번 살 것처럼 살아야 한다.
니체(Friedrich Nietzsche)와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윤리사상을 통합
오늘날 우리는 매일 같은 길을 걷고, 같은 화면을 들여다보며,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러나 그 반복 속에 무언가 빠져 있다. 니체와 엘리아데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지만, 둘 다 이 빠진 부분을 꿰뚫어 보았다. 니체는 삶의 무게를 긍정하라고 했고, 엘리아데는 반복 속에 신성을 복원하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 둘을 하나로 엮어야 한다. 현대인의 삶을 위한 새로운 철학은, 이 두 개의 목소리를 하나의 화음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새로운 삶의 철학은 "영원의 순간"을 살아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니체의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는 모든 순간을 무한히 반복될 운명으로 긍정하라고 말한다. 엘리아데의 원형회귀(Archetypal Return)는 반복 속에 최초의 신성함을 불러내라고 말한다. 둘 다 시간을 수단으로 보지 않는다. 시간은 소비해야 할 자원이 아니라, 다시 살아내야 할 영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하루를, 단지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우주로 대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우리는 종종 '해야 할 일'을 떠올린다. 그러나 새로운 철학에서는 다르게 시작해야 한다. "오늘 하루는 단 한 번뿐인 듯 살아야 하지만, 실은 영원히 반복될 무거운 순간임을 껴안아야 한다." 동시에 이 순간은 원형적 탄생의 반복임을 자각해야 한다. 커피를 마시는 손길, 거리를 걷는 발자국, 누군가에게 건네는 인사. 이 모두가, 단지 기능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의식(ritual)이어야 한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에서 "나는 나를 긍정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 긍정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다. 실패와 고통마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절대 긍정이다. 엘리아데는 『성(聖)과 속(俗)』에서 "세계는 반복을 통해 다시 신성해진다"고 말한다. 이 둘을 하나로 묶으면, 우리의 새로운 윤리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모든 순간을 긍정하고, 모든 반복을 성화하며, 존재를 잃지 않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현대과학은 시간의 직선성을 해체하고 있다. 우주는 팽창하고 수축하며, 사건은 서로 얽히고, 과거와 미래의 경계는 흐려진다.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에서는 입자가 동시에 여러 상태를 가질 수 있다. 시간은 더 이상 단순한 흐름이 아니다. 니체와 엘리아데는 이 과학적 변화를 앞서 직감했다. 그러므로 새로운 철학은 과학과 신화를 대립시키지 않고, 둘을 함께 호흡하게 한다.
이 철학은 또한 인간 존재의 깊이를 회복한다. 현대 사회는 우리를 기능하는 기계로 만든다. 일은 성과로 환산되고, 관계는 효율로 평가된다. 그러나 새로운 삶의 윤리는 다르게 말한다. "너는 다시 태어난 신이다. 너의 하루는 한 번뿐인 우주다." 이 관점에서 보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지루한 루틴이 아니라, 세계의 재창조이다.
예를 들어보자. 갓난아이가 넘어지며 울 때,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철학에서는 그 순간을 다르게 본다. 아이는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있고, 그것은 '처음의 힘'을 다시 체현하는 행위다. 우리는 그 순간을 응시하며, 다시 태어나는 세계를 목격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사소한 장면 속에 우주의 맥박이 숨 쉬고 있다.
니체는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엘리아데는 인간이 신화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 둘을 통합하면, 새로운 인간상은 이렇게 그려진다. "스스로 창조하고, 스스로 신성화하는 인간." 그는 외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반복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 삶의 철학은 또 하나의 윤리를 요구한다. 그것은 깨어 있음(vigilance, 覺醒) 이다.
깨어 있음은 계속 생각하고 계속 묻는 것이다.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시간을 소비할 뿐이다. 그러나 깨어 있으면, 우리는 시간을 살아낼 수 있다. 현대인은 정보를 넘치게 받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는 거의 깨어 있지 않다. 새로운 철학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진짜로 살아 있는가?"
또한 이 철학은 타자(the Other)를 향한 새로운 관계를 요구한다. 니체가 강조한 '힘의 의지(Wille zur Macht)'는 자기 완성과 연결된다. 엘리아데가 말한 신화적 공동체는 모두가 함께 신성을 살아낸다. 따라서 새로운 삶은 고립이 아니라 연대(solidarity, 連帶) 속에서 완성된다. 타인은 단순히 나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함께 세계를 반복해 살아내는 동반자다.
서정적으로 말하면, 매일 아침 우리는 무너진 세계 위에 다시 햇살을 세운다. 매일 저녁 우리는 무너진 하루를 조용히 품고 별을 맞는다. 이 반복이야말로, 인간이 우주 속에서 가지는 가장 아름다운 권리이며 책임이다.
결론적으로, 니체와 엘리아데의 윤리사상을 통합한 현대적 삶의 철학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모든 순간을 영원의 무게로 긍정하라. 모든 반복을 세계의 재창조로 받아들여라. 스스로 신이 되어, 매일 세계를 다시 태어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