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화는 그리스 자연철학의 맥락 안에서 물리적 세계와 형이상학적 세계의 근본적인 차이를 제시하는 심도 깊은 논의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용되는 언어 중 일부는 상당한 전문성을 띠는데, 예를 들어 6절과 7절에서 언급되는 ‘떠도는 천구들(errant spheres)’은 행성들을 운반하는 천상의 구체를 의미하며, ‘떠돌지 않는 천구(inerrant sphere)’는 항성들의 하늘을 가리킵니다. 또한 그리스 사유 체계에서 ‘공기(air)’와 ‘영(spirit)’은 상호 교환 가능한 개념으로 사용되며, ‘선(the Good)’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도덕적 선함을 넘어, 모든 존재에게 있어 필연적으로 추구해야 할 궁극적 목표라는 함의를 지니고 있음을 염두에 두는 것이 이 글을 이해하는 데 유용할 것입니다.
1. 헤르메스: 아스클레피오스여, 움직이는 모든 것은 어떤 것 안에서, 그리고 어떤 것에 의해 움직이지 않겠는가?
아스클레피오스: 물론입니다.
헤르메스: 그리고 그것이 움직이는 공간은 움직이는 것보다 더 커야 하지 않겠는가?
아스클레피오스: 그러해야만 합니다.
헤르메스: 또한, 움직이게 하는 자는 움직이는 자보다 더 큰 힘을 가지지 않겠는가?
아스클레피오스: 당연히 그렇습니다.
헤르메스: 더 나아가, 그것이 움직이는 공간의 본질은 움직이는 것의 본질과 자못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아스클레피오스: 완전히 달라야만 합니다.
2. 헤르메스: 다시 묻노니, 이 코스모스(cosmos)는 그보다 더 큰 육체가 존재하지 않을 만큼 광대하지 않은가?
아스클레피오스: 물론입니다.
헤르메스: 그리고 또한 거대하지 않은가? 그것은 수많은 다른 거대한 구조물들로, 아니 오히려 존재하는 모든 다른 육체들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아스클레피오스: 그렇습니다.
헤르메스: 그러면서도 코스모스는 하나의 육체인가?
아스클레피오스: 육체입니다.
헤르메스: 그리고 움직이는 존재인가?
3. 아스클레피오스: 물론입니다.
헤르메스: 그렇다면 그것이 움직이는 공간은 얼마나 커야 하며, 그 본질은 어떠해야 하는가? 움직이는 것이 공간 부족으로 비좁아져 그 운동을 잃지 않도록, 그 지속적인 운행을 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코스모스보다 훨씬 더 광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스클레피오스: 세 번 위대하신 분이시여, 그것은 실로 엄청나게 광대한 그 무엇이어야만 합니다.
4. 헤르메스: 그리고 그 본질은 어떠하겠는가? 아스클레피오스여, 바로 그 반대의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육체에 반대되는 것은 비물질적인 것(bodiless)이 아닌가?
아스클레피오스: 동의합니다.
헤르메스: 그렇다면 공간은 비물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비물질적인 것은 신과 같은 어떤 것이거나, 혹은 신(God) 그 자신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내가 ‘신과 같은 어떤 것’이라 함은 생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성될 수 없는 것(ingenerable)을 의미한다.
5. 그러므로 만약 공간이 신과 같은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실체적(substantial)이다. 그러나 그것이 신 그 자신이라면, 그것은 실체를 초월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과는 다르게, 그리고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사유되어야 한다. 신은 먼저 우리에게 ‘사유될 수 있는 것(thinkable)’ 혹은 ‘지성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intelligible)’이지만, 그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다. 이는 사유되는 대상이 사유하는 자의 감각 아래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은 그 자신에 의해 사유될 수 없으니, 그는 스스로를 그가 사유하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유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는 ‘다른 어떤 것’이므로, 우리에 의해 사유되신다.
6. 그러므로 만일 공간이 사유되어야 한다면, 신으로서가 아니라 공간으로서 사유되어야 한다. 만일 신 또한 사유되어야 한다면,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공간을 담을 수 있는 에너지(energy)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움직이는 모든 것은 움직이는 것 안에서가 아니라 정지한 것(stable) 안에서 움직인다. 그리고 다른 것을 움직이는 자는 물론 정지해 있으니, 그것이 함께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스클레피오스: 세 번 위대하신 분이시여, 그렇다면 어찌하여 이곳 아래의 것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는 것들과 함께 움직입니까? 당신께서는 떠도는 천구들이 떠돌지 않는 천구에 의해 움직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헤르메스: 오, 아스클레피오스여, 그것은 함께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맞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들은 서로 함께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맞서 움직인다. 바로 이 반대성(contrariety)이 그들 운동의 저항을 정지로 바꾸어 놓는다. 그 저항이야말로 운동의 정지이기 때문이다.
7. 그러므로 떠도는 천구들도 떠돌지 않는 천구에 반대로 움직이기에, 상호적인 반대성에 의해 서로 움직이며, 또한 정지한 것에 의해서도 바로 그 반대성 자체를 통해 움직인다. 그리고 이는 달리 될 수가 없다. 저 위에 있는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는 뜨지도 지지도 않는데, 너는 그것들이 쉬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가?
아스클레피오스: 그것들은 움직입니다, 세 번 위대하신 분이시여.
헤르메스: 그리고 그들의 운동은 어떠한가, 나의 아스클레피오스여?
아스클레피오스: 영원히 같은 것 주위를 도는 운동입니다.
헤르메스: 그러나 회전, 즉 같은 것 주위의 운동은 정지에 의해 고정된다. ‘같은-것-주위’는 ‘같은-것-너머’를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같은-것-너머’가 멈추고, ‘같은-것-주위’ 안에서 안정된다면, 그 반대되는 것은 그 반대성에 의해 영원히 안정되어 굳건히 서게 된다.
8. 이에 대해 내가 여기 땅 위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예를 들어주겠다. 여기 아래 동물들을 보아라. 예를 들어 헤엄치는 사람을! 물은 움직이지만, 그의 손과 발의 저항이 그에게 안정성을 주어, 그는 물과 함께 휩쓸려 가지도 가라앉지도 않는다.
아스클레피오스: 세 번 위대하신 분이시여, 당신께서는 참으로 명확한 예를 드셨습니다.
헤르메스: 그러므로 모든 운동은 정지 안에서, 그리고 정지에 의해 야기된다. 따라서 코스모스의 운동(그리고 모든 다른 물질적(hylic) 동물의 운동)은 코스모스 외부의 것들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향하는 내부의 것들, 즉 영혼(soul)이나 영(spirit), 혹은 그와 같은 다른 비물질적인 어떤 것에 의해 야기될 것이다.
9. 그 안에 있는 살아있는 것을 움직이는 것은 육체가 아니다. 아니, 우주의 전체 육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생명이 없다면 더 작은 육체조차 움직이지 못한다.
아스클레피오스: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세 번 위대하신 분이시여? 그렇다면 나무토막이나 돌, 그리고 다른 모든 무생물들을 움직이는 것은 육체들이 아닙니까?
헤르메스: 결코 그렇지 않다, 오 아스클레피오스여. 육체-안의-어떤-것, 즉 무생물을 움직이는-그것은 분명 육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들어 올리는 자의 육체와 들어 올려지는 것의 육체, 그 둘 모두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 없는 것은 생명 없는 것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다른 것을 움직이는-그것은 움직이는 자이기에 생명이 있는 것이다. 너는 그러므로 영혼이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지 보는가, 그것은 홀로 두 개의 육체를 들어 올린다. 더욱이, 움직이는 것들은 어떤 것 안에서 움직일 뿐만 아니라 어떤 것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것은 명백하다.
10. 아스클레피오스: 예, 오 세 번 위대하신 분이시여, 움직이는 것들은 필히 비어 있는(void) 어떤 것 안에서 움직여야 합니다.
헤르메스: 네 말이 옳다, 오 나의 아스클레피오스여! 존재하는 것들 중에는 비어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있지-않은-것(is-not)’만이 비어 있으며, 실재(subsistence)와는 이질적이다. 실재하는 것은 결코 비어 있는 것으로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스클레피오스: 그렇다면, 오 세 번 위대하신 분이시여, 예를 들어 빈 통, 빈 항아리, 잔과 통, 그리고 그와 같은 다른 것들은 존재하지 않습니까?
헤르메스: 아아, 아스클레피오스여, 너의 생각이 진리에서 멀리 벗어났구나! 너는 가장 가득 차고 가장 충만한 것들이 비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11. 아스클레피오스: 무슨 의미이십니까, 세 번 위대하신 분이시여?
헤르메스: 공기는 육체가 아닌가?
아스클레피오스: 육체입니다.
헤르메스: 그리고 이 육체는 만물에 스며들어 그것들을 채우지 않는가? 그리고 ‘육체’는 ‘네 가지(four)’ 원소들의 혼합으로 이루어지지 않는가? 그러므로 네가 비어 있다고 부르는 모든 것은 공기로 가득 차 있으며, 공기로 가득 차 있다면 네 가지 원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의 역(逆) 또한 성립하니, 네가 가득 찼다고 부르는 모든 것은 공기에 대해서는 비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공간은 다른 육체들로 채워져 있어, 공기를 그 안에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비어 있다고 말하는 이것들은 비어 있다(void)고 불릴 것이 아니라, 속이 비었다(hollow)고 이름 붙여져야 한다. 그것들은 존재할 뿐만 아니라, 공기와 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12. 아스클레피오스: 세 번 위대하신 분이시여, 당신의 논증(logos)은 반박할 수 없습니다. 공기는 육체입니다. 더 나아가, 만물에 스며들어 그것들을 채우는 것은 바로 이 육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만물이 움직이는 그 공간을 무엇이라 불러야 합니까?
헤르메스: 비물질적인 것(The bodiless)이라 불러야 한다, 아스클레피오스여.
아스클레피오스: 그렇다면, 비물질적인 것이란 무엇입니까?
헤르메스: 그것은 마음(Mind)과 이성(Reason, logos)이니, 전체로부터 나온 전체이며, 모든 것을 스스로 감싸고, 모든 육체로부터 자유로우며, 모든 오류로부터 자유롭고, 육체에 감지되지 않으며 만질 수도 없고, 스스로 안에 머물며, 존재하는 것들을 보존하는 자이다. 비유하자면 그의 광선들은 선(Good), 진리(Truth), 빛을 넘어선 빛(Light beyond light)이며, 영혼의 원형(Archetype of soul)이다.
아스클레피오스: 그렇다면, 신(God)은 무엇입니까?
13. 헤르메스: 그는 이들 중 어느 것도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 그 전체와 각각, 그리고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그는 있지-않은-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으셨다. 모든 것은 있는-것들로부터 왔으며, 있지-않은-것들로부터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있지-않은-것들은 본래 어떤 것이 될 힘을 전혀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있을-수-없음의 힘을 본래적으로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으로, 있는-것들은 언젠가 있지-않게 될 본성을 가지지 않는다.
14. 아스클레피오스: 그렇다면 당신은 신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헤르메스: 그러므로 신은 마음이 아니라 마음이 있게 하는 원인(Cause)이며, 신은 영이 아니라 영이 있게 하는 원인이며, 신은 빛이 아니라 빛이 있게 하는 원인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을 두 가지 이름, 즉 선(Good)과 아버지(Father)로 존경해야 하니, 이 이름들은 오직 그에게만 속하며 다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소위 다른 신들이라 불리는 자들이나, 인간이나, 다이몬(daimones)들 중 누구도 어떤 정도로든 선할 수 없으며, 오직 신만이 선하다. 그는 오직 선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나머지 것들은 모두 선의 본질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
15. 나머지 모든 것들은 영혼과 육체이며, 선을 담을 수 있는 장소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의 위대함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즉 육체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감각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 모두의 존재만큼이나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것도 선이라 부르지 말라, 그러면 너는 불경해질 것이다. 또한 어느 때라도 신을 선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부르지 말라, 그러면 너는 다시 불경해질 것이다.
16. 그러므로 선은 모든 이에 의해 이야기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든 이에게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은 모든 이에게 이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들과 일부 인간들에게 그들은 무지 때문에 선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지만, 그들은 결코 선이 될 수도 없고 선이 되지도 못한다. 그들은 신과 매우 다르며, 반면 선은 결코 신으로부터 구별될 수 없으니, 이는 신이 선과 같기 때문이다. 나머지 불멸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이름으로 존경받고 신들로 불리지만, 신은 예의상으로가 아니라 본성적으로 선하다. 신의 본성과 선의 본성은 하나이며, 둘의 종류는 하나이고, 그로부터 다른 모든 종류가 나온다. 선은 모든 것을 주고 아무것도 받지 않는 자이다. 그러므로 신은 모든 것을 주고 아무것도 받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신은 선이며, 선은 신이다.
17. 신의 다른 이름은 아버지이니, 이는 그가 만물을-만드시는-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역할은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생각하는 자들에게 자녀를 낳는 것은 삶에서 매우 위대하고 가장 경건한 일이며, 지상에서 자녀 없이 삶을 떠나는 것은 매우 큰 불행이자 불경이다. 그리고 자녀가 없는 자는 죽음 후에 다이몬들에게 벌을 받는다. 그리고 그 벌은 이것이니, 곧 자녀가 없는 그 사람의 영혼은 남자의 본성도 여자의 본성도 없는 육체, 태양 아래 저주받은 존재로 선고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스클레피오스여, 자녀 없는 사람에게 동정심을 갖지 말고, 오히려 그의 불행을 가엾게 여기며 그에게 어떤 벌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라.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이 너에게, 아스클레피오스여, 만물의 본질에 대한 그노시스(gnosis)의 입문이 되기를.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주해
1. 운동의 제1원리: 움직이는 자와 움직여지는 자
「포이만드레스」가 우주 창조의 과정을 신화적이고 계시적인 언어로 노래했다면, 두 번째 논고인 「아스클레피오스에게」는 마치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처럼, 엄격하고 논리적인 철학적 문답을 통해 신과 세계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이 논고의 첫 부분에서, 헤르메스는 그의 제자 아스클레피오스를 이끌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운동(motion)’이라는 현상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그는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비물질적이고 부동(不動)하는 제1원리의 존재를 논증합니다. 이 논증의 구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특히 그의 유명한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 개념과 놀라울 정도로 깊은 유사성을 보이며, 헤르메스주의가 당대의 가장 심오한 철학적 사유와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헤르메스의 논증은 명료하고 단순한 공리(axiom)에서 출발합니다. “움직이는 모든 것은 어떤 것 안에서, 그리고 어떤 것에 의해 움직이지 않겠는가?” 이것은 움직임이라는 현상이 성립하기 위한 세 가지 필수 요소를 제시합니다. 즉, (1) 움직이는 대상(the moved), (2)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원인(the mover), 그리고 (3) 그 운동이 일어나는 장소(the space/container)입니다. 헤르메스는 이 세 요소 사이의 필연적인 관계를 차례로 밝혀나갑니다. 첫째, 운동이 일어나기 위한 공간은 그 안에서 움직이는 대상보다 “더 커야” 합니다. 둘째, 대상을 움직이는 원인은 그 대상보다 “더 큰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가장 핵심적인 원리를 제시합니다. “그것이 움직이는 공간의 본질은 움직이는 것의 본질과 자못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반대성의 원리’는 플라톤주의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감각계(sensible world)와 지성계(intelligible world)의 구분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제 헤르메스는 이 원리를 우주 전체에 적용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 거대한 코스모스(Cosmos)는 그 자체로 움직이는 하나의 거대한 ‘육체(body)’입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육체가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공간’은 어떤 본질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논리의 필연적인 귀결은, 그 공간이 코스모스보다 훨씬 더 광대해야 하며, 육체와는 정반대의 본질, 즉 ‘비물질적인 것(bodiless)’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물질적 공간’이야말로 모든 물질적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장(場)입니다. 헤르메스는 이 비물질적인 것이 “신과 같은 어떤 것이거나, 혹은 신 그 자신임에 틀림없다”고 말하며, 그것이 모든 생성된 것들을 넘어선, ‘생성될 수 없는(ingenerable)’ 근원적 실체임을 암시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운동의 또 다른 원인인 ‘움직이는 자(mover)’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헤르메스는 “다른 것을 움직이는 자는 물론 정지해 있으니, 그것이 함께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단언합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제시한 논증의 핵심입니다. 만일 모든 움직임의 첫 번째 원인 또한 움직인다면, 우리는 그 원인의 원인을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무한 소급의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모든 운동의 궁극적인 제1원인은,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부동의 동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헤르메스는 순수한 논리적 추론을 통해, 눈에 보이는 모든 운동의 배후에는 보이지 않고, 물질이 아니며, 움직이지 않는 하나의 초월적 원인이 존재해야 함을 증명합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행성들의 복잡한 운동을 예로 들어 반문할 때, 헤르메스는 그들의 운동이 ‘함께’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지한 하늘(inerrant sphere)에 ‘맞서’ 움직이는 것이며, 바로 이 “반대성이 그들 운동의 저항을 정지로 바꾸어 놓는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모든 운동이 궁극적으로 ‘정지 안에서, 그리고 정지에 의해’ 야기된다는 그의 대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에게」의 서두는 헤르메스주의가 단순히 신비로운 계시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가장 정교한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자신의 신관(神觀)을 정립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논증을 통해 제시된 신은,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물질이 아니며, 볼 수 없는 초월적 존재로서, 모든 움직임과 생성의 근원이 됩니다. 그는 모든 것을 품는 ‘공간’이자, 모든 것을 움직이는 ‘힘’이며, 자신은 영원한 ‘정지’ 속에 머무는 역설적인 존재입니다. 이 ‘부동의 동자’에 대한 철학적 이해는, 이후에 전개될 신의 창조와 섭리, 그리고 인간 영혼의 궁극적인 귀환에 대한 모든 논의의 가장 단단한 형이상학적 토대가 됩니다.
2. 비어있음(Void)의 부정: 공간과 비물질적인 것의 본질
헤르메스와 아스클레피오스의 대화는 이제 우주론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 중 하나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바로 ‘비어있음’, 즉 진공(void, kenos)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이 문제는 원자론자들과 연속체론자들 사이의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원자론자들은 원자들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비어있는 공간’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is-not)’이 존재한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므로 진정한 의미의 진공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헤르메스는 이 논쟁에서 후자의 입장을 명확히 취하며, ‘비어있음’이라는 감각적 착각을 논파하고, 그것을 통해 세계를 담는 진정한 ‘공간’의 본질이 신성한 마음(Nous) 그 자체임을 드러내는 장엄한 논증을 펼칩니다.
공허라는 이름의 착각: 감각의 논박
논증은 아스클레피오스의 소박하고도 상식적인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움직이는 것들이 “필히 비어 있는 어떤 것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고 추론합니다. 이는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에 부합하는 당연한 생각처럼 보입니다. 그는 “빈 통, 빈 항아리”와 같은 구체적인 예를 들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그러나 헤르메스는 이 상식적인 관찰이야말로 진리를 가리는 가장 큰 장막임을 보여주기 위해, 대화를 더 깊은 차원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는 “너는 가장 가득 차고 가장 충만한 것들이 비어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반문하며, 아스클레피오스가 ‘비어 있다’고 생각하는 그 공간이 실제로는 ‘공기(air)’라는 미묘한 육체로 가득 차 있음을 지적합니다.
헤르메스의 논리는 명쾌합니다. 공기는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진 명백한 ‘육체’이며, 이 육체는 “만물에 스며들어 그것들을 채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어 있다’고 말하는 용기는 실제로는 공기로 가득 찬 것이며, 반대로 물이나 다른 물질로 ‘가득 찼다’고 말하는 용기야말로 ‘공기에 대해서는 비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부정확성을 지적하며, 그러한 용기들은 ‘비어 있다(void, kenos)’고 불릴 것이 아니라, 단지 ‘속이 비었다(hollow, koilos)’고 불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논증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에 대한 설명을 넘어, 심오한 심리적, 영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현대인이 종종 느끼는 내면의 ‘공허함’이나 ‘의미 없음’ 또한 이와 같은 감각적 착각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결코 진정으로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 그리고 영적인 기운, 즉 “공기와 영”으로 항상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공허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내용물들을 알아차릴 만큼 의식이 섬세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적 치유의 첫걸음은, 존재하지 않는 충만함을 외부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가득 차 있는 내용물들을 정직하게 인식하고 그것들과 관계 맺는 것입니다.
진정한 공간: ‘비물질적인 것’의 본질
‘비어있음’이라는 개념을 성공적으로 논파한 헤르메스는, 이제 모든 물질적 우주를 담고 있는 진정한 공간의 본질을 밝힙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우리는 만물이 움직이는 그 공간을 무엇이라 불러야 합니까?”라고 묻자, 헤르메스는 그것을 ‘비물질적인 것(The bodiless, to asomaton)’이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비물질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헤르메스주의 신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장엄한 정의를 내립니다.
“그것은 마음(Mind)과 이성(Reason, logos)이니, 전체로부터 나온 전체이며, 모든 것을 스스로 감싸고, 모든 육체로부터 자유로우며, 모든 오류로부터 자유롭고, 육체에 감지되지 않으며 만질 수도 없고, 스스로 안에 머물며, 존재하는 것들을 보존하는 자이다.”
이것은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뒤집는 선언입니다. 세계를 담고 있는 궁극적인 실체는 텅 빈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살아있고, 지성을 갖추었으며, 모든 것을 포용하는 ‘신성한 마음’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우주는 텅 빈 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의식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신성한 마음은 형체가 없기에 우리의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지만, 그것은 모든 형체 있는 것들을 존재하게 하고 유지시키는 근원적인 장(場)이자 힘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많은 영지주의 체계에서 나타나는 ‘케노마(Kenoma)’, 즉 신적인 충만(Pleroma)의 바깥에 존재하는 결핍과 공허의 영역이라는 개념과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영지주의에서 물질세계는 종종 이 케노마 속에 던져진 감옥으로 묘사되지만, 헤르메스주의에서 우주는 신성한 마음이라는 플레로마 안에 온전히 품겨 있는, 긍정적이고 신적인 창조물입니다. 이는 세계를 긍정하고 그 안에서 신성을 발견하려는 헤르메스주의의 근본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헤르메스는 ‘비어있음’의 부정을 통해 ‘존재의 충만함’을 역설합니다. 그의 우주에는 어떤 우연한 빈틈이나 의미 없는 공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우주의 모든 것은 신성한 마음과 이성(로고스)이라는 충만한 실체 안에 깃들어 있으며, 그것에 의해 살아 숨 쉽니다. 이처럼 모든 존재가 살아있는 신성한 의식 안에 존재한다는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더 이상 차가운 물질의 집합이 아닌, 따뜻하고 의미 있는 신의 살아있는 몸으로 느끼게 하는, 헤르메스주의 구원론의 가장 중요한 첫걸음입니다.
3. 아버지와 선(善): 신의 이중적 본성과 부정신학
모든 신비주의 철학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근원적인 난관에 부딪힙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유한한 언어로 무한하고 형언할 수 없는 신의 본질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모든 개념과 단어는 경험 세계의 산물이기에, 경험 세계를 초월하는 존재를 기술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 앞에서 고대의 현자들은 두 가지 주요한 길을 택했습니다. 하나는 신이 ‘무엇이다’라고 긍정적으로 규정하는 ‘긍정의 길(via positiva)’이며, 다른 하나는 신이 ‘무엇이 아니다’라고 부정함으로써 그 본질에 역으로 접근하는 ‘부정의 길(via negativa)’, 즉 부정신학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에게」의 후반부에서, 헤르메스는 이 두 가지 길을 능숙하게 넘나들며, 신의 본질에 대한 가장 심오한 가르침을 펼쳐 보입니다.
부정(不定)의 길: 마음과 빛을 넘어서
헤르메스는 신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기에 앞서, 먼저 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명확히 하는 부정의 길을 택합니다. 그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신이란 “마음이 아니라 마음이 있게 하는 원인이며, 영이 아니라 영이 있게 하는 원인이며, 빛이 아니라 빛이 있게 하는 원인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부정신학의 전형적인 예시이며, 매우 중요한 철학적 기능을 수행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신을 생각할 때, 우리가 아는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개념들을 신에게 투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을 ‘최고의 마음’, ‘궁극의 빛’, ‘순수한 영’이라고 부르며 찬양합니다. 그러나 헤르메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신과 신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을 혼동하는 우상숭배의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마음, 영, 빛이 아무리 숭고할지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신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결과물’입니다. 모든 결과물의 ‘원인’이신 신은 필연적으로 그 결과물들을 넘어서는 존재여야 합니다. 이처럼 헤르메스는 ‘아니다’라는 부정을 통해, 우리가 신에게 덧씌우려는 모든 유한한 개념의 껍질을 벗겨내고, 신의 절대적인 초월성을 확보합니다. 그는 어떤 개념으로도 포획될 수 없는, 모든 정의 너머에 계신 분입니다.
첫 번째 이름: 선(善)
모든 인간적 개념을 비워낸 이 깨끗한 침묵 속에서, 헤르메스는 비로소 신에게 바칠 수 있는 단 두 개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제시합니다. 그 첫 번째 이름은 바로 ‘선(the Good)’입니다. 여기서의 ‘선’은 단순히 ‘악’의 반대 개념인 도덕적 선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플라톤이 그의 『국가』에서 제시한 ‘선의 이데아(Form of the Good)’와 그 맥을 같이 하는,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최상의 원리입니다. 플라톤에게 선의 이데아는 모든 다른 이데아들이 존재하고 인식될 수 있도록 하는 근원이며, 마치 태양이 가시적인 세계에 빛과 생명을 주듯이, 지성적인 세계에 진리와 존재를 부여하는 궁극의 실체입니다.
헤르메스는 이 플라톤적 사유를 계승하여, 신과 선을 동일시합니다. 신만이 유일하게 “본성적으로 선하며”, 다른 어떤 존재도 “결코 선이 될 수도 없고 선이 되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선의 본질을 “모든 것을 주고 아무것도 받지 않는 자”라고 정의합니다. 이는 신의 창조 행위가 어떤 결핍이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하고 충만한 존재가 자신의 선함을 외부로 무상(無償)으로 내어주는, 순수한 관대함의 발현임을 의미합니다. ‘선’이라는 이름은 이처럼 신의 자기 충족적이고, 완전하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초월적 측면을 완벽하게 포착합니다.
두 번째 이름: 아버지(Father)
만일 ‘선’이라는 이름이 신의 초월적이고 비인격적인 측면을 강조한다면, 두 번째 이름인 ‘아버지’는 그의 내재적이고 인격적인 측면을 드러냅니다. 헤르메스는 신의 또 다른 이름이 ‘아버지’인 이유가, 그가 “만물을-만드시는-자이기” 때문이며, “아버지의 역할은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기계적인 제작(making)이 아니라, 생명을 낳고 양육하는 ‘생성(begetting)’의 의미를 강하게 품고 있습니다. ‘제작자(Maker)’라는 이름이 기술자와 피조물 사이의 거리감을 암시한다면, ‘아버지(Father)’라는 이름은 그와 그의 창조물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과 돌봄, 그리고 친밀한 혈연적 관계를 암시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논고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다소 충격적인 구절, 즉 “자녀 없이 삶을 떠나는 것은 매우 큰 불행이자 불경이며… 그 영혼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본성을 가진 육체로 선고받을 것”이라는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시의 일부 금욕주의적이고 세계-부정적인 영지주의 사상에 대한 명백한 반박으로 읽힙니다. 신의 가장 본질적인 활동이 ‘아버지’로서 생명을 창조하고 낳는 것이라면, 인간이 그 신성한 활동을 모방하여 자신의 삶 속에서 창조(출산)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가장 경건한 행위가 됩니다. 반대로 생명을 창조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신의 본성 자체를 거부하는 ‘불경’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헤르메스주의가 현실과 육체를 긍정하고, 그 안에서 신성한 의무를 다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생명-긍정의 철학임을 보여줍니다.
헤르메스는 ‘아버지’와 ‘선’이라는 두 개의 이름을 통해 신의 이중적 본성을 드러냅니다. 신은 한편으로는 모든 개념을 초월하는 절대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선’으로서, 우리 사유의 가장 높은 곳에 존재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만물을 사랑으로 낳고 양육하는 ‘아버지’로서,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내재하며 우리 존재의 근원이 됩니다. 이처럼 헤르메스주의의 신은 다가갈 수 없는 초월적 존재인 동시에,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내재적 존재입니다. 이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두 측면을 하나의 존재 안에서 통합하여 이해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아스클레피오스에게」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가장 심오한 신학적 통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