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선은 오직 신 안에만 있고 다른 어디에도 없다

제6장. 선은 오직 신 안에만 있고 다른 어디에도 없다

by 이호창

제6장. 선은 오직 신 안에만 있고 다른 어디에도 없다


이 선(the Good)의 본질에 관한 담론은, 앞서의 「아스클레피오스에게」처럼, 고전 그리스 철학의 전문적인 언어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사상에서 ‘선’이란 또한 스스로 원인이 되며(self-caused) 스스로 충족하는(self-sufficient) 존재를 의미하며, 따라서 후대의 ‘선함(goodness)’이라는 개념과는 거의 공통점이 없습니다. 이는 라틴어 ‘비르투스(virtus)’와 현대 기독교의 ‘덕(virtue)’ 개념이 그 어원적 연결성에도 불구하고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지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정념(passion)’이라는 단어 또한 그 고대의 의미, 즉 ‘작용(action)’의 반대(‘능동적’과 ‘수동적’을 비교)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텍스트에 나타나는 인간과 코스모스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예를 들어 「포이만드레스」나 「아스클레피오스」에서 발견되는 보다 긍정적인 평가와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이는 이 문헌들이 통일되고 필연적으로 일관된 사상 체계의 산물이 아니라, 다양성을 지닌 학파의 유산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1. 오,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여, 선(Good)은 신 외에 다른 어느 누구 안에도 있지 않다. 아니, 오히려 선은 영원히 신 그 자신이시다. 만일 그렇다면, 선은 본질(essence)임에 틀림없으며, 모든 종류의 운동과 생성으로부터 자유롭고(비록 어떤 것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지만), 그 자신 주위에 안정된 에너지를 소유하며, 결코 너무 적지도 너무 많지도 않은, 언제나 가득 찬 공급원이시다. 하나이시면서도, 만물의 근원이시니, 만물을 공급하는 것이 선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내가 전적으로 만물을 공급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영원히 선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신 외에 다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므로, 그것을 욕망하여 악하게 되실 일이 없다. 또한 존재하는 것들 중 단 하나도 그에게서 잃어버려질 수 없으며, 그것을 잃고 고통받으실 일도 없다. 고통은 악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를 정복할 수 있는 그보다 우월한 어떤 것도 없으며, 그에게 해를 끼칠 동등한 이도 없고, 그가 사랑에 빠질 대상도 없으며, 그의 말을 듣지 않아 그가 분노하실 어떤 것도 없으며, 그가 질투할 만큼 더 현명한 어떤 것도 없다.


2. 이제 이 모든 것이 그의 존재 안에 부재하므로, 선 외에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그러한 초월적 존재 안에서는 어떤 악도 발견될 수 없는 것과 같이, 나머지 어떤 것들 안에서도 선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작은 것과 큰 것, 개별적인 것과 이 모든 것보다 더 크고 가장 강력한 살아있는 존재, 즉 코스모스(the cosmos) 안에는, 다른 모든 것들, 즉 선이 아닌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탄생에 종속된 것들은 정념(passions)으로 가득 차 있으니, 탄생 자체가 수동적(passible)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념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도 선이 없으며, 선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도 단 하나의 정념도 없다. 낮이 있는 곳에 밤이 없고, 밤이 있는 곳에 낮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생성계(genesis) 안에서는 선이 결코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비생성적인 것(the ingenerate)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만물에 대한 나눔이 물질(matter)에 부여되었음을 볼 때, 물질 또한 선을 나누어 가진다. 이런 방식으로 코스모스는 선하다. 즉, 그것이 만물을 만드는 한에서, 만드는 행위에 관한 한 그것은 선하지만, 다른 모든 점에서는 선하지 않다. 그것은 수동적이며 운동에 종속되어 있고, 수동적인 것들의 제작자이기 때문이다.


3. 반면 인간 안에서는, 악의 많고 적음에 의해 선이 결정된다. 이곳 아래에서 너무 악하지 않은 것이 선이며, 이곳 아래의 선은 악의 가장 작은 부분이다. 그러므로 이곳 아래의 선이 악으로부터 완전히 깨끗할 수는 없으니, 이곳 아래의 선은 악으로 더럽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럽혀진 채로는 더 이상 선으로 머물지 못하고, 머물지 못하면 악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선은 오직 신 안에만 있으며, 오히려 선은 신 그 자신이시다. 그러니 아스클레피오스여, 인간 안에서는 선의 이름만이 발견될 뿐, 그 실체는 어디에도 없으니, 이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4. 어떤 물질적 육체도 그것을 담지 못하니, 그것은 사방이 악과 노고, 고통, 욕망과 정념, 오류와 어리석은 생각들로 묶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스클레피오스여, 모든 악 중 가장 큰 악은, 위에서 말한 이 각각의 것들이 이곳 아래에서는 가장 위대한 선으로 생각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욱 더 큰 악은 식탐(belly-lust)이니, 이는 다른 모든 악의 무리를 이끄는 오류이며, 우리로 하여금 이곳 아래에서 선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드는 것이다.


5. 그리고 나는 내 편에서, 신께서 내 마음에 선의 그노시스(Gnosis of the Good)에 관한 생각을 심어 주시어, 그것이 결코 세상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신 데 대해 감사드린다. 세상은 악의 ‘충만함(fullness)’이지만, 신은 선의 충만함이요, 선은 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the Beautiful)의 탁월함은 바로 선의 본질 주위에 있다. 아니, 그것들은 너무나 순수하고, 너무나 섞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니, 아마도 그것들 자체가 선의 본질들일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아스클레피오스여, 만일 그가 참으로 본질을 가지신다면, 신의 본질은 아름다움이며, 아름다움은 더 나아가 선이기도 하다. 세상의 대상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선은 없다. 눈 아래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은 이를테면 이미지-사물들이요 그림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실재이며, 특히 아름다움과 선의 본질이 그러하다. 눈이 신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아름다움과 선을 볼 수도 없다. 그것들은 오직 그에게만 결합된 신의 본질적 부분들이며, 분리될 수 없는 친숙한 자들이요, 가장 사랑받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신은 스스로 그들과 사랑에 빠지셨거나, 혹은 그들이 신과 사랑에 빠져 있다.


6. 네가 신을 생각할 수 있다면, 너는 아름다움과 선을 생각하게 될 것이니, 그것은 빛을 초월하며, 신에 의해 빛보다 더 밝게 만들어졌다. 그 아름다움은 비할 데 없고, 그 선은 모방할 수 없으니, 신 그 자신이 그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신을 생각하듯이, 아름다움과 선을 생각하라. 그것들은 결코 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에, 다른 어떤 살아있는 것들과도 결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네가 신을 찾는다면, 너는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다. 그곳으로 이끄는 길은 하나이니, 곧 경건함과 그노시스가 결합된 길(Devotion joined with Gnosis)이다.


7. 그리하여 알지 못하고 경건함의 길을 걷지 않는 자들은, 감히 인간을 아름답고 선하다고 부르지만, 그는 결코 꿈속에서조차 선의 티끌 하나 보지 못했으며, 온갖 종류의 악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악을 선이라 생각하고, 그리하여 끊임없이 그것을 사용하며, 심지어 그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그것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증가시키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아스클레피오스여, 인간들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들은 그러한 것들이니, 우리가 피하거나 미워할 수 없는 것들이다. 모든 것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필요로 하고 그것들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점이다.


「선은 오직 신 안에만 있고 다른 어디에도 없다」 주해


환영의 파괴, 진리를 향한 준비


우리가 지금까지 탐험해 온 헤르메스주의의 세계가 주로 창조의 아름다움과 그노시스를 통한 상승의 가능성을 노래했다면, 여섯 번째 논고는 갑자기 우리 발밑의 땅을 꺼뜨리는 듯한, 차갑고도 단호한 선언으로 우리를 맞이합니다. “오, 아스클레피오스여, 선(Good)은 신 외에 다른 어느 누구 안에도 있지 않다. 아니, 오히려 선은 영원히 신 그 자신이시다.” 이 논고는 이전의 텍스트들에서 발견되었던 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코스모스와 인간의 본질에 대해 거의 가혹하다고 느껴질 만큼 비판적인 시선을 던집니다.

그러나 이 논고의 목적은 결코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구도자가 영적 여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환영의 파괴’라는 필수적인 단계를 위한 가장 강력한 의약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선하다’고 믿고 집착하는 모든 상대적이고 덧없는 가치들—부, 명예, 쾌락, 심지어는 세속적인 도덕성까지—이 사실은 진정한 선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이 우리를 진정한 선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물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논고는 우리가 굳게 딛고 서 있던 모든 거짓된 토대를 무너뜨림으로써, 비로소 우리가 유일하고 영원한 반석이신 신, 즉 ‘선’ 그 자체 위에 우리의 영혼의 집을 짓도록 이끄는, 역설적 자비의 가르침입니다.


선의 형이상학: 플라톤의 유산


이 논고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열쇠는, 여기서 말하는 ‘선’이 단순히 ‘악’의 반대 개념인 윤리적 ‘선함(goodness)’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헤르메스가 말하는 ‘선’은 플라톤 철학의 정점에 있는 ‘선의 이데아(Form of the Good)’와 그 맥을 같이 하는,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최상의 원리입니다. 플라톤에게 ‘선’은 다른 모든 이데아(진리, 아름다움, 정의 등)가 그것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존재와 의미를 갖게 되는 궁극의 근원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에게 ‘있음(being)’을 부여하고, 모든 앎에 ‘진리(truth)’를 부여하는, 말하자면 ‘이데아들의 태양’입니다.


헤르메스는 바로 이 플라톤적 사유를 계승하여, 신과 선을 완벽하게 동일시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선의 본질을 “모든 종류의 운동과 생성으로부터 자유로운 본질”이며, “결코 너무 적지도 너무 많지도 않은, 언제나 가득 찬 공급원”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는 신, 즉 선이 우리가 경험하는 변화무쌍한 ‘생성(genesis, becoming)’의 세계를 완전히 초월한, 영원하고 불변하는 ‘존재(ousia, being)’ 그 자체임을 의미합니다. 그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서도 결코 영향을 받거나 고통받을 수 없는, 완전하고 자기 충족적인 실체입니다. 이처럼 신의 절대적인 초월성을 확립하는 것이, 이 논고의 첫 번째 목표입니다.


코스모스와 인간: “악의 가장 작은 부분”


신의 절대적인 선이 확립되자, 논고는 그 빛 아래에서 코스모스와 인간의 그림자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헤르메스의 진단은 가혹합니다. “정념(passion)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도 선이 없으며, 선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도 단 하나의 정념도 없다.” 여기서 ‘정념’은 단순히 감정적인 격정을 넘어, ‘수동성(passivity)’, 즉 외부의 힘에 의해 영향을 받고, 변화하며, 고통받는 모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코스모스는 탄생하고 변화하며 소멸하는 ‘생성’의 세계에 속해 있으므로, 그 본질상 ‘수동적(passible)’입니다. 따라서 코스모스는 진정한 의미에서 선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것이 만물을 ‘만든다’는 측면에서 선의 일부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는 선이 아닙니다.


인간의 상태는 이보다 더욱 비참합니다. 헤르메스는 “이곳 아래의 선은 악의 가장 작은 부분”이라고 말하며,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선조차도, 신의 절대적인 선에 비추어 볼 때는 사실상 악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도덕적 허무주의의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적이고 상대적인 모든 가치 체계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비판입니다. 우리가 ‘선하다’고 여기는 모든 행위들은 종종 미묘한 이기심,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 혹은 더 큰 악을 피하기 위한 소극적인 선택과 같은 불순물(악)로 더럽혀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 아래의 선은 악으로부터 완전히 깨끗할 수 없으며”, 악으로 더럽혀진 이상 그것은 더 이상 선이 아닙니다.


이처럼 헤르메스는 우리의 모든 세속적인 희망과 자부심의 근거를 철저히 파괴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우리가 세상 속에서 찾으려 했던 모든 거짓된 ‘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오직 유일한 진정한 선, 즉 신 자신을 향하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통한 구원: 그노시스로 향하는 길


그렇다면 이처럼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인간이 진정한 선에 이를 수 있는 길은 과연 존재하는가? 논고는 절망 속에서 하나의 가느다란 희망의 빛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the Beautiful)’입니다. 헤르메스는 “신의 본질은 아름다움이며, 아름다움은 더 나아가 선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비록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미지-사물들이요 그림들”에 지나지 않지만, 바로 그 불완전한 아름다움이 우리로 하여금 완전하고 보이지 않는 원형적 아름다움을 갈망하게 만드는 사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플라톤이 『향연』에서 제시한, 개별적인 육체의 아름다움에서 시작하여, 모든 육체의 아름다움, 영혼의 아름다움, 학문의 아름다움을 거쳐, 마침내 ‘아름다움 그 자체(Beauty Itself)’의 이데아를 관조하게 되는 상승의 과정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러나 이 원형적 아름다움과 선을 보는 것은 우리의 감각적 눈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눈이 신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아름다움과 선을 볼 수도 없다.” 그것들은 오직 신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에, 신과 합일된 마음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합일로 이끄는 유일한 길은 바로 “경건함과 결합된 그노시스(Devotion joined with Gnosis)”입니다.


이 논고는 가장 가혹한 부정과 파괴를 통해, 우리를 가장 숭고한 긍정과 구원으로 이끄는 역설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헛되이 찾아 헤매던 모든 거짓된 황금을 빼앗아가는 대신, 우리 영혼 안에 있는 진정한 황금, 즉 신을 직접 알고 그와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세상과 자신에 대한 모든 긍정적인 환영을 기꺼이 포기하고, 자신의 완전한 무가치함을 인정하는 ‘영적 가난’의 상태에 이를 때, 비로소 우리는 신이라는 유일한 보물로 채워지는 은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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