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지의 술을 흠뻑 마시고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여 이미 토해내고 있는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어디로 비틀거리고 있는가? 멈추어라, 정신을 차리고, 마음의 참된 눈으로 위를 응시하라! 너희 모두가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그럴 수 있는 자들만이라도 그리하라! 무지라는 불행이 온 땅에 넘쳐흘러 육체 안에 갇힌 영혼을 압도하고, 그것이 구원의 항구에 닻을 내리는 것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너희는 거센 홍수에 휩쓸려 가지 말고, 해안의 역류(逆流, shore-current)를 이용하여, 할 수 있는 자들은 구원의 항구를 향해 나아가라. 그리고 그곳에 정박하여, 너희 손을 잡아 그노시스(Gnosis)의 문으로 인도할 이를 찾으라. 그곳에는 맑은 빛이 빛나고, 모든 어둠이 깨끗이 씻겨나가며, 단 한 영혼도 취하지 않고, 모두 정신을 차리고 보이고자 하시는 그분을 마음의 눈으로 응시한다. 어떤 귀도 그를 들을 수 없고, 어떤 눈도 그를 볼 수 없으며, 어떤 혀도 그에 대해 말할 수 없고, 오직 마음과 심장만이 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너는 네가 입고 있는 그 망토를 찢어 버려야 한다. 곧 무지의 그물, 악의 토대, 타락의 사슬, 어둠의 갑각, 살아있는 죽음, 감각의 시체, 네가 지고 다니는 무덤, 네 집 안의 강도이니, 그는 그가 사랑하는 것들을 통해 너를 미워하고, 그가 미워하는 것들을 통해 네게 악의를 품는다.
3. 네가 입고 있는 그 증오스러운 망토는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너의 목을 조르고 너를 억눌러, 네가 위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진리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거하는 선을 보고서 그것의 악함을 혐오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이 사람들이 감각이라고 생각하는 저 허울뿐인 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듦으로써, 너를 대적하여 꾸민 음모를 네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육중한 물질로 그것들을 막고 역겨운 욕정으로 가득 채워, 네가 들어야 할 것들에 대해 듣지 못하고 보아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신에 대한 무지이다」 주해
빛과 그림자, 그노시스와 아그노이아
일곱 번째 논고는 헤르메스주의 구원론의 핵심을 가장 명료하고도 강렬한 언어로 꿰뚫는 하나의 선언문과 같습니다. 그 제목 자체가 이 텍스트의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인간의 가장 큰 불행(evil)은 신에 대한 무지(Agnosia)이다.” 여기서 ‘불행’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카키아(kakia)’는 단순한 불운이나 고통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악’ 혹은 ‘결함’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의 모든 고통과 방황의 근원은 외부의 사악한 힘이나 타고난 죄의 본성이 아니라, 전적으로 내적인 ‘무지’, 즉 자신의 신성한 기원과 본질을 알지 못하는 영적 암흑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논고는 앞선 논고들에서 제시된 두 가지 핵심적인 개념, 즉 ‘그노시스(Gnosis, 앎)’와 ‘아그노이아(Agnosia, 무지)’를 빛과 그림자처럼 선명하게 대립시키며, 구원의 길이 곧 무지의 어둠에서 앎의 빛으로 나아가는 여정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 여정은 우리를 짓누르는 무지의 군대—질투, 탐욕, 분노, 기만—와 맞서 싸워, 그것들을 앎의 권능으로 변화시키는 내면의 위대한 전쟁입니다.
무지의 군대: 영혼을 점령한 열두 악덕
헤르메스는 먼저 무지의 상태에 있는 영혼이 어떤 비참한 지경에 처해 있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그는 무지가 “모든 악의 첫 번째 정념”이며, 무지가 들어온 영혼은 곧이어 “질투, 슬픔, 무절제, 욕망, 탐욕, 분노, 기만”과 같은 다른 모든 악덕들의 군대에게 점령당한다고 말합니다. 이 악덕들은 단순히 개인의 성격적 결함이 아니라, 영혼을 육체의 감옥에 가두고 신성한 빛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인격화된 어둠의 세력들입니다.
이 악덕들의 목록은 제13장 「산상에서의 비밀 설교」에서 영혼이 상승하며 벗어던져야 할 ‘열두 고문관’의 목록과 거의 일치합니다. 이는 헤르메스주의가 인간의 심리적 상태를 얼마나 정교하게 분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무지한 영혼은 이 내면의 폭군들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채찍과 가시로 찔리는” 듯한 고통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자신의 통제할 수 없는 정념들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묘사는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kleshas)가 어떻게 중생을 윤회의 고통 속에 묶어두는지를 설명하는 방식과도 깊은 유사성을 보입니다.
그노시스의 도래: 어둠을 몰아내는 빛
이 절망적인 내면의 전쟁터에 어떻게 구원의 빛이 비출 수 있습니까? 헤르메스는 그 길이 오직 “신에 대한 그노시스”를 통해서만 열린다고 선언합니다. 그노시스, 즉 신성한 앎은 단순한 지적 정보의 습득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 갑자기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같은, 영혼의 근본적인 상태 변화를 일으키는 계시적인 빛입니다.
이 빛이 영혼에 비추는 순간, “무지의 어둠은 즉시 쫓겨나고”, 그 어둠에 기생하던 모든 악덕의 군대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마치 적에게 포위된 성채의 수비대처럼” 도망쳐 버립니다. 이 극적인 묘사는 그노시스가 악덕들과 일일이 싸워 이기는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라,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 자체(무지)를 없애버리는 근본적인 혁명임을 보여줍니다. 어둠은 빛과 싸울 수 없습니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은 그저 존재할 수 없을 뿐입니다.
이처럼 그노시스는 우리를 모든 악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유일한 힘입니다. “그노시스를 얻은 자는 선하고 경건하며, 이미 신성하다”고 헤르메스는 말합니다. 그는 더 이상 외부의 도덕률이나 계율에 억지로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 자체가 선의 본질인 신과 하나가 되었기에, 자연스럽게 선하고 경건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노시스를 향한 길: 관조와 경건
그렇다면 이 결정적인 그노시스는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논고는 두 가지 실천적인 길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 길은 ‘관조(Contemplation)’입니다. 헤르메스는 우리에게 “네 자신을 위로 들어 올려, 너 자신과 같은 크기로 만들라”고 권합니다. 이는 우리의 의식을 유한한 육체와 에고의 한계로부터 벗어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우주적 자아의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우리가 “모든 시간과 공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모든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과 이미 죽은 것을 동시에 파악하며, 물과 불, 하늘과 땅의 모든 대극을 우리 자신 안에서 하나로 통합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의식을 무한히 확장하여, “아직 생성되지 않은 신의 위대함”을 파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신을 알게 됩니다.
두 번째 길은 ‘경건(Devotion)’입니다. 헤르메스는 “만일 네가 신을 알기 원한다면, 너는 신이 되기를 원해야 한다”고 말하며, ‘닮은 것은 닮은 것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는 고대의 신비주의적 원리를 제시합니다. 신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신의 속성, 즉 ‘선’의 속성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악으로부터 너 자신을 떼어내고, 네게 속하지 않은 옷들을 벗어 던지며, 너의 비합리적인 부분들의 형벌들을 정화하고, 너의 참된 자아를 드러내야” 합니다. 이처럼 끊임없는 자기 정화와 경건한 삶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씨앗을 키워나갈 때, 우리는 마침내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신을 직접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일곱 번째 논고는 인간의 모든 고통과 악의 근원을 ‘무지’라는 내면의 상태로 규정함으로써, 구원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손에 돌려줍니다. 우리의 불행은 외부에서 온 형벌이 아니기에, 우리는 누구도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아직 우리 자신의 참된 모습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비극일 뿐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길은, 관조를 통해 우리의 의식을 무한히 확장하고, 경건을 통해 우리의 삶을 정화함으로써, 마침내 우리 안에 잠들어 있던 신성한 앎의 빛, 즉 그노시스를 깨우는 것입니다. 이 빛이 떠오르는 순간, 우리의 모든 불행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고, 우리는 본래부터 그러했던 신성한 존재로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