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산만한 이 에세이는 우리가 '사유(thoughts)'라 부르는 지각의 집합과 '감각적 지각(sensory perceptions)'이라 부르는 집합이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개념에서 시작하여 일련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사상의 함의는 후대 헤르메스 사상, 특히 마법과 기억술(Art of Memory)의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이 논고에서는 관련된 쟁점들이 거의 다루어지지 않으며, 논의는 도덕적 이원론과 그와 동등하게 중요하지만 별개인, 코스모스 자체가 신적인 창조력이라는 사상으로 벗어납니다. 이해가 믿음의 근원이자 전제 조건으로 제시되는 10절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의 유명한 '나는 그것이 부조리하기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라는 말을 낳았던 신앙과 이성의 역할에 대한 고대의 동일한 논쟁의 일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1.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여, 나는 어제 완전한 담론, 곧 로고스(Logos)를 그대에게 주었다. 오늘 나는 그 속편으로서 감각(Sense)에 관한 담론을 조목조목 짚어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제 감각과 사유(thought)는 서로 달라 보이니, 전자는 물질(matter)과 관계있고, 후자는 실체(substance)와 관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는 둘 다 하나이며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인간 안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다른 생명들(혹은 살아있는 피조물들) 안에서는 감각이 본성(Nature)과 하나이지만, 인간 안에서는 사유이다. 이제 마음(mind)은 신이 신성(divinity)과 다른 것만큼이나 사유와 다르다. 신성은 신에 의해 존재하게 되고, 마음은 사유에 의해 존재하게 되니, 사유는 말씀, 곧 로고스(logos)의 자매이며 서로의 도구이다. 사유 없이는 말씀이 발화되지 않으며, 말씀 없이는 사유가 현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감각과 사유는 마치 서로 얽혀 있는 것처럼 함께 인간 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감각 없이는 사유할 수 없으며, 사유 없이는 감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속에서 광경을 상상하는 이들처럼, 감각과 별개로 사물을 사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내게는 이 두 활동 모두가 꿈의 광경 속에서 일어나며, 감각은 잠든 상태에서 깨어 있는 상태로 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분리되어 있으며, 오직 그의 감각의 두 측면이 함께 동의할 때에만, 마음에 의해 잉태된 사유의 발화가 일어난다.
3. 모든 사유를 잉태하는 것은 마음이다. 그것이 신으로부터 씨앗을 받을 때는 선한 사유를, 다이몬적인 존재들(daimonials)로부터 받을 때는 그 반대의 것들을 잉태한다. 코스모스의 어떤 부분도 다이몬(daimon)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니, 그는 신의 빛에 의해 밝혀진 다이몬, 즉 인간의 영혼 속으로 은밀히 기어 들어가, 자신의 에너지의 씨앗을 그 안에 심는다. 그리고 마음은 이같이 뿌려진 씨앗, 즉 간음, 살인, 존속살해, 신성모독, 불경, 교살, 절벽에서 내던지기, 그리고 악한 다이몬들의 소행인 다른 모든 행위들을 잉태한다.
4. 신의 씨앗은, 참으로, 드물지만 광대하고 아름다우며 선하니, 곧 덕(virtue)과 자제(self-control), 경건(devotion)이다. 경건은 신-그노시스(God-gnosis)이다. 그리고 신을 아는 자는 모든 선한 것들로 가득 차,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사유가 아닌 신적인 사유를 한다. 이 까닭에 그노시스를 아는 자들은 많은 이들을 기쁘게 하지 못하고, 많은 이들도 그들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그들은 미쳤다고 생각되고 비웃음당하며, 미움받고 멸시당하며, 때로는 죽임을 당하기까지 한다. 우리가 말했듯이, 악은 필연적으로 땅 위에 거해야 하니, 그곳이 바로 악의 본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 자리는 땅이며, 어떤 이들이 때때로 불경한 혀로 말하듯이 코스모스가 아니다. 그러나 신께 헌신하는 자는, 일단 그노시스를 감지하고 나면, 모든 것을 견뎌낼 것이다. 그러한 자에게는 모든 것이, 비록 다른 이들에게는 악일지라도, 그에게는 선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그 모든 것을 그노시스에 귀속시킨다. 그리고 가장 경이로운 것은, 악한 것들을 선하게 만드는 이는 오직 그뿐이라는 점이다.
5. 그러나 나는 다시 한번 감각에 관한 담론(Logos)으로 돌아가겠다. 인간 안에서 감각이 사유와 함께한다는 것이 바로 그를 인간으로 구성한다. 그러나 내가 말했듯이, 사유의 혜택을 받는 것은 모든 인간이 아니다. 이 사람은 물질적이고, 저 다른 사람은 실체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했듯이, 물질적인 인간은 악과 어울리며, 다이몬들로부터 그의 사유의 씨앗을 얻는다. 반면 실체적인 인간들은 선과 어울리며, 신에 의해 구원받는다. 이제 신은 만물의 제작자(Maker)이시며, 그의 만드심 속에서, 그는 마침내 모든 것을 자신과 같게 만드신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활동의 실천을 통해 선하게 되어가는 동안에는, 비생산적인 존재들이다. 그들의 생성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드는 것은 우주적 운행(Cosmic Course)의 작용이며, 일부는 악으로 더럽히고 다른 일부는 선으로 깨끗하게 만든다. 아스클레피오스여, 코스모스 또한 그 자신에게 고유한 감각-과-사유를 소유하고 있으니, 인간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그토록 다채롭지 않고, 오히려 더 낫고 더 단순한 것이다.
6. 코스모스의 단일한 감각-과-사유는 만물을 만들고, 그것들을 다시 자기 자신 속으로 되돌려 만드는 것이니, 신의 의지의 기관(Organ of the Will of God)으로서, 신으로부터 모든 씨앗을 자신 속으로 받아들여 보존하고, 모든 것을 드러나게 하며, 그 후 그것들을 해체하여 다시 모두 새롭게 만들도록 조직되어 있다. 그리하여, 생명의 선한 정원사(Good Gardener of Life)처럼, 해체된 것들을 자신에게로 거두어들여, 다시 한번 갱신을 부여한다. 그것이 생명을 주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거두어들여 살아있게 만들며, 동시에 생명의 장소(Place of Life)이자 그 창조자(Creator)이다.
7. 이제 물질로 만들어진 육체들은 다양하다. 어떤 것은 흙으로, 어떤 것은 물로, 어떤 것은 공기로, 그리고 어떤 것은 불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합성된 것이다. 어떤 것은 더 복합적이고, 어떤 것은 더 단순하다. 무거운 것들이 더 복합적이고, 가벼운 것들이 덜 그러하다. 탄생의 종류들의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코스모스 운행의 속도이다. 그것은 가장 신속한 숨결(Breath)이므로, 하나의 플레로마(Pleroma), 즉 생명의 충만함과 함께 육체들에 그들의 특질들을 부여한다.
8. 그러므로 신은 코스모스의 아버지(Sire)이시며, 코스모스는 코스모스 안에 있는 모든 것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코스모스는 신의 아들(Son)이며, 코스모스 안의 것들은 코스모스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코스모스, 즉 질서(Order)라 불리는 것은 마땅하니, 그것이 탄생의 다양성과 함께, 어떤 것도 생명 없이 내버려 두지 않음과 함께, 그 활동의 지칠 줄 모름과 함께, 그 필연성의 신속함과 함께, 그 원소들의 구성과 함께, 그리고 그 피조물들의 질서와 함께 모든 것을 질서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그리고 마땅히 같은 것이 질서라는 이름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모든 생명들의 감각-과-사유는 외부로부터, 즉 그것들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부터 숨결처럼 불어넣어져 그들 안으로 들어온다. 반면 코스모스는 그것들을 존재하게 될 때 한꺼번에 받아들여, 신으로부터 온 선물로서 간직한다.
9. 그러나 어떤 이들이 추측하듯이, 신은 감각-과-사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계시지 않다. 사람들이 이처럼 불경하게 말하는 것은 미신을 통해서이다. 아스클레피오스여,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모두 신 안에 있으며, 신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고, 그에게 의존한다. 육체를 통해 작용하는 것들, 영혼-실체를 통해 다른 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들, 영을 통해 생명을 살게 하는 것들, 그리고 닳아 없어진 것들을 자신에게로 거두어들이는 것들 모두가 그러하다. 그리고 마땅히 그러하다. 아니, 나는 오히려 그가 이것들을 소유하신다고 말하지 않겠다. 나는 진리를 말하노니, 그는 그 모든 것 자체이시다. 그는 그것들을 외부에서 얻지 않으시고, 자신으로부터 내어주신다. 이것이 신의 감각-과-사유이니, 영원히 모든 것을 움직이시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들의 티끌 하나라도 멈출 시간은 결코 없을 것이다. 내가 ‘존재하는 것들의 티끌 하나’라고 말할 때, 나는 ‘신의 티끌 하나’를 의미한다. 존재하는 것들은 신이 소유하시며, 그 없이는 아무것도 없고, 그 또한 어떤 것 없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10. 아스클레피오스여, 만일 네가 이것들을 이해한다면, 그것들은 네게 참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네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믿을 수 없는 것들로 보일 것이다. 이해하는 것이 믿는 것이요, 믿지 않는 것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말씀(logos)은 너를 앞서 진리로 인도한다. 그러나 마음은 강력하며, 말씀에 의해 어떤 지점까지 인도되었을 때, 너를 앞서 진리에 이를 힘을 가진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숙고하고, 그것들이 이미 이성에 의해 번역된 것들과 일치함을 발견하였을 때, 그것은 이제 믿게 되었고, 저 아름다운 신앙(Fair Faith) 안에서 그 안식을 찾았다. 그러므로 신의 도움으로 위에서 우리가 말한 것들을 이해하는 자들에게, 그것들은 믿을 만하다. 그러나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믿을 수 없다. 사유-와-감각에 관해서는 이만하면 충분하리라.
「사유와 감각에 관하여」 주해
뒤얽힌 실재의 직물
아홉 번째 논고는 헤르메스주의의 광대한 사상 체계가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축소판과 같습니다. G.R.S. 미드가 지적했듯이, 이 텍스트는 표면적으로 여러 주제 사이를 넘나드는 “다소 산만한”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유와 감각의 통일성이라는 인식론적 문제에서 시작하여, 선과 악의 씨앗을 뿌리는 다이몬(daimon)들의 존재를 논하는 도덕적 이원론으로, 그리고 다시 우주 자체가 하나의 사유하는 생명체라는 우주론으로, 마지막에는 이해와 믿음의 관계를 다루는 구원론으로 그 흐름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이 আপাত적인 산만함이야말로 저자의 진정한 의도를 드러내는 장치입니다. 그는 이 모든 주제들이 사실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실재를 이루는 다른 가닥들임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이 논고는 마치 거대한 태피스트리처럼, 인간의 내면세계와 외부 우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신성한 실재가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장대한 그림을 완성해 가는지를 그려 보입니다.
사유와 감각의 통일성
논고는 서양 철학의 가장 오래된 이분법 중 하나에 도전하는 급진적인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이제 감각과 사유는 서로 달라 보이니, 전자는 물질과 관계있고, 후자는 실체와 관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는 둘 다 하나이며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인간 안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플라톤 이래로 서양 철학은 감각(물질계에 속한, 불완전하고 기만적인 것)보다 사유(이데아계에 속한, 완전하고 진실한 것)에 압도적인 우위를 부여해 왔습니다. 그러나 헤르메스는 이 위계질서를 허물어뜨립니다. 그는 인간 안에서 사유와 감각이 서로 분리된 기능이 아니라, “마치 서로 얽혀 있는 것처럼 함께 흐른다”고 말합니다.
이는 감각적 경험을 폄하하고 이성적 사유만을 숭배하는 경향에 대한 중요한 교정입니다. 헤르메스적 관점에서, 우리가 외부 세계를 ‘감각’하는 행위는 이미 우리의 내면적 ‘사유’에 의해 채색되어 있으며, 우리의 ‘사유’ 또한 감각적 경험이라는 토대 없이는 공허한 관념에 머물 뿐입니다. 심지어 “꿈속에서 광경을 상상하는” 행위조차도, 그는 감각과 사유 두 활동이 모두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식은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입니다. 이 통일성을 이해하는 것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체험하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두 종류의 씨앗: 선악 사유의 기원
인식의 통일성을 이야기한 헤르메스는, 곧바로 그 인식의 내용, 즉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의 기원에 대한 문제로 나아갑니다. 여기서 그는 뚜렷한 도덕적 이원론을 제시합니다. 우리의 마음(Mind)은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어떤 ‘씨앗’을 받느냐에 따라 그 열매를 맺는 밭과 같습니다. “선한 사유는 그것이 신으로부터 씨앗을 받을 때” 생겨나며, 그 반대의 것들은 “다이몬적인 존재들로부터 받을 때” 생겨납니다.
여기서 ‘다이몬(daimon)’은 중간계의 영적 존재들로, 인간의 영혼에 몰래 다가와 “자신의 에너지의 씨앗을 심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영향으로, 우리의 마음은 간음, 살인, 신성모독과 같은 온갖 악한 생각들을 잉태하게 됩니다. 반면, “신의 씨앗은, 참으로, 드물지만 광대하고 아름다우며 선하니, 곧 덕과 자제, 경건이다.” 이 신의 씨앗을 받아 ‘그노시스(Gnosis)’에 도달한 자는,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사유가 아닌 신적인 사유를” 하게 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에게 자신의 생각에 대한 깊은 책임과 관찰을 요구합니다.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이 ‘나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부의 보이지 않는 힘들에 의해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있으며, 영적 수행의 핵심은 다이몬의 씨앗을 거부하고 신의 씨앗을 선택하여 받아들이는 분별의 힘을 기르는 데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그노시스를 얻은 자가 “다수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며”, “미쳤다고 생각되고 비웃음당하며, 미움받고 멸시당하며, 때로는 죽임을 당하기까지 한다”고 말하며, 진리의 길이 필연적으로 세상과의 불화를 동반함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자는 모든 것을 견뎌낼 것”이며, 나아가 “악한 것들을 선하게 만드는 유일한 자”가 된다고 말하며, 그노시스가 지닌 궁극적인 변성적 힘을 보여줍니다.
우주적 마음과 아름다운 신앙
논고는 이제 개인의 마음에서 우주 전체의 마음으로 그 시야를 확장합니다. 저자는 코스모스(Cosmos) 또한 그 자체로 “인간의 그것과는 다른… 더 낫고 더 단순한” 고유의 ‘감각-과-사유’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코스모스의 단일한 사유는 바로 “만물을 만들고, 그것들을 다시 자기 자신 속으로 되돌려 만드는 것”입니다. 즉, 우주는 신의 의지를 수행하는 거대한 유기체로서, 끊임없는 창조와 해체, 그리고 재생의 과정을 통해 자신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우주적 활동의 배후에는, 그것과 분리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신이 존재합니다. 헤르메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모두 신 안에 있으며… 그는 그 모든 것 자체이시다”라고 선언하며, 신이 모든 것에 내재한다는 범재신론적(panentheistic) 비전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신의 ‘감각-과-사유’는 바로 만물을 영원히 움직이게 하는 그 활동 자체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하나의 신성한 마음의 표현이라는 장엄한 비전 앞에서, ‘믿음’의 의미는 새롭게 정의됩니다. 이 논고의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바로 이해와 믿음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헤르메스는 “이해하는 것이 믿는 것이요, 믿지 않는 것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진정한 믿음, 즉 “아름다운 신앙(Fair Faith)”은 감정적인 결단이나 지적인 포기가 아니라, 이성(Logos)의 인도를 받아 마음(Mind)이 진리를 깊이 숙고하고, 마침내 그것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의 이치와 어긋나지 않음을 발견했을 때 찾아오는, 고요하고도 흔들림 없는 ‘확신’의 상태입니다.
이 아홉 번째 논고는 사유와 감각, 선과 악, 우주와 신, 그리고 이해와 믿음이라는 수많은 실타래들을 하나의 거대한 태피스트리로 엮어냅니다. 그 그림의 핵심은, 우리의 개별적인 의식이 우주적 의식과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그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신의 단일한 의식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통일성을 이해하고, 그 이해에 기반하여 굳건한 믿음 속에서 안식을 찾는 것, 이것이야말로 헤르메스주의가 제시하는 구원의 길이며, 「사유와 감각에 관하여」가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심오한 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