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헤르메스적 공리들

HERMETIC AXIOMS

by DrLeeHC

제15장: 헤르메스적 공리들 (HERMETIC AXIOMS)


“지식의 소유는, 그것이 행동 안에서의 현현과 표현을 동반하지 않는 한, 귀금속을 쌓아두는 것과 같다. 즉, 헛되고 어리석은 것이다. 지식은, 부와 마찬가지로, 사용되기 위해 의도되었다. 사용의 법칙은 보편적이며, 그것을 위반하는 자는 자연의 힘들과의 갈등 때문에 고통받는다.” —키발리온.


헤르메스 가르침은, 우리가 이미 기술한 이유들 때문에, 운 좋은 소유자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안전하게 잠겨 있었지만, 결코 단지 저장되고 비밀에 부쳐지기 위해 의도된 것은 아니었다. 사용의 법칙은, 당신이 『키발리온』의 위 인용문을 참조하여 볼 수 있듯이, 그 가르침 안에서 강조되며, 그것은 그 법칙을 강력하게 기술한다. 사용과 표현 없는 지식은 헛된 것이며, 그 소유자나 인류에게 아무런 선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정신적 인색함을 경계하고, 당신이 배운 것을 행동으로 표현하라. 공리들과 경구들을 공부하되, 그것들을 또한 실천하라.


우리는 아래에 『키발리온』에서 온, 더 중요한 헤르메스 공리들 중 일부를, 각각에 약간의 논평을 덧붙여 제공한다. 이것들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것들을 실천하고 사용하라. 당신이 그것들을 사용하기 전까지는 그것들은 진정으로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의 기분이나 정신 상태를 바꾸려면, 당신의 진동을 바꾸어라.” —키발리온.


사람은 의지의 노력으로, 더 바람직한 상태에 의도적으로 주의를 고정시키는 방향으로, 자신의 정신적 진동을 바꿀 수 있다. 의지는 주의를 지시하고, 주의는 진동을 바꾼다. 의지를 통해, 주의의 기술을 배양하라. 그러면 당신은 기분과 정신 상태들의 숙달의 비밀을 푼 것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정신적 진동의 속도를 파괴하려면, 극성의 원리를 작동시키고, 당신이 억제하고자 하는 것의 반대 극에 집중하라. 그 극성을 바꿈으로써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죽여라.” —키발리온.


이것은 가장 중요한 헤르메스 공식들 중 하나이다. 그것은 참된 과학적 원리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는 당신에게, 한 정신 상태와 그 반대는 단지 한 가지 것의 두 극일 뿐이며, 정신적 변성술에 의해 그 극성이 뒤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원리는 현대 심리학자들에게 알려져 있으며, 그들은 그들의 학생들에게 반대되는 특질에 집중하라고 명함으로써, 바람직하지 않은 습관들을 깨뜨리는 데 그것을 적용한다. 만일 당신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면, “두려움을 죽이려” 애쓰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대신 용기라는 특질을 배양하라. 그러면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어떤 저자들은 어두운 방의 예시를 사용하여 이 아이디어를 가장 강력하게 표현했다. 당신은 어둠을 퍼내거나 쓸어낼 필요가 없다. 단지 셔터를 열어 빛을 들여보내는 것만으로 어둠은 사라졌다. 부정적인 특질을 죽이려면, 그 동일한 특질의 긍정적인 극에 집중하라. 그러면 진동은 점차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변할 것이며, 마침내 당신은 부정적인 극 대신 긍정적인 극에 극성화될 것이다. 그 반대 또한 사실이니, 많은 이들이 슬프게도 발견했듯이, 그들이 자신들을 사물의 부정적인 극 위에서 너무 끊임없이 진동하도록 허용했을 때 그러하다. 당신의 극성을 바꿈으로써, 당신은 당신의 기분을 숙달하고, 당신의 정신 상태를 바꾸며, 당신의 기질을 다시 만들고, 성격을 쌓아 올릴 수 있다. 진보한 헤르메스주의자들의 정신적 숙달의 많은 부분은 이 극성의 적용 때문이며, 이는 정신적 변성술의 중요한 측면들 중 하나이다. (이전에 인용된) 헤르메스 공리를 기억하라.


“마음은 (금속이나 원소들과 마찬가지로) 상태에서 상태로, 등급에서 등급으로, 조건에서 조건으로, 극에서 극으로, 진동에서 진동으로 변성될 수 있다.” —키발리온.


극성화의 숙달은 정신적 변성술 또는 정신적 연금술의 근본 원리들의 숙달이다. 사람이 자신의 극성을 바꾸는 기술을 습득하지 않는 한, 그는 자신의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사람이 그 기술을 숙달하는 데 필요한 시간, 주의, 연구, 그리고 실천을 바치기만 한다면,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극성을 바꿀 수 있게 할 것이다. 그 원리는 진실이지만, 얻어지는 결과들은 학생의 끈기 있는 인내와 실천에 달려있다.


“리듬은 극성화의 기술을 적용함으로써 중화될 수 있다.” —키발리온.


우리가 이전 장들에서 설명했듯이, 헤르메스주의자들은 리듬의 원리가 물리적 차원 위에서뿐만 아니라 정신적 차원 위에서도 현현하며, 당혹스러운 기분, 감정, 정서, 그리고 다른 정신 상태들의 연속은, 우리를 한 감정의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데려가는 정신적 추의 앞뒤 흔들림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헤르메스주의자들은 또한 중화의 법칙이, 상당한 정도로, 의식 속에서 리듬의 작용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설명했듯이, 평범한 낮은 차원뿐만 아니라 더 높은 의식의 차원이 있으며, 스승은 정신적으로 더 높은 차원으로 상승함으로써, 정신적 추의 흔들림이 낮은 차원에서 현현하게 하고, 그는 자신의 더 높은 차원에 거주하며, 역행하는 흔들림의 의식을 피한다. 이것은 더 높은 자아 위에 극성화하고, 그리하여 에고의 정신적 진동을 평범한 의식 차원의 그것들 위로 끌어올림으로써 이루어진다. 그것은 어떤 것 위로 올라가서 그것이 당신 아래로 지나가게 하는 것과 유사하다. 진보한 헤르메스주의자는 자신의 존재의 긍정적인 극, 즉 인격의 극보다는 “나는 존재한다(I Am)”는 극에 자신을 극성화시키고, 리듬의 작용을 “거부”하고 “부인”함으로써, 그 의식의 차원 위로 자신을 들어 올리고, 자신의 존재의 진술 안에 굳건히 서서, 추가 그의 극성을 바꾸지 않고 낮은 차원 위에서 다시 흔들리도록 허용한다. 이것은, 그들이 그 법칙을 이해하든 못하든, 어느 정도의 자기-숙달을 성취한 모든 개인들에 의해 성취된다. 그러한 사람들은 단지 기분과 감정의 추에 의해 다시 흔들리는 것을 허용하기를 “거부”하며, 우월함을 굳건히 확언함으로써 긍정적인 극에 극성화된 채로 머무른다. 스승은, 물론, 훨씬 더 위대한 숙련도를 성취하니, 그가 더 높은 법칙으로 극복하고 있는 그 법칙을 이해하고, 그의 의지의 사용으로, 정신적인 기분과 감정의 추에 의해 앞뒤로 흔들리는 것을 허용하는 대중들이 믿기 거의 불가능한 정도의 평정과 정신적 견고함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기억하라, 당신이 실제로 리듬의 원리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파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단지 한 법칙을 다른 법칙으로 상쇄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하고, 그리하여 평형을 유지할 뿐이다. 균형과 상쇄의 법칙들은 물리적 차원들 위에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차원들 위에서도 작동하며, 이러한 법칙들을 이해하는 것은 사람이 법칙들을 전복시키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실제로는 그는 단지 상쇄를 가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것도 원인과 결과의 원리를 벗어날 수 없지만, 인과의 여러 차원들이 있으며, 사람은 더 높은 법칙들을 사용하여 더 낮은 법칙들을 극복할 수 있다.” —키발리온.


극성화의 실천을 이해함으로써, 헤르메스주의자들은 더 높은 인과의 차원으로 상승하여, 그리하여 더 낮은 인과의 차원들의 법칙들을 상쇄한다. 평범한 원인들의 차원을 넘어 상승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어느 정도는, 단지 야기되는 대신에 원인 제공자들이 된다. 자신의 기분과 감정들을 숙달할 수 있고, 우리가 이미 설명했듯이, 리듬을 중화시킬 수 있음으로써, 그들은 평범한 차원 위에서의 원인과 결과의 작용들의 상당 부분을 피할 수 있다. 대중들은 그들의 환경, 자신들보다 더 강한 다른 이들의 의지와 욕망, 유전된 경향들의 효과, 그들 주위의 사람들의 암시, 그리고 다른 외부적 원인들에 순종하며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그들을 삶이라는 체스판 위에서 한낱 졸처럼 움직이게 한다. 이러한 영향력 있는 원인들을 넘어 상승함으로써, 진보한 헤르메스주의자들은 더 높은 정신 활동의 차원을 추구하며, 그들의 기분, 감정, 충동, 그리고 느낌들을 지배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새로운 성격, 특질, 그리고 권능들을 창조하고, 그것들로 그들의 평범한 환경을 극복하며, 그리하여 실질적으로 한낱 졸 대신 플레이어들이 된다. 그러한 사람들은 더 강한 영향력들과 권능들과 의지들에 의해 이리저리 움직여지는 대신, 삶이라는 게임을 이해하며 하는 것을 돕는다. 그들은 그것에 의해 사용되는 대신, 원인과 결과의 원리를 사용한다. 물론, 가장 높은 자들조차도 더 높은 차원들 위에서 현현하는 그 원리에 종속되지만, 더 낮은 활동의 차원들 위에서는, 그들은 노예 대신 스승이다. 『키발리온』이 말하듯이,


“현명한 자들은 더 높은 곳에서는 봉사하지만, 더 낮은 곳에서는 다스린다. 그들은 그들 위에서 오는 법칙들에는 복종하지만, 그들 자신의 차원과 그들 아래의 차원들 위에서는 다스리고 명령을 내린다. 그럼에도, 그렇게 함에 있어, 그들은 그것에 반대하는 대신, 그 원리의 일부를 형성한다. 현명한 사람은 법칙과 일치하게 되며, 그 움직임들을 이해함으로써, 그것의 맹목적인 노예가 되는 대신 그것을 운용한다. 마치 숙련된 수영선수가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자신의 의지대로 가고 오는 것과 같이, 여기저기 휩쓸리는 통나무와는 다른 것처럼, 현명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과 비교될 때 그러하다. 그럼에도 수영선수와 통나무,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자 모두 법칙에 종속된다. 이것을 이해하는 자는 숙달을 향한 길 위에 잘 서 있는 것이다.” —키발리온.


결론적으로, 우리는 다시 한번 당신의 주의를 헤르메스 공리로 환기시키고자 한다.


“진정한 헤르메스적 변성술은 정신의 기술이다.” —키발리온.


위의 공리에서, 헤르메스주의자들은 자신의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위대한 작업이 정신적 권능에 의해 성취된다고 가르친다. 우주가 전적으로 정신적이므로, 그것은 오직 정신성에 의해서만 지배될 수 있다는 결론이 따른다. 그리고 이 진리 안에서, 20세기 초반에 그토록 많은 주목과 연구를 끌고 있는 다양한 정신적 권능들의 모든 현상들과 현현들에 대한 설명이 발견된다. 다양한 컬트와 학파들의 가르침들의 이면과 기저에는, 우주의 정신적 실체라는 원리가 언제나 일정하게 남아있다. 만일 우주가 그 실체적 본성에 있어 정신적이라면, 정신적 변성술이 우주의 조건들과 현상들을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이 따른다. 만일 우주가 정신적이라면, 마음이 그 현상들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높은 권능임에 틀림없다. 만일 이것이 이해된다면, 모든 소위 “기적들”과 “경이로운-작업들”은 그들이 무엇인지 명백하게 보여진다.


“전체는 마음이며, 우주는 정신적이다.” —키발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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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15-1. 지혜의 계보와 비교 철학


『키발리온』의 마지막 장인 제15장은, 지금까지 우리가 탐험해 온 일곱 가지 위대한 원리들을 다시 한번 응축하여, 구도자가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고 명상해야 할 핵심적인 ‘공리(Axiom)’의 형태로 제시합니다. 이 공리들은 흩어져 있는 지식의 조각들이 아니라, 헤르메스 철학이라는 거대한 신전의 모든 기둥들을 떠받치는 단 하나의 견고한 반석입니다. 이 마지막 주해에서, 우리는 『키발리온』의 이 최종적인 지혜의 요약이, 어떻게 수천 년 전 『에메랄드 타블렛』에 새겨졌던 태초의 신비로운 선언들과 정확히 일치하고 공명하는지를 직접적으로 비교 분석하고자 합니다. 이 비교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시대와 언어를 넘어, 헤르메스주의의 가르침이 얼마나 일관되고도 변치 않는 진리의 황금 사슬(Aurea Catena) 위에서 전수되어 왔는지를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 공리: 행동으로 증명되는 지식


“지식의 소유는, 그것이 행동 안에서의 현현과 표현을 동반하지 않는 한, 귀금속을 쌓아두는 것과 같다. 즉, 헛되고 어리석은 것이다. 지식은, 부와 마찬가지로, 사용되기 위해 의도되었다.” —키발리온.


이 첫 번째 공리는, 헤르메스주의가 결코 현실을 도피하는 공허한 사변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실천의 철학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에메랄드 타블렛』의 다섯 번째 구절, “그것의 힘은 땅 위에서 온전하다”는 가르침의 직접적인 실천적 해석입니다. 하늘의 힘(지식)은 그것이 땅(행동)으로 전환될 때에만 그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숭고한 영적 진리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 깨달음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사랑과 자비, 그리고 창조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쌓아둔 귀금속”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동양의 지행합일(知行合一) 사상과도 정확히 일치하는 통찰입니다.


두 번째 공리: 진동과 극성의 변성술


“당신의 기분이나 정신 상태를 바꾸려면, 당신의 진동을 바꾸어라.”

“바람직하지 않은 정신적 진동의 속도를 파괴하려면, 극성의 원리를 작동시키고, 당신이 억제하고자 하는 것의 반대 극에 집중하라.” —키발리온.


이 두 공리는 정신적 변성술의 가장 구체적인 기술을 요약합니다. 이는 『에메랄드 타블렛』의 여섯 번째 구절, “그대는 땅을 불에서, 미묘한 것을 거친 것에서, 부드럽게 그리고 위대한 기술로 분리해야 한다”는 명령을 심리학적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땅’과 ‘불’, ‘미묘한 것’과 ‘거친 것’은 극성의 원리에 따른 동일한 실체의 양 극단입니다. 우리의 두려움(땅/거친 것)과 용기(불/미묘한 것)는 별개의 감정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감’이라는 하나의 스펙트럼 위에 놓인 다른 진동수일 뿐입니다. 따라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두려움과 싸우는 대신, 우리는 의식적으로 우리의 주의를 ‘용기’라는 반대 극에 집중함으로써, 우리 내면의 진동수 자체를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미묘한 것을 거친 것에서 분리’하는 헤르메스적 기술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세 번째 공리: 리듬과 인과의 극복


“리듬은 극성화의 기술을 적용함으로써 중화될 수 있다.”

“어떤 것도 원인과 결과의 원리를 벗어날 수 없지만, 사람은 더 높은 법칙들을 사용하여 더 낮은 법칙들을 극복할 수 있다.” —키발리온.


이 공리들은 운명에 대한 헤르메스주의의 독특하고도 희망적인 관점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흥망성쇠의 ‘리듬’과, 과거의 행위가 현재를 결정하는 ‘인과’의 법칙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나 헤르메스의 제자는 이 법칙들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합니다. 그는 법칙을 부정하는 대신, 더 높은 법칙을 사용하여 낮은 법칙의 효과를 ‘중화’시키거나 ‘극복’합니다.


이것은 『에메랄드 타블렛』의 일곱 번째 구절, “그것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고, 다시 땅으로 내려와, 위와 아래의 힘을 받는다”는 순환의 비밀과 연결됩니다. 영혼이 자신의 의식을 물질적이고 감정적인 낮은 차원(땅)에서, 더 높고 초연한 정신적 차원(하늘)으로 끌어올릴 때, 그는 리듬의 추가 아래에서 흔들리더라도 그 영향을 받지 않는 평정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과거라는 원인이 만들어낸 현재의 결과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원인(의식적 선택)을 창조함으로써, 미래의 결과를 능동적으로 만들어 나갑니다. 이처럼, 그는 ‘위와 아래의 힘’을 모두 사용하여,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공리: 정신적 우주와 정신적 변성술


“진정한 헤르메스적 변성술은 정신의 기술이다.”

“전체는 마음이며, 우주는 정신적이다.” —키발리온.


이 마지막 공리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탐구해 온 모든 가르침이 귀결되는 단 하나의 근본적인 진실, 즉 ‘정신의 원리’를 다시 한번 확언합니다. 이 원리는 『에메랄드 타블렛』의 세 번째 구절, “모든 것이 하나로부터, 하나의 명상에 의해 비롯되었듯이”라는 선언의 가장 명료한 해설입니다. 우주가 근본적으로 신성한 마음의 정신적 창조물이라면, 그 우주를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 또한 ‘정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연금술사가 행하는 모든 물리적인 작업—분리, 정화, 결합—은 궁극적으로 그의 정신 상태를 변화시키기 위한 외적인 의식이며, 반대로 그의 정신 상태의 변화는 물리적인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집니다. 이것이 바로 『에메랄드 타블렛』의 아홉 번째 구절, “그것은 모든 힘 중에 가장 강한 힘이니, 모든 미묘한 것을 이기고, 모든 단단한 것을 꿰뚫기 때문이다”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통합되고 정화된 정신의 힘은, 보이지 않는 생각의 세계(미묘한 것)뿐만 아니라, 보이는 물질의 세계(단단한 것)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궁극의 변성제입니다.


『키발리온』의 이러한 공리들은 『에메랄드 타블렛』의 신비로운 선언들을, 현대의 구도자가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일곱 개의 빛나는 보석으로 세공한 것과 같습니다. 두 텍스트는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지만, 결국 하나의 동일한 진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즉, 우주는 신성한 마음의 표현이며, 인간은 그 안에서 자신의 정신을 변성시킴으로써,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를 완성시키는 위대한 작업에 동참할 수 있는 공동-창조주라는 것입니다.



해설 15-2. 현대인을 위한 가르침


우리는 지금까지의 여정을 통해, 우주와 우리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일곱 개의 위대한 헤르메스 원리를 하나씩 탐험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됨을 배웠고(정신의 원리), 하늘과 땅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임을 알았으며(상응의 원리), 모든 것이 끊임없이 진동하고(진동의 원리), 대극의 춤을 추고(극성의 원리), 리듬을 타고 오르내리며(리듬의 원리), 엄격한 인과의 법칙 아래(원인과 결과의 원리) 창조적인 성의 원리(성의 원리)를 통해 현현함을 목격했습니다.


이제 이 모든 지혜의 구슬들을 하나의 실로 꿰어, 현대인이 자신의 삶 속에서 직접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마스터키’로 만들 차례입니다. 『키발리온』의 마지막 장이 제시하는 공리들은, 바로 이 일곱 가지 원리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적인 삶의 태도와 실천 방안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정신적 변성술’, 즉 우리 자신의 의식을 다스리는 기술로 귀결됩니다.


내면세계의 주인이 되는 길


헤르메스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은, 우리가 외부 세계의 희생자가 아니라 우리 내면세계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는 외부의 조건이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정신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키발리온』은 이 내면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세 가지 핵심적인 기술을 제시합니다.


진동 조절의 기술 (감정 다스리기):

“당신의 기분이나 정신 상태를 바꾸려면, 당신의 진동을 바꾸어라.”

이것은 우리가 감정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감정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불안이나 분노와 같은 낮은 진동수의 감정이 우리를 덮칠 때, 우리는 더 이상 그 감정에 휩쓸려 가는 대신, 의식적으로 우리의 주의를 평화, 용기, 감사와 같은 높은 진동수의 상태로 향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낄 때, 잠시 멈추어 가장 평화로웠던 순간을 생생하게 떠올리거나, 잔잔한 음악을 듣거나, 자연 속을 걷는 행위는, 우리 정신의 진동수를 의도적으로 바꾸는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극성 전환의 기술 (부정성을 긍정성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죽이려 애쓰지 말고, 그 극성을 바꾸어라.”

이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습관을 다루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두려움과 싸우는 것은, 오히려 두려움에 더 큰 에너지를 부여할 뿐입니다. 헤르메스주의자는 어둠을 쓸어내기 위해 빗자루를 들지 않고, 그저 창문을 열어 빛을 들여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두려움을 느낄 때, 의식적으로 그 반대 극인 ‘용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용감한 행동을 상상하고, 용기 있는 사람처럼 자세를 바꾸고, 용기를 북돋는 말을 되뇌는 것을 통해, 우리는 정신의 저울을 두려움에서 용기 쪽으로 점차 기울게 할 수 있습니다.


리듬 중화의 기술 (평정심 유지하기):

“더 높은 차원으로 상승함으로써, 낮은 차원의 고통을 피하라.”

삶은 필연적으로 상승과 하강의 리듬을 탑니다. 우리는 이 리듬 자체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것에 휩쓸리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이 ‘중화의 기술’은, 감정의 추가 격렬하게 흔들릴 때, 우리 의식의 중심을 더 높은 곳, 즉 내면의 고요한 ‘관찰자(Observer)’의 위치로 들어 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슬픔이나 기쁨을 관찰하되,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나는 슬프다”가 아니라, “내 안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이 지나가고 있음을 본다”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감정과 의식적인 거리를 둘 때, 우리는 파도에 휩쓸리는 대신 그 위에서 유유히 파도를 타는, 흔들림 없는 평정심을 얻게 됩니다.


운명의 건축가가 되는 길


내면의 주인이 된 자는, 이제 자신의 외부 현실, 즉 운명의 주인이 되는 길로 나아갑니다.


원인의 창조자 되기:

“더 높은 법칙들을 사용하여 더 낮은 법칙들을 극복하라.”

‘원인과 결과의 원리’는 모든 것이 필연적임을 가르치지만, 동시에 우리가 새로운 원인을 창조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의 원인들이 만들어낸 현재의 결과 속에서 수동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헤르메스주의자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내리는 의식적인 선택, 즉 생각과 말과 행동이 미래를 결정하는 새로운 원인이 됨을 압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희생자가 아니라, 미래의 건축가입니다. 예를 들어,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원망하며 사는 대신, “나는 나의 경험을 통해 타인을 돕는 사람이 되겠다”는 새로운 원인을 설정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때, 그는 과거의 인과 사슬을 끊고 완전히 새로운 운명의 길을 창조하게 됩니다.


창조적 성(性)의 활용:

모든 창조는 ‘성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신 안에도 의지, 행동, 방출을 담당하는 ‘남성적 원리’와, 상상력, 수용, 양육을 담당하는 ‘여성적 원리’가 존재합니다. 창조적인 삶이란, 이 두 가지 힘을 조화롭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목표를 이루고자 할 때, 먼저 그것이 이미 이루어진 모습을 생생하게 상상하고(여성성), 그 다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강력하게 실행에 옮겨야(남성성) 합니다. 상상력 없는 의지는 맹목적이고, 의지 없는 상상력은 공허합니다. 이 둘의 신성한 결혼을 통해서만, 우리의 비전은 현실이라는 이름의 아이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최종적인 서약: 지식의 사용


이 모든 원리와 기술의 끝에서, 『키발리온』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마지막 공리를 제시합니다. “지식의 소유는, 그것이 행동 안에서의 현현과 표현을 동반하지 않는 한, 헛되고 어리석은 것이다.” 헤르메스 철학은 결코 지적인 유희나 개인적인 만족을 위한 비밀스러운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용되기 위해 의도된’ 살아있는 힘입니다.


우리가 내면의 변성술을 통해 얻은 평화와 지혜, 그리고 힘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헤르메스 비의』의 연금술사가 현자의 돌을 사용하여 세상을 치유하려 했듯이, 우리의 가족과 이웃, 그리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 전체를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었다면, 이제 다른 이의 두려움을 잠재워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에서 조화와 풍요를 창조했다면, 이제 다른 이들이 그들의 삶을 창조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헤르메스 철학의 길이, 이기적인 초월의 길이 아니라, 자비로운 참여의 길인 이유입니다. 진정한 스승은 자신의 등불을 혼자 간직하는 자가 아니라, 그 불로 다른 이들의 꺼져가는 등불에 기꺼이 불을 붙여주는 자입니다. 이 ‘사용의 법칙’을 실천할 때, 비로소 우리의 지식은 생명을 얻고, 우리의 위대한 작업은 그 진정한 의미를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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