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정신적 성

MENTAL GENDER

by DrLeeHC

제14장: 정신적 성 (MENTAL GENDER)


정신 현상에 관한 선들을 따라 현대 사상의 흐름을 따라온 심리학 학생들은, 지난 십 년 또는 십오 년 동안 너무나 강력하게 나타났으며, 이 “두 개의 마음”의 본성과 구성에 관한 수많은 그럴듯한 이론들을 낳은, 이원적-마음 개념의 지속성에 충격을 받는다. 고(故) 톰슨 J. 허드슨은 1893년에 모든 개인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객관적 및 주관적 마음”이라는 그의 잘 알려진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큰 인기를 얻었다. 다른 저자들은 “의식적 및 잠재의식적 마음”, “수의적 및 불수의적 마음”, “능동적 및 수동적 마음” 등에 관한 이론들로 거의 동등한 주목을 받았다. 다양한 저자들의 이론들은 서로 다르지만, “마음의 이원성”이라는 기저의 원리는 남아있다.


헤르메스 철학의 학생은, 각 학파가 자신의 애지중지하는 이론들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각자가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마음에 대한 이 수많은 “새로운 이론들”에 관해 읽고 들을 때, 미소를 짓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학생은 오컬트 역사의 페이지들을 거슬러 올라가, 오컬트 가르침들의 희미한 시작 저편에서, 정신적 차원 위에서의 성의 원리, 즉 정신적 성의 현현이라는 고대의 헤르메스 교리에 대한 언급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조사하면서, 그는 고대의 철학이 “이원적 마음”의 현상을 인식했으며, 그것을 정신적 성의 이론으로 설명했음을 발견한다. 이 정신적 성의 개념은, 방금 언급된 현대 이론들에 익숙한 학생들에게 몇 마디로 설명될 수 있다. 마음의 남성적 원리는 소위 객관적 마음, 의식적 마음, 수의적 마음, 능동적 마음 등에 상응한다. 그리고 마음의 여성적 원리는 소위 주관적 마음, 잠재의식적 마음, 불수의적 마음, 수동적 마음 등에 상응한다. 물론 헤르메스 가르침은 마음의 두 국면의 본성에 관한 수많은 현대 이론들과 동의하지 않으며, 또한 두 각각의 측면에 대해 주장되는 많은 사실들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언급된 이론들과 주장들 중 일부는 매우 억지스럽고 실험과 증명의 시험을 견딜 수 없다. 우리가 동의의 국면들을 지적하는 것은, 단지 학생이 이전에 습득한 지식을 헤르메스 철학의 가르침들과 동화시키는 것을 돕기 위한 목적일 뿐이다. 허드슨의 학생들은 그의 저서 「심령 현상의 법칙」의 두 번째 장 시작 부분에 있는, “헤르메스 철학자들의 신비로운 전문 용어는 동일한 일반적인 개념을 드러낸다” 즉, 마음의 이원성을 드러낸다는 진술을 주목할 것이다. 만일 허드슨 박사가 “헤르메스 철학의 신비로운 전문 용어”의 일부를 해독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면, 그는 “이원적 마음”이라는 주제에 관해 많은 빛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랬다면, 아마도, 그의 가장 흥미로운 저작은 쓰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제 정신적 성에 관한 헤르메스 가르침을 고찰해 보자.


헤르메스 교사들은, 그들의 학생들에게 각자 안에 거주하는 자아에 관한 그들의 의식의 보고를 검토하라고 명함으로써, 이 주제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을 전수한다. 학생들은 내면의 자아에게로 그들의 주의를 돌리도록 인도받는다. 각 학생은 그의 의식이 먼저 그의 자아의 존재에 대한 보고를 그에게 제공함을 보게 된다. 그 보고는 “나는 존재한다(I Am)”이다. 이것은 처음에 의식으로부터 온 마지막 말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나아간 검토는 이 “나는 존재한다”가, 비록 조화롭고 연합하여 작동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 속에서 분리되거나 나뉠 수 있는 두 개의 뚜렷한 부분 또는 측면으로 분리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오직 “나(I)”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신중하고 면밀한 검토는 “나(I)”와 “나(Me)”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 정신적 쌍둥이는 그들의 특징과 본성에 있어 다르며, 그들의 본성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현상들을 검토하는 것은 정신적 영향력의 많은 문제들에 많은 빛을 던져줄 것이다.


우리가 보통 학생에 의해, 그가 의식의 깊숙한 곳으로 탐구를 조금 더 밀어붙이기 전까지는, “나(I)”로 오인되는 “나(Me)”에 대한 고찰로 시작해 보자. 한 사람은 그의 자아를 (그것의 “나(Me)”라는 측면에서) 어떤 느낌, 취향, 좋아함, 싫어함, 습관, 독특한 인연, 특징 등으로 구성된 것으로 생각하며, 이 모든 것이 그의 인격, 즉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진 “자아”를 이룬다. 그는 이러한 감정들과 느낌들이 변하고, 태어났다가 사라지며, 그를 한 감정의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데려가는 리듬의 원리와 극성의 원리에 종속된다는 것을 안다. 그는 또한 “나(Me)”를 그의 마음속에 모인 어떤 지식으로 생각하며, 그리하여 자신을 일부를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한 사람의 “나(Me)”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진행했다. 많은 사람들의 “나(Me)”는 그들의 육체와 그들의 물리적 식욕 등에 대한 그들의 의식으로 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의식은 그들의 육체적 본성과 주로 얽매여 있어서, 그들은 실질적으로 “거기서 산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그들의 개인적인 의복을 그들의 “나(Me)”의 일부로 간주하고, 실제로 그것을 자신들의 일부로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한 작가는 유머러스하게 “인간은 세 부분, 즉 영혼, 육체, 그리고 옷으로 구성된다”고 말했다. 이 “옷-의식적인” 사람들은 난파 시에 야만인들에 의해 그들의 옷이 벗겨진다면 그들의 인격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의복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밀접하게 얽매여 있지 않은 많은 이들조차도, 그들의 몸이 그들의 “나(Me)”라는 의식에 바싹 달라붙어 있다. 그들은 육체와 독립적인 자아를 상상할 수 없다. 그들의 마음은 그들에게 실질적으로 그들의 몸에 “속한 어떤 것”처럼 보이며, 많은 경우에 실제로 그러하다.


그러나 사람이 의식의 척도에서 상승함에 따라, 그는 그의 “나(Me)”를 그의 몸이라는 생각에서 풀어낼 수 있으며, 그의 몸을 그의 정신적인 부분에 “속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때조차도 그는 “나(Me)”를 전적으로 그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한다고 느끼는 정신 상태, 느낌 등과 동일시하기 매우 쉽다. 그는 이러한 내적 상태들을, 단지 그의 정신성의 어떤 부분에 의해 생산되어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즉 그의 것이고 그의 안에 있지만, 여전히 “그 자신”은 아닌 “사물들” 대신에,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기 매우 쉽다. 그는 의지의 노력에 의해 이러한 내적 감정 상태들을 바꿀 수 있으며, 같은 방식으로 정확히 반대되는 본질의 느낌이나 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본다. 그럼에도 동일한 “나(Me)”는 존재한다. 그리하여 얼마 후에 그는 이러한 다양한 정신 상태, 감정, 느낌, 습관, 특질, 특징, 그리고 다른 개인적인 정신적 소유물들을 제쳐둘 수 있게 된다. 그는 그것들을 가치 있는 소유물뿐만 아니라, “내가-아닌” 진기한 물건들과 장애물들의 수집품 속에 제쳐둘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학생 쪽의 많은 정신 집중과 정신 분석 능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과업은 진보한 학생에게는 가능하며, 그다지 진보하지 않은 이들조차도, 상상 속에서, 그 과정이 어떻게 수행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다.


이 제쳐두는 과정이 수행된 후에, 학생은 자신을 그 “나(I)”와 “나(Me)”라는 이중적 측면에서 고찰될 수 있는 “자아”의 의식적인 소유 속에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나(Me)”는 생각, 개념, 감정, 느낌, 그리고 다른 정신 상태들이 생성될 수 있는 어떤 정신적인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것은 고대인들이 칭했듯이, 온갖 종류의 정신적 자손을 생성할 수 있는 “정신적 자궁”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것은 의식에 잠재적인 창조와 정신적 자손 생성의 힘을 가진 “나(Me)”로서 보고한다. 그 창조적 에너지의 힘은 엄청나게 느껴진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자신의 정신적 창조물들을 존재 속으로 불러오기 전에, 자신의 “나(I)” 동반자로부터, 혹은 다른 어떤 “나(I)”로부터 어떤 형태의 에너지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의식은 정신적 작업과 창조적 능력에 대한 엄청난 역량의 깨달음을 가져온다.


그러나 학생은 곧 이것이 자신의 내적 의식 안에서 발견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나(Me)”로 하여금 어떤 창조적인 선들을 따라 행동하도록 의욕할 수 있으며, 또한 옆으로 비켜서서 그 정신적 창조를 목격할 수도 있는 어떤 정신적인 것이 존재함을 발견한다. 자기 자신의 이 부분을 그는 자신의 “나(I)”라고 부르도록 가르침받는다. 그는 의지대로 그 의식 속에 머무를 수 있다. 그는 거기서, 정신적 작용에 수반되는 점진적인 과정이라는 의미에서의 생성하고 능동적으로 창조하는 능력의 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나(I)”에서 “나(Me)”로 에너지를 투사하는 능력, 즉 정신적 창조가 시작되고 진행되도록 “의욕하는” 과정의 감각과 의식을 발견한다. 그는 또한 “나(I)”가 옆으로 비켜서서 “나(Me)”의 정신적 창조와 생성의 작용들을 목격할 수 있음을 발견한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이 이중적 측면이 있다. “나(I)”는 정신적 성의 남성적 원리를 나타내고, “나(Me)”는 여성적 원리를 나타낸다. “나(I)”는 존재의 측면을 나타내고, “나(Me)”는 생성의 측면을 나타낸다. 당신은 상응의 원리가, 우주들의 창조가 수행되는 위대한 차원 위에서 그러하듯이, 이 차원 위에서도 작동한다는 것을 주목할 것이다. 둘은 종류에 있어서는 유사하지만, 등급에 있어서는 매우 다르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아래에서와 같이 위에서도.”


마음의 이러한 측면들, 즉 남성적 및 여성적 원리들, “나(I)”와 “나(Me)”는, 잘 알려진 정신적 및 심령적 현상들과 관련하여 고찰될 때, 정신적 작용과 현현의 이러한 희미하게 알려진 영역들에 대한 마스터키를 제공한다. 정신적 성의 원리는 정신적 영향력 등의 현상들의 전체 분야의 기저에 있는 진리를 제공한다.


여성적 원리의 경향은 항상 인상을 받는 방향으로 향하는 반면, 남성적 원리의 경향은 항상 내어주거나 표현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여성적 원리는 남성적 원리보다 훨씬 더 다양한 작용 분야를 가진다. 여성적 원리는 상상력의 작업을 포함하여, 새로운 생각, 개념, 아이디어들을 생성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남성적 원리는 그 다양한 국면들에서의 “의지”의 작업에 만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적 원리의 의지의 능동적인 도움 없이는, 여성적 원리는 외부로부터 받은 인상들의 결과인 정신적 이미지들을 생성하는 것에 만족하고 쉬는 경향이 있으며, 독창적인 정신적 창조물들을 생산하지 않는다.


어떤 주제에 대해 지속적인 주의와 생각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들은 두 정신적 원리 모두를 능동적으로 사용한다. 즉, 정신적 생성의 작업에서는 여성적인 것을, 그리고 마음의 창조적인 부분을 자극하고 활력을 불어넣는 데서는 남성적 의지를 사용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제로는 남성적 원리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다른 마음들의 “나(I)”로부터 그들의 “나(Me)”에 주입된 생각들과 아이디어들에 따라 사는 것에 만족한다. 그러나 이 주제의 이 국면에 머무르는 것이 우리의 목적은 아니며, 이는 우리가 정신적 성에 관해 당신에게 제공한 열쇠를 가지고, 어떤 좋은 심리학 교과서에서든 연구될 수 있다.


심령 현상의 학생은, 텔레파시, 생각 전이, 정신적 영향력, 암시, 최면술 등의 제목 아래 분류된 경이로운 현상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다양한 “이원적 마음” 교사들의 이론들 아래에서 이러한 다양한 현상 국면들에 대한 설명을 찾아왔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그들이 옳다. 두 개의 뚜렷한 정신 활동 국면의 현현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학생들이 이러한 “이원적 마음들”을 진동과 정신적 성에 관한 헤르메스 가르침의 빛 속에서 고찰한다면, 그들은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열쇠가 바로 손안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텔레파시 현상에서는, 남성적 원리의 진동 에너지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여성적 원리를 향해 투사되고, 후자가 그 씨앗-생각을 받아들여 그것을 성숙하게 발전시키도록 허용하는지가 보여진다. 같은 방식으로 암시와 최면술이 작동한다. 암시를 주는 사람의 남성적 원리는 진동 에너지 또는 의지-힘의 흐름을 다른 사람의 여성적 원리를 향해 지시하며, 후자는 그것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이렇게 심어진 아이디어는 자라나고 발전하며, 시간이 지나면 그 개인의 정당한 정신적 자손으로 간주되지만, 실제로는 참새 둥지에 놓인 뻐꾸기 알과 같아서, 정당한 자손을 파괴하고 제집처럼 편안하게 지낸다. 정상적인 방법은, 한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남성적 및 여성적 원리들이 서로 협응하고 조화롭게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평균적인 사람의 남성적 원리는 너무 게을러서 행동하지 않으며, 의지-힘의 발현이 너무 미미하다. 그 결과 그러한 사람들은 거의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의지에 의해 지배되며,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그들의 생각과 의지를 하도록 허용한다. 평균적인 사람이 수행하는 독창적인 생각이나 독창적인 행동은 얼마나 적은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들보다 더 강한 의지나 마음을 가진 다른 사람들의 단순한 그림자와 메아리가 아닌가? 문제는, 평균적인 사람이 거의 전적으로 자신의 “나(Me)” 의식 속에 거주하며, 그가 “나(I)”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마음의 여성적 원리 안에 극성화되어 있으며, 의지가 기거하는 남성적 원리는 비활성 상태로 남아있고 사용되지 않도록 허용된다.


세상의 강한 남성과 여성들은 변함없이 의지의 남성적 원리를 현현하며, 그들의 힘은 이 사실에 실질적으로 의존한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마음에 만들어진 인상들 위에서 사는 대신, 그들은 의지로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며, 원하는 종류의 정신적 이미지들을 얻고, 더욱이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 또한 지배한다. 강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의 씨앗-생각을 대중의 마음에 심어, 후자로 하여금 강한 개인들의 욕망과 의지에 따라 생각들을 하게 하는지 보라. 이것이 대중들이 그토록 양과 같은 피조물인 이유이며, 결코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창안하거나 자신들의 정신 활동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이다.


정신적 성의 현현은 일상생활 속 우리 주위 모든 곳에서 주목될 수 있다. 매력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각인시키는 방식으로 남성적 원리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대로 울거나 웃게 만드는 배우는 이 원리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성공적인 웅변가, 정치가, 설교가, 작가 또는 대중의 주목을 받는 다른 사람들도 그러하다.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독특한 영향력은, 위에서 지시된 진동의 선들을 따라, 정신적 성의 현현 때문이다. 이 원리 안에, 일반적으로 최면술이라는 이름 아래 묶이는 현상들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매력, 개인적인 영향력, 매혹 등의 비밀이 있다.


일반적으로 “심령적”이라고 말해지는 현상들에 익숙해진 학생은, 과학이 “암시”라고 명명한 그 힘에 의해 상기 현상에서 수행되는 중요한 부분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 용어는 아이디어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전달되거나 “각인되어”, 두 번째 마음으로 하여금 그에 따라 행동하게 하는 과정 또는 방법을 의미한다. 암시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암시가 기저에 있는 다양한 심령적 현상들을 지성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진동과 정신적 성에 대한 지식은 암시의 학생에게 훨씬 더 필요하다. 암시의 전체 원리는 정신적 성과 진동의 원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암시의 저자들과 교사들이, 정신적 인상, 또는 암시를, “주관적 또는 불수의적” 마음에 만드는 것은 “객관적 또는 수의적” 마음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과정을 묘사하거나, 우리가 그 아이디어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자연 속의 어떤 비유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헤르메스 가르침의 빛 속에서 그 문제를 생각한다면, 당신은 남성적 원리의 진동 에너지에 의한 여성적 원리의 활성화가 자연의 보편적 법칙들에 따른 것이며, 자연 세계가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수많은 비유들을 제공한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헤르메스 가르침은 우주의 바로 그 창조가 동일한 법칙을 따르며, 모든 창조적 현현에서, 영적, 정신적, 그리고 물리적 차원들 위에서, 항상 이 성의 원리, 즉 남성적 및 여성적 원리들의 이 현현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아래에서와 같이, 위에서도.” 그리고 이보다 더, 일단 정신적 성의 원리가 파악되고 이해되면, 심리학의 다양한 현상들은 매우 어둠 속에 있는 대신, 즉시 지성적인 분류와 연구가 가능하게 된다. 그 원리는 실천에서 “잘 작동하는데”, 그것이 삶의 불변하는 보편적 법칙들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신적 영향력이나 심령 활동의 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확장된 논의나 설명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이 주제에 관해 쓰이고 출판된 많은 책들이 있으며, 그들 중 다수는 꽤 좋다. 이 다양한 책들에 기술된 주요 사실들은 정확하지만, 여러 저자들이 자신들의 애지중지하는 여러 이론들로 그 현상들을 설명하려 시도했다. 학생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스스로를 숙지할 수 있으며, 정신적 성의 이론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상충하는 이론과 가르침들의 혼돈에서 질서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며, 더욱이 만일 그가 그렇게 기운다면 쉽게 그 주제의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저작의 목적은 심령 현상에 대한 확장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학생에게 그가 탐험하고자 할지도 모르는 지식의 신전의 부분들로 이끄는 수많은 문들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는 『키발리온』의 이 고찰에서, 많은 당혹스러운 어려움들을 걷어내는 데 기여할 설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느낀다. 즉, 많은 문들을 열 열쇠이다. 만일 우리가 학생의 손에 그가 관심 있을지도 모르는 주제의 어떤 국면에 관해서든 완전히 스스로를 숙지할 수 있는 수단을 놓아준다면, 심령 현상과 정신 과학의 수많은 특징들 모두에 관해 자세히 들어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키발리온』의 도움으로, 사람은 어떤 오컬트 도서관이든 새로이 통과할 수 있으며, 이집트로부터 온 오래된 빛이 많은 어두운 페이지들과 모호한 주제들을 비출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우리는 새로운 철학을 설명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들을 명확하게 만들고, 다른 이론들과 반대되는 교리들의 위대한 조화자로서 기여할, 위대한 세계처럼 오래된 가르침의 개요를 제공하러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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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14-1. 지혜의 계보와 비교 철학


『키발리온』의 마지막 원리인 ‘성의 원리’가 그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마침내 모든 창조와 변성의 가장 내밀한 작업실로 들어서게 됩니다. 제13장이 이 원리가 물리적, 정신적, 영적 모든 차원에서 작동하는 보편적인 법칙임을 선언했다면, 제14장 「정신적 성(Mental Gender)」은 바로 그 위대한 법칙이 우리 인간의 ‘정신’이라는 소우주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해부하는, 가장 심오하고도 실천적인 심리학적 지도를 제공합니다. 저자들은 우리의 마음이 결코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나(I)’와 ‘나(Me)’라는 두 개의 뚜렷한 측면으로 이루어진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이 ‘나’와 ‘나’는, 각각 헤르메스주의의 ‘남성적 원리’와 ‘여성적 원리’에 완벽하게 상응합니다.


이 고대의 통찰은, 20세기에 이르러 스위스의 위대한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Carl G. Jung)에 의해 현대적인 언어로 재발견되고 체계화되었습니다. 융이 제시한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 이론은, 『키발리온』의 ‘정신적 성’ 개념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심리학적 주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주해의 목표는, 『키발리온』이 묘사하는 ‘나’와 ‘나’의 역동적인 관계가 어떻게 융의 아니마/아니무스 이론과 정확히 일치하는지를 밝히고, 이 두 지혜의 흐름을 통해 내면의 신성한 결혼을 이루고 온전한 자아를 실현하는 길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두 개의 마음: ‘나(I)’와 ‘나(Me)’의 발견


『키발리온』은 우리에게, 자신의 의식을 내면으로 돌려 ‘자아(Self)’를 관찰하라고 권합니다. 처음에는 “나는 존재한다(I Am)”는 단일한 의식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이 의식이 두 개의 뚜렷한 측면, 즉 ‘나(I)’와 ‘나(Me)’로 나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나(Me)’는 우리가 보통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그것은 “어떤 느낌, 취향, 좋아함, 싫어함, 습관, 독특한 인연, 특징 등으로 구성”된 우리의 ‘인격(personality)’입니다. 우리의 생각, 감정, 기억, 그리고 육체적 감각 모두가 이 ‘나(Me)’에 속합니다. 이 ‘나(Me)’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극성과 리듬의 원리에 따라 기쁨과 슬픔, 용기와 두려움의 양극단을 오갑니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I)’입니다. ‘나(I)’는 슬픔을 느끼는 ‘나(Me)’를 옆에서 목격하고, 분노를 일으키는 ‘나(Me)’에게 멈추라고 의욕할 수 있습니다. ‘나(I)’는 변화하는 현상의 세계에 속한 ‘나(Me)’와는 다른, 존재의 측면에 속한 순수한 의식의 중심입니다.


헤르메스적 해석: 남성적 ‘나(I)’와 여성적 ‘나(Me)’


『키발리온』은 바로 이 두 측면을 ‘정신적 성’의 원리로 해석합니다.


‘나(Me)’는 ‘여성적 원리’를 대표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생각, 개념, 아이디어들을 생성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정신적 자궁(mental womb)”입니다. 여성적 원리의 경향은 “언제나 인상을 받는 방향으로 향”하며, 외부 세계와 다른 마음들로부터 온갖 종류의 생각과 감정의 씨앗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나(I)’는 ‘남성적 원리’를 대표합니다. 그것은 ‘존재의 측면’이며, “의지의 작업”을 통해 여성적 원리에게 에너지를 투사하고 창조적 활동을 시작하게 하는 힘입니다. 남성적 원리의 경향은 “언제나 내어주거나 표현하는 방향으로 향”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전적으로 자신의 “나(Me) 의식” 속에 거주하며, 자신이 “나(I)”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여성적 원리 안에 극성화되어, 외부로부터 주입된 생각과 감정에 따라 수동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단순한 그림자와 메아리”가 되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힘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반면, “세상의 강한 남성과 여성들”은 변함없이 “의지의 남성적 원리를 현현”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지배당하는 대신,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지배합니다.


융의 재발견: 의식(남성성)과 아니마/아니무스(여성성/남성성)


이러한 『키발리온』의 통찰은 융 심리학의 구조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상응합니다. 융의 모델에서, 의식의 중심인 ‘자아(Ego)’는 『키발리온』의 남성적 원리인 ‘나(I)’와 유사한 역할을 합니다. 자아는 의지를 가지고,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정신의 다른 부분들을 통제하려 합니다.


반면, ‘나(Me)’가 상징하는, 생각과 감정, 상상력이 생성되는 수용적인 정신의 장(場)은, 융이 말하는 ‘무의식’, 특히 그 안에 존재하는 내면의 이성(異姓) 인격인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영역과 깊이 연결됩니다.


남성의 경우, 그의 의식적인 자아(나/남성성)는 논리적이고 능동적인 경향을 띱니다. 그의 무의식 속에는, 그의 모든 감성과 관계성, 그리고 창조적 영감을 담고 있는 여성적 인격, 즉 ‘아니마’(나/여성성)가 존재합니다. 『키발리온』이 여성적 원리가 남성적 원리의 도움 없이는 “독창적인 정신적 창조물들을 생산하지 않는다”고 말했듯이, 남성의 아니마 또한 의식적인 자아(나)와의 건강한 관계 없이는 긍정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종종 변덕스럽고 파괴적인 감정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진정한 창조는, 남성의 자아가 자신의 내면 여인인 아니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녀가 잉태한 영감의 씨앗을 자신의 의지로 현실 속에 구현할 때 일어납니다.


여성의 경우, 그녀의 의식적인 자아(나/여성성)는 관계지향적이고 수용적인 경향을 띱니다. 그녀의 무의식 속에는, 그녀의 모든 신념과 의견, 그리고 목표 지향적인 힘을 담고 있는 남성적 인격, 즉 ‘아니무스’(나/남성성)가 존재합니다. 여성의 아니무스 또한 의식적인 자아와의 소통 없이는, 독단적이고 비판적인 ‘의견 뭉치’로 나타나 그녀의 자발적인 삶을 마비시키는 부정적인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실현은, 여성의 자아가 자신의 내면 남성인 아니무스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깊은 가치와 신념을 발견하고, 그것을 세상에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 힘을 얻을 때 가능해집니다.


텔레파시와 암시: 정신적 성의 역학


『키발리온』은 텔레파시, 암시, 최면술과 같은 모든 ‘정신적 영향력’의 현상들이 바로 이 정신적 성의 원리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의 ‘남성적 원리(의지)’가 진동 에너지의 흐름을 다른 사람의 ‘여성적 원리(수용적 마음)’를 향해 지시하면, 후자는 그 ‘씨앗-생각’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라는 개념과 매우 유사합니다. 이는 한 사람이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나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고, 상대방이 그 감정이나 생각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고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강력한 심리적 메커니즘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분노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을 교묘하게 자극하여 상대방이 대신 화를 내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이때, 상대방은 마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분노에 사로잡힌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이는 첫 번째 사람의 남성적 원리(의도)가 두 번째 사람의 여성적 원리(감정)에 영향을 미친, 일종의 부정적인 ‘정신적 성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키발리온』은 바로 이러한 무의식적인 지배와 조종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우리 각자가 자신의 남성적 원리인 ‘의지’를 깨워, 다른 마음으로부터 오는 원치 않는 암시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 『키발리온』의 ‘정신적 성’에 대한 가르침은, 우리에게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고 통합하기 위한 가장 강력하고도 정교한 심리학적 지도를 제공합니다. 진정한 정신적 건강과 창조성은, 우리 내면의 ‘나(I)’와 ‘나(Me)’, 즉 의지와 상상력, 남성성과 여성성이 서로를 지배하려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협력하며,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신성한 결혼’을 이룰 때 비로소 피어납니다. 이 내면의 통합이야말로, 우리를 외부의 영향력에 휩쓸려 다니는 수동적인 존재에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운명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능동적인 창조주로 거듭나게 하는, 가장 위대한 정신적 변성술입니다.



해설 14-2. 현대인을 위한 가르침


헤르메스 철학이 수천 년 전에 ‘나(I)’와 ‘나(Me)’라는 신비로운 언어로 묘사했던 정신의 이중성은, 현대 심리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인 ‘의식’과 ‘잠재의식’의 관계 속에서 그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키발리온』의 제14장은 단순한 철학적 사변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내면에서 매 순간 벌어지고 있는 드라마, 즉 의식적인 ‘나’와, 그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잠재의식적인 ‘그녀’ 혹은 ‘그’가 어떻게 서로 협력하거나 갈등하는지에 대한 가장 실용적인 안내서입니다. 이 두 힘의 조화로운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창조하고, 잠재력을 온전히 실현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과제입니다.


내 안의 두 배우: 의식(‘나, I’)과 잠재의식(‘나, Me’)


우리의 ‘의식적 마음’, 즉 『키발리온』이 ‘나(I)’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정신의 표면에 떠 있는 빙산의 일각과 같습니다. 그것은 이성적이고, 분석적이며, 의지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짜며, 무엇을 할지 선택합니다. 그것은 우리 인격의 선장이자, 우리 삶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이 무대 아래, 즉 의식의 조명 빛이 닿지 않는 곳에는, 훨씬 더 광대하고 강력한 또 다른 배우, 바로 ‘잠재의식적 마음’이 존재합니다. 『키발리온』은 이 부분을 “정신적 자궁”이자, 인상을 받아 아이디어를 잉태하는 ‘나(Me)’라고 묘사합니다. 우리의 잠재의식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모든 경험과 감정, 어린 시절에 형성된 신념, 그리고 우리가 잊어버렸다고 생각하는 모든 기억들을 저장하고 있는 거대한 창고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심장 박동과 호흡을 조절하고, 우리의 습관적인 행동과 감정적 반응을 지배하며, 꿈과 직관을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냅니다. 이 잠재의식이라는 배우는, 비록 무대 전면에 나서지는 않지만, 사실상 우리 삶이라는 연극의 모든 배경과 줄거리, 그리고 분위기를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연출가입니다.


갈등의 드라마: 게으른 왕과 폭주하는 여왕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에 이 두 명의 배우가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내면 왕국에서는 종종 비극적인 갈등의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키발리온』은 “평균적인 사람의 남성적 원리는 너무 게을러서 행동하지 않으며, 의지-힘의 발현이 너무 미미하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적인 ‘나’가 자신의 왕좌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통치도 하지 않는 ‘게으른 왕’과 같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이끌어가는 대신, 그저 잠재의식(나(Me))에 각인된 오래된 습관과 감정적 프로그램에 따라 자동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갑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의 수많은 선택들은 진정한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잠재의식이 보내는 충동에 대한 기계적인 반응일 뿐입니다.


이처럼 왕이 자신의 역할을 포기했을 때, ‘여성적 원리’인 잠재의식은 어떻게 됩니까? 그녀는 외부의 영향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됩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광고, 미디어, 권위자 등)이 심어놓은 “씨앗-생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것이 마치 자신의 생각인 양 키워나갑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단순한 그림자와 메아리”가 되어, 진정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수많은 사람들이 왜 사회적 유행이나 대중의 의견에 그토록 쉽게 휩쓸리는지를 설명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입니다.


조화로운 협력: 창조적인 삶의 열쇠


그렇다면 어떻게 이 내면의 갈등을 끝내고, 조화로운 협력 관계를 구축할 수 있습니까? 그 길은 바로, 게으른 왕을 깨워 자신의 역할을 다하게 하고, 그가 지혜와 사랑으로 자신의 왕국을 다스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각과 관찰: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의 잠재의식적인 패턴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명상이나 자기 성찰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어떤 생각과 감정이 자동적으로 반복되는지를 판단 없이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그것을 ‘나(I)’가 바라보는 ‘나(Me)’의 활동으로 인식합니다.


의지(Will)의 사용:

두 번째 단계는, 『키발리온』이 ‘남성적 원리’의 핵심적인 힘이라고 말하는 ‘의지’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잠재의식에 새로운 씨앗을 의식적으로 심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암시(autosuggestion)’와 ‘확언(affirmation)’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나는 자신감 있고 유능한 사람이다”라는 새로운 생각을 반복적으로 잠재의식에 전달할 때, 우리는 낡고 부정적인 프로그램을 새로운 긍정적인 프로그램으로 덮어쓰기 시작합니다. 이때 의식적인 ‘나’는 씨앗을 뿌리는 농부이며, 잠재의식인 ‘나(Me)’는 그 씨앗을 받아 키워내는 비옥한 토양입니다.


상상력의 활용:

의지가 ‘무엇’을 창조할지를 결정한다면, ‘어떻게’ 창조할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는 것은 여성적 원리인 ‘상상력’의 역할입니다. 우리의 잠재의식은 논리적인 언어보다 생생한 이미지와 감정에 훨씬 더 강력하게 반응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목표가 있다면, 그것이 이미 이루어진 모습을 마음속으로 최대한 생생하게 상상하고, 그때 느낄 기쁨과 감사의 감정을 미리 체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창조적 시각화’는, 의식적인 ‘나’가 잠재의식적인 ‘나(Me)’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신뢰와 수용: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두 힘 사이의 관계가 지배와 복종이 아니라, 신뢰와 협력의 관계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의식적인 ‘나’는 잠재의식의 지혜와 직관을 존중하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잠재의식인 ‘나(Me)’는 의식의 명료한 방향과 인도를 신뢰하고 따라야 합니다. 이 둘이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파트너가 될 때, 우리의 내면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신성한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결국, 『키발리온』의 ‘정신적 성’의 원리는 우리에게, 창조적인 삶의 비밀이 우리 내면의 남성성과 여성성, 즉 의식과 잠재의식의 조화로운 협력에 달려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더 이상 분열된 왕국의 무력한 시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식적인 자각과 의지적인 훈련을 통해, 우리 내면의 두 위대한 배우가 갈등의 드라마를 멈추고, 하나의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며 우리 삶이라는 위대한 걸작을 함께 창조하도록 이끌 수 있습니다. 이 내면의 통합이야말로, 우리를 단순한 피조물에서, 자신의 현실을 빚어내는 진정한 공동-창조주로 거듭나게 하는, 가장 위대한 연금술적 변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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