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야콥 뵈메(Jacob Boehme)의 사상 체계에서 신(神)의 본질과 자기 현현 과정, 그리고 우주 만물이 생성되고 그 구조를 이루는 근원적인 힘인 ‘일곱 자연 성질(Sieben Quellgeister / Natureigenschaften)’과 ‘세 가지 원리(Drei Principien)’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이러한 우주론적 원리들이 구체적인 역사와 존재의 운명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 즉 뵈메가 그리는 거대한 ‘우주 드라마(cosmic drama)’의 주요 장면들을 탐구할 것이다. 이 드라마는 창조의 경이로움에서 시작하여, 자유 의지를 지닌 존재들의 타락과 그로 인한 고통,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신적인 사랑과 지혜를 통한 구원과 회복의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장에서는 먼저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먼저 창조되었으나 교만으로 인해 타락한 천사 세계, 특히 루시퍼(Lucifer)의 이야기를 통해 뵈메가 이해한 선과 악의 투쟁, 그리고 자유 의지의 신비와 위험성을 살펴볼 것이다.
5.1. 천사 세계의 창조와 루시퍼의 타락
야콥 뵈메(Jacob Boehme)의 사유 안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물질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순수한 영적인 존재들, 즉 천사들(angels)의 세계를 먼저 창조하셨다고 본다. 이 천사 세계는 신적인 지혜(Sophia, 소피아)와 빛으로 가득 찬 영광스러운 영역이었으며, 천사들은 각기 다른 계층과 역할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그 영광을 찬양하는 존재들이었다. 뵈메는 이 천사 세계 역시 그의 ‘세 가지 원리(Drei Principien)’와 ‘일곱 자연 성질(Sieben Quellgeister / Natureigenschaften)’의 법칙에 따라 구성되고 운행되었다고 설명한다. 즉, 각 천사 역시 자신의 고유한 본질과 자유 의지(freier Wille)를 지닌 개별적인 존재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넘치는 사랑과 지혜를 나누고, 자신과 교통하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존재들을 창조하고자 하셨다. 천사들은 바로 이러한 신적인 사랑의 첫 번째 대상이자 표현이었다. 그들은 신적인 빛 속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며, 각자의 고유한 특성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신의 영광을 반영했다. 어떤 천사들은 신의 권능을 나타내는 역할을, 어떤 천사들은 신의 지혜를 전달하는 역할을, 또 어떤 천사들은 신의 사랑을 노래하는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이 천사 세계는 질서와 조화, 그리고 기쁨으로 가득 찬 완전한 공동체였다. 마치 거대한 오케스트라에서 수많은 악기들이 각기 다른 소리를 내지만 지휘자의 지휘 아래 하나의 아름다운 교향곡을 만들어내듯이, 천사 세계는 다양한 영적인 존재들이 각자의 고유한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신적인 조화와 아름다움을 이루는 곳이었다. 각 천사는 오케스트라의 한 악기와 같아서, 전체의 하모니에 기여하는 고유한 음색과 선율을 지니고 있었다.
수많은 천사들 가운데서도 특히 뛰어나고 아름다운 빛을 지닌 대천사가 있었는데, 뵈메는 그를 전통적인 이름인 루시퍼(Lucifer, ‘빛을 가져오는 자’라는 뜻)라고 부른다. 루시퍼는 신으로부터 특별한 지혜와 능력, 그리고 아름다움을 부여받은 존재였으며, 천사들의 세계에서 매우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는 마치 새벽 별처럼 찬란하게 빛나며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였다. 한 나라의 왕이 가장 신임하고 능력이 뛰어난 신하에게 많은 권한과 영예를 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듯이, 루시퍼는 그러한 신하처럼 신으로부터 특별한 총애와 능력을 받아 다른 천사들을 이끄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의 아름다움과 지혜는 모든 천사들의 찬탄을 받았다. 그러나 루시퍼에게는 자유 의지가 주어져 있었다. 이 자유 의지는 신이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에게 부여한 가장 큰 선물이지만, 동시에 가장 큰 위험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자유 의지는 신의 뜻에 순종하여 사랑과 조화 속에서 살아갈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자기 자신을 신보다 높이고 신의 질서에 반역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시퍼는 자신에게 주어진 위대한 능력과 아름다움에 도취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빛이 마치 신 자신의 빛과 같다고 착각했으며, 신에게 의존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는 신의 사랑과 지혜가 흘러나오는 근원을 바라보는 대신, 자기 자신의 영광에 만족하고 그것을 더욱 확장시키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이것이 바로 뵈메가 파악한 ‘자기 중심성(Selbstheit)’ 또는 ‘첫 번째 원리(어둠의 원리)’의 유혹에 빠진 모습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칭찬에 도취되어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능력만을 과신하며 교만해지는 모습처럼, 루시퍼는 신으로부터 받은 은총을 감사하기보다는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대신 자기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교만은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더 위대하고 중요한 존재로 착각하게 만들며,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하는 것이었다.
루시퍼의 교만과 자기중심적인 의지는 결국 그로 하여금 신의 질서에 반역하고 자신의 왕국을 세우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그는 신의 사랑과 빛으로부터 돌아서서, 자기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며 어둠의 원리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신적인 중심(divine center)을 버리고 자기 자신의 주변부(periphery)를 중심으로 삼으려고 했으며, 이로 인해 그의 빛은 점차 어두워지고 그의 본성은 왜곡되기 시작했다. 행성이 태양(중심)을 중심으로 공전할 때는 빛과 따뜻함을 받으며 질서 있게 움직이지만, 만약 그 행성이 태양의 궤도를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한다면(자기중심성), 그것은 곧 차갑고 어두운 우주 공간으로 떨어져 방황하게 될 것이다. 루시퍼의 타락은 이와 같이, 신이라는 영적인 태양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삼으려 했던 결과, 빛과 생명을 잃고 어둠과 혼돈 속으로 추락한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뵈메는 루시퍼의 타락이 단순히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천사 세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루시퍼를 따랐던 많은 천사들이 그와 함께 타락하여 어둠의 세력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 사이에 근원적인 분열과 투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루시퍼의 타락은 신의 창조 질서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자, 우주적인 악의 시작을 알리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의 타락은 우주적인 차원에서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으며, 특히 뵈메의 사상 체계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인 ‘분노의 원리(Prinzip des Zornes)’ 또는 ‘신의 분노(Zorn Gottes)’가 특정한 방식으로 ‘고착화(fixation 또는 congealment)’되는 계기가 되었다.
뵈메의 사유 안에서 ‘분노(Zorn)’ 또는 ‘어두운 불(finstere Feuer)’은 신적인 본질 안에 있는 ‘첫 번째 원리(das erste Principium)’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악(evil)은 아니며, 오히려 모든 존재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하고 유지하며, 다른 존재와 구별되기 위해 필요한 근원적인 힘이다. 그러나 루시퍼는 자신의 자유 의지를 오용하여, 신적인 사랑과 빛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의 교만과 자기 중심성을 따르기로 선택했다. 그는 빛의 원리가 제공하는 부드러움과 조화를 거부하고, 오직 첫 번째 원리인 분노의 힘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며 그것을 자기 자신 안에 ‘고착화’시키고 말았다. 이는 마치 액체가 얼어붙어 단단한 고체가 되듯이, 유동적이고 변화 가능했던 분노의 원리가 이제는 경직되고 파괴적인 형태로 굳어져 버린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건강한 자기주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전혀 듣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고집하며 모든 것에 대해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는 과정처럼, 루시퍼 안에서 분노의 원리가 고착화되었다는 것은 그의 존재 전체가 이제는 자기중심적인 어둠과 격렬한 증오, 그리고 파괴적인 욕망에 의해 지배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의 빛은 꺼지고, 그의 지혜는 교활함으로, 그의 능력은 악을 행하는 힘으로 변질되었다.
루시퍼 안에서 분노의 원리가 고착화된 결과는 단순히 그 개인에게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의 영향력 아래 있던 많은 천사들이 그를 따라 타락했으며, 이로 인해 천사 세계의 일부가 빛의 영역으로부터 분리되어 ‘어둠의 왕국(Reich der Finsternis)’ 또는 ‘지옥(Hölle, Hell)’이라고 불리는 영역이 형성되었다. 건강한 사회에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서로 존중되고 조화를 이루지만 만약 어떤 극단적인 이념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되면 그 사회는 자유와 다양성을 잃어버리고 억압과 폭력, 그리고 끊임없는 갈등으로 가득 찬 곳이 될 수 있듯이, 루시퍼의 타락으로 인해 형성된 어둠의 왕국은 신적인 사랑과 조화가 사라지고 오직 자기중심적인 분노와 파괴만이 존재하는 영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뵈메의 관점에서 루시퍼의 타락 이야기는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 철학적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 이야기는 신이 피조물에게 부여한 자유 의지가 얼마나 위대하고도 위험한 선물인지를 보여준다. 자유 의지는 사랑과 선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교만과 반역, 그리고 악을 선택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둘째, 악은 신이 직접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를 가진 피조물이 신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려는 교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악은 선의 결핍 또는 왜곡된 형태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셋째, 루시퍼의 타락은 단순히 천사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간 영혼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내면적인 투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 역시 자신의 자유 의지를 통해 신을 향할 수도 있고, 반대로 자기중심적인 어둠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야콥 뵈메는 천사 세계의 창조와 루시퍼의 타락 이야기를 통해, 그의 우주론적 원리들이 어떻게 구체적인 영적 존재들의 운명 속에서 전개되는지를 보여준다. 루시퍼의 이야기는 빛과 어둠, 사랑과 교만, 순종과 반역이라는 근원적인 대립이 어떻게 발생하며, 자유 의지를 지닌 존재가 어떤 선택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는지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이 천사 세계의 드라마는 이어지는 인간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궁극적인 구원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5.1.1. 루시퍼의 교만과 자기 중심성
앞서 야콥 뵈메(Jacob Boehme)가 묘사한 천사 세계의 창조와 그 안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였던 루시퍼(Lucifer)에 대해 살펴보았다. 루시퍼는 신으로부터 특별한 지혜와 능력, 그리고 아름다움을 부여받았으나, 그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freier Wille)는 그를 영광의 정점에서 비극적인 타락으로 이끌었다. 뵈메의 사유 안에서 루시퍼 타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교만(Hochmut, pride)’과 ‘자기 중심성(Selbstheit, selfhood 또는 self-will)’이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그의 사상 체계에서 악(evil)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는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하며, 동시에 인간의 타락과도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루시퍼는 자신이 지닌 탁월한 아름다움과 능력에 도취되어, 자신을 창조한 신의 영광을 찬양하고 그 뜻에 순종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빛과 생명을 통해 자신이 존재함을 망각하고, 마치 그 모든 것이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뵈메가 파악한 교만의 본질이다. 교만은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더 위대하고 중요한 존재로 착각하게 만들며,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한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칭찬에 도취되어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능력만을 과신하며 교만해지는 모습처럼, 루시퍼는 신으로부터 받은 은총을 감사하기보다는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대신 자기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빛이 너무나 밝아서, 그 빛의 근원인 신의 빛을 더 이상 보려 하지 않았다. 뵈메는 이러한 루시퍼의 교만을 ‘자기 사랑(Selbstliebe, self-love)’의 왜곡된 형태로 보았다. 모든 존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보존하려는 본능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지만, 이 자기 사랑이 균형을 잃고 극단화되어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절대화할 때, 그것은 파괴적인 교만으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루시퍼의 교만은 필연적으로 ‘자기 중심성(Selbstheit)’이라는 또 다른 타락의 요소를 낳았다. 자기 중심성이란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신적인 전체의 질서와 조화로부터 벗어나 자기만의 독립적인 세계를 구축하려는 의지를 의미한다. 루시퍼는 더 이상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기 자신이 자신의 삶과 세계의 주인이 되고자 했다. 그는 신적인 중심(divine center)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의 의지를 중심으로 삼아 회전하기 시작했다. 뵈메의 사상 체계에서 이러한 자기 중심성은 바로 ‘첫 번째 원리(das erste Principium)’, 즉 ‘어둠의 세계(finstere Welt)’ 또는 ‘신의 분노(Zorn Gottes)’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첫 번째 원리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 안으로 끌어당기고 응축시키려는 수축적인 힘이며, 만약 이 힘이 제2원리인 ‘빛의 원리(lichte Welt)’에 의해 조명되고 조화되지 못하면, 그것은 고립과 어둠, 그리고 고통을 낳게 된다. 루시퍼는 바로 이 첫 번째 원리의 유혹에 빠져, 빛의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자신의 어둠 속으로 함몰되어 갔다는 것이다. 밝고 따뜻한 모닥불(신적인 중심, 빛의 세계) 주변에 여러 사람이 모여 온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모닥불의 온기가 자기 혼자만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밀어낸 채 불을 독차지하려고 한다면(자기 중심성), 그는 잠시 동안은 따뜻함을 느낄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고립될 것이다. 또한, 그가 독차지한 불은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온기를 나누어주지 못하고 점차 그 의미를 잃어갈 수 있다. 루시퍼의 자기 중심성은 이와 같이, 신적인 사랑과 지혜의 공동체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고립된 어둠의 세계를 만들어낸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뵈메는 루시퍼가 자신의 상상력(Imagination)을 오용하여, 신적인 지혜(Sophia, 소피아)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신 그 자체로 착각하고, 그 허상에 집착함으로써 타락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창조한 근원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스스로를 신격화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루시퍼의 교만과 자기 중심성의 결과는 비참했다. 그는 신적인 빛과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됨으로써 자신의 영광스러운 빛을 잃어버리고 어둡고 차가운 존재로 변해버렸다. 그의 지혜는 교활함으로, 그의 능력은 파괴적인 힘으로 왜곡되었다. 그는 더 이상 사랑과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불만족과 불안, 그리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그가 추구했던 자기 자신의 왕국은 결국 어둠과 혼돈, 그리고 죽음의 왕국이 되고 말았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가수가 교만과 이기심에 빠져 더 이상 노래 연습을 하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면 그의 목소리가 점차 그 아름다움을 잃고 거칠어지는 것처럼, 루시퍼 역시 신으로부터 받은 아름다운 빛을 자기중심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 빛을 오염시키고 결국에는 상실하게 된 것이다.
뵈메의 관점에서 루시퍼의 교만과 자기 중심성은 단순히 과거의 신화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간 영혼 안에서 지금도 벌어질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하는 메시지이다. 인간 역시 자신의 자유 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교만과 자기 중심성에 빠질 때, 루시퍼와 같이 신적인 생명으로부터 멀어져 어둠과 고통 속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시퍼의 타락 이야기는 모든 인간에게 자기 성찰과 겸손, 그리고 신을 향한 끊임없는 귀의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다.
야콥 뵈메는 루시퍼 타락의 핵심 원인을 ‘교만’과 ‘자기 중심성’에서 찾는다. 루시퍼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위대한 선물인 자유 의지를 오용하여, 자신을 창조한 신을 망각하고 자기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며 신적인 질서로부터 분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빛의 세계로부터 멀어져 어둠의 원리 속에 함몰되었으며, 그 결과 영원한 불안과 고통 속에 갇히게 되었다. 뵈메는 이러한 루시퍼의 이야기를 통해 악의 근원적인 본질과 자유 의지가 지닌 심오한 신비를 탐구하며, 동시에 모든 인간 영혼에게 자기 성찰과 겸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루시퍼의 교만과 자기 중심성은 그의 우주 드라마에서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며, 이후 전개될 인간의 타락과 구원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배경이 된다.
5.1.2. 타락의 결과: 분노의 원리의 고착화
앞서 야콥 뵈메(Jacob Boehme)가 묘사한 루시퍼(Lucifer)의 타락은 그의 교만(Hochmut)과 자기 중심성(Selbstheit)에서 비롯되었음을 살펴보았다. 신적인 빛과 사랑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려 했던 루시퍼의 선택은 단순히 그 개인의 운명만을 바꾼 것이 아니었다. 그의 타락은 우주적인 차원에서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으며, 특히 뵈메의 사상 체계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인 ‘분노의 원리(Prinzip des Zornes)’ 또는 ‘신의 분노(Zorn Gottes)’가 특정한 방식으로 ‘고착화(fixation 또는 congealment)’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마치 맑고 유동적이던 물이 갑자기 차가운 얼음으로 굳어버리는 것과 같은 변화를 의미하며, 이후 모든 존재의 운명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뵈메의 사유 안에서 ‘분노(Zorn)’ 또는 ‘어두운 불(finstere Feuer)’은 신적인 본질 안에 있는 ‘첫 번째 원리(das erste Principium)’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악(evil)은 아니며, 오히려 모든 존재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하고 유지하며, 다른 존재와 구별되기 위해 필요한 근원적인 힘이다. 이 힘은 강력하고, 수축하며,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지니며, 때로는 격렬하고 파괴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신적인 전체 질서 안에서 이 분노의 원리는 ‘빛과 사랑의 원리(das zweite Principium)’에 의해 조명되고 조화롭게 다스려질 때, 오히려 창조적인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었다. 우리 몸 안의 면역체계가 외부의 병균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하고 싸우는 힘(마치 분노의 원리처럼)을 가지고 있어 우리 몸을 보호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만약 이 면역체계가 균형을 잃고 자기 자신의 몸을 공격하게 되면(자가면역질환) 그것은 오히려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과 같다. 원래 천사 세계에서 루시퍼를 포함한 모든 천사들은 이 분노의 원리를 자신의 존재 안에 지니고 있었지만, 동시에 신적인 사랑과 지혜의 빛 안에서 그것을 조화롭게 다스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자유 의지는 이 두 가지 원리 사이에서 올바른 균형을 유지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루시퍼는 자신의 자유 의지를 오용하여, 신적인 사랑과 빛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의 교만과 자기 중심성을 따르기로 선택했다. 그는 빛의 원리가 제공하는 부드러움과 조화를 거부하고, 오직 첫 번째 원리인 분노의 힘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며 그것을 자기 자신 안에 ‘고착화’시키고 말았다. 이는 마치 액체가 얼어붙어 단단한 고체가 되듯이, 유동적이고 변화 가능했던 분노의 원리가 이제는 경직되고 파괴적인 형태로 굳어져 버린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건강한 자기주장(분노의 원리의 긍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전혀 듣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고집하며 모든 것에 대해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분노의 원리의 고착화)를 보이게 되는 과정처럼, 루시퍼 안에서 분노의 원리가 고착화되었다는 것은 그의 존재 전체가 이제는 자기중심적인 어둠과 격렬한 증오, 그리고 파괴적인 욕망에 의해 지배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의 빛은 꺼지고, 그의 지혜는 교활함으로, 그의 능력은 악을 행하는 힘으로 변질되었다. 그는 더 이상 신적인 사랑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으며, 영원한 불안과 고통 속에 갇히게 되었다.
루시퍼 안에서 분노의 원리가 고착화된 결과는 단순히 그 개인에게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의 영향력 아래 있던 많은 천사들이 그를 따라 타락했으며, 이로 인해 천사 세계의 일부가 빛의 영역으로부터 분리되어 ‘어둠의 왕국(Reich der Finsternis)’ 또는 ‘지옥(Hölle, Hell)’이라고 불리는 영역이 형성되었다. 건강한 사회에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서로 존중되고 조화를 이루지만 만약 어떤 극단적인 이념(고착화된 분노의 원리)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되면 그 사회는 자유와 다양성을 잃어버리고 억압과 폭력, 그리고 끊임없는 갈등으로 가득 찬 곳이 될 수 있듯이, 루시퍼의 타락으로 인해 형성된 어둠의 왕국은 신적인 사랑과 조화가 사라지고 오직 자기중심적인 분노와 파괴만이 존재하는 영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뵈메는 이처럼 루시퍼의 타락과 그로 인한 분노의 원리의 고착화를 통해, 우주적인 차원에서 ‘악(evil)’이 어떻게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악은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를 가진 피조물이 신적인 질서를 거부하고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려는 선택의 결과로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악의 핵심에는 바로 빛과 사랑으로부터 분리되어 고착화된 분노의 원리가 자리 잡고 있다. 루시퍼의 타락과 그로 인한 분노의 유산은 이후에 창조될 인간의 운명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인간 아담(Adam) 역시 루시퍼와 유사한 방식으로 유혹에 빠져 타락하게 되며, 그 결과 인간의 본성 안에도 이 고착화된 분노의 원리가 들어와 자리 잡게 되었다고 뵈메는 설명한다. 이로 인해 인간은 내면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끊임없는 갈등과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으며, 자연 만물 역시 인간의 타락과 함께 신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야콥 뵈메의 관점에서 루시퍼의 타락은 단순한 신화적 사건이 아니라, 우주적인 악의 기원과 본질을 설명하는 중요한 열쇠이다. 루시퍼의 교만과 자기 중심성은 신적인 본질 안에 있는 ‘분노의 원리’를 빛과 사랑으로부터 분리시켜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로 인해 어둠과 고통, 그리고 파괴가 지배하는 영역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분노의 원리의 고착화는 이후 모든 존재의 운명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지만, 동시에 뵈메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바로 이 고착화된 어둠을 깨뜨리고 모든 것을 다시 신적인 빛과 사랑으로 회복시키는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루시퍼의 타락 이야기는 절망의 메시지가 아니라, 오히려 구원의 필요성과 그 위대함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5.2. 인간 창조: 신의 형상(Imago Dei)으로서의 아담
루시퍼(Lucifer)와 그를 따르던 천사들의 타락은 신적인 창조 질서에 큰 균열을 가져왔고,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 사이에 근원적인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계획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야콥 뵈메(Jacob Boehme)의 사유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타락한 천사 세계의 자리를 채우고, 나아가 자신의 영광을 더욱 풍성하게 드러낼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기로 계획하셨다. 그 새로운 존재가 바로 인간, 즉 첫 사람 아담(Adam)이었다. 뵈메의 관점에서 인간 창조는 단순한 또 하나의 피조물의 생성이 아니라, 우주적인 드라마의 전개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특히 인간은 ‘신의 형상(Imago Dei, 라틴어)’대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존엄성과 가능성을 부여받은 존재였다. ("The Signature of All Things"의 Chapter 7 제목 "How Adam In Paradise, And How Lucifer Was A Fair Angel, And How They Were Corrupted..."은 아담의 창조와 그의 원래 상태, 그리고 타락의 과정을 루시퍼의 경우와 비교하며 다루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뵈메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타락한 루시퍼와 그의 천사들로 인해 비어버린 하늘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채우고, 다시 한번 신적인 사랑과 지혜를 온전히 반영하는 존재를 통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인간은 단순히 천사들을 대체하는 존재를 넘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신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표현하도록 계획되었다. 어떤 훌륭한 예술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 예기치 않은 사고로 손상되었을 때 그가 단순히 그 작품을 복원하는 것을 넘어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새롭고 발전된 작품을 창조하려는 의지를 가질 수 있듯이, 인간 창조는 루시퍼의 타락이라는 비극적인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적인 능력을 더욱 풍성하게 드러내려는 새로운 계획의 시작으로 이해될 수 있다.
뵈메는 인간 아담이 ‘신의 형상(Imago Dei)’대로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인다. 그의 관점에서 ‘신의 형상’이란 단순히 외적인 모습을 닮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적인 본질의 모든 원리, 즉 앞서 살펴본 ‘세 가지 원리(Drei Principien)’를 자신의 존재 안에 온전히 담고 있는 완전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즉, 원래의 아담은 영적인 몸(geistiger Leib)을 가지고 빛의 세계(제2원리)에 속해 있었으며, 죽음이나 질병, 고통과는 무관한 영광스러운 상태였다. 밝고 투명한 수정이 빛을 아름답게 반사하듯이, 원래 아담의 영적인 몸은 신적인 빛과 영광을 그대로 드러내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그릇과 같았다. 그의 내면에는 첫 번째 원리(어둠의 불, 자기 의지)와 두 번째 원리(빛과 사랑)가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잘 조율된 악기가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이, 아담의 내면은 서로 다른 힘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신적인 생명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상태였다. 그는 분노의 불을 사랑의 빛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아담은 세 번째 원리인 외적인 자연세계를 다스리고 그 안에서 신의 뜻을 이루도록 창조되었다. 그는 자연 만물의 ‘표상(Signatura Rerum)’을 읽어내고 그것들의 숨겨진 본질과 힘을 이해하는 능력을 지녔으며, 마치 에덴동산의 정원사처럼 자연을 사랑으로 돌보고 가꾸며 그 안에서 신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존재였다. 지혜롭고 자비로운 왕이 자신의 나라를 평화롭고 풍요롭게 다스리듯이, 아담은 자연 세계의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과 지혜로 다스리며 신의 창조 질서를 아름답게 유지하는 청지기였다.
뵈메는 원래의 아담이 남성과 여성이 아직 분리되지 않은 ‘양성具有(androgynous, 독일어: mannweiblich – 남성-여성적이라는 의미로 표현됨)’적인 완전한 존재였다고 독특하게 설명한다. 즉, 아담 안에는 남성적인 원리와 여성적인 원리가 그의 존재 안에서 완벽하게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성일체의 상태는 모든 대립과 분열이 극복된 완전한 조화와 자기 충족성을 상징한다. (이러한 아담의 원초적 상태에 대한 논의는 그의 대작 《미스테리움 마그눔, Mysterium Magnum》에서 특히 심도 있게 다루어진다.) 동양 철학에서 태극(太極)이 음(陰)과 양(陽)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힘의 조화로운 결합을 통해 우주 만물을 생성하고 유지한다고 보는 것과 유사하게, 뵈메는 원초적 아담 안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두 가지 근원적인 생명의 원리가 서로를 보완하고 완성하며 완벽한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고 상상했다. 이러한 상태는 모든 가능성을 자신 안에 온전히 품고 있는 완전한 인간상을 나타낸다.
원래의 아담은 신적인 지혜인 ‘소피아(Sophia)’와 깊고 친밀한 관계 속에 있었다. 소피아는 아담에게 ‘하늘의 처녀(himmlische Jungfrau)’이자 그의 영적인 신부로서, 그에게 신적인 지혜와 사랑, 그리고 영원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아담은 소피아와의 합일을 통해 신적인 생명에 참여하며 완전한 행복을 누렸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 깊이 이해하고 신뢰하며 완전한 하나됨을 경험할 때 느끼는 기쁨과 행복처럼, 원래 아담과 소피아의 관계는 이보다 훨씬 더 순수하고 완전한 영적인 사랑의 관계였으며, 그 안에는 어떠한 그림자나 부족함도 없는 신적인 충만함만이 있었다.
이처럼 야콥 뵈메의 사유 안에서 인간 창조, 특히 첫 사람 아담의 원래 상태는 신적인 형상의 완전한 구현이자 모든 가능성이 조화롭게 통합된 영광스러운 모습이었다. 아담은 삼중적인 존재로서 빛의 세계에 속해 있었고, 내면의 모든 힘들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으며, 자연 만물을 사랑으로 다스리는 지혜로운 청지기였다. 또한 그는 양성일체의 완전성과 신적인 지혜 소피아와의 깊은 교제를 누리는 존재였다. 이러한 아담의 원래 모습에 대한 이해는 이후에 다룰 인간의 타락과 그 비참함,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필요성과 그 위대함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5.2.1. 원초적 아담의 양성성(Androgyny)과 영광
야콥 뵈메(Jacob Boehme)가 묘사하는 첫 사람 아담(Adam)의 원래 상태는 단순한 순수함을 넘어, 신적인 완전성과 모든 가능성이 조화롭게 통합된 영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의 인간 창조론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독창적인 개념 중 하나는 바로 ‘원초적 아담의 양성성(Androgyny, 또는 양성일체, 독일어로는 종종 mannweiblich – 남성-여성적이라는 의미로 표현됨)’이다. 뵈메는 타락 이전의 아담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남성적인 원리와 여성적인 원리가 그의 존재 안에서 완벽하게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완전한 상태였다고 보았다. 이러한 양성일체적 완전성은 아담이 지녔던 ‘신의 형상(Imago Dei)’의 중요한 한 측면이었으며, 그가 누렸던 영광과 특권의 근원이었다. (이러한 아담의 원초적 상태에 대한 논의는 그의 대작 《미스테리움 마그눔, Mysterium Magnum》에서 특히 심도 있게 다루어진다.)
뵈메의 사유 안에서 ‘양성성’이란 단순히 생물학적인 남녀 구분이 없었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그것은 우주를 구성하는 근원적인 두 가지 힘, 즉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남성적 원리(예: 이성, 의지, 힘)와 수용적이고 포용적인 여성적 원리(예: 감성, 직관, 부드러움)가 한 존재 안에서 어떠한 대립이나 갈등 없이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아담은 자기 자신 안에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외부의 다른 존재에게 의존하거나 무엇인가를 결핍으로 느끼지 않는 ‘자기 충족적인(self-sufficient)’ 완전성을 누릴 수 있었다. 동양 철학에서 태극(太極)이 음(陰)과 양(陽)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힘의 조화로운 결합을 통해 우주 만물을 생성하고 유지한다고 보는 것과 유사하게, 뵈메는 원초적 아담 안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두 가지 근원적인 생명의 원리가 서로를 보완하고 완성하며 완벽한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고 상상했다. 이러한 상태는 모든 분열과 대립이 극복된 완전한 통일성을 상징하며, 아담이 신적인 전체성과 가장 가깝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어떠한 갈등이나 모순도 경험하지 않았으며, 완전한 평화와 조화 속에서 존재했다.
양성일체의 완전성을 지닌 원초적 아담은 또한 영광스러운 상태에 있었다. 뵈메는 그가 현재 우리가 가진 거칠고 물질적인 육체가 아니라, 빛나고 투명하며 죽음이나 질병에 영향받지 않는 ‘영적인 몸(geistiger Leib)’ 또는 ‘천상의 몸(himmlischer Leib)’을 지니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 몸은 신적인 빛과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마치 천사의 몸처럼 가볍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맑고 투명한 수정 구슬이 빛을 받아 그 내부까지 환하게 빛나는 모습처럼, 원초적 아담의 몸은 신적인 빛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어떠한 어둠이나 불순물도 없는 순수하고 영광스러운 상태였다. 그는 옷을 입을 필요도 없었고, 추위나 더위, 배고픔이나 목마름과 같은 육체적인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
또한, 아담은 신으로부터 특별한 지혜와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는 자연 만물의 ‘표상(Signatura Rerum)’을 꿰뚫어 보고 그것들의 숨겨진 본질과 힘을 이해하는 능력을 지녔으며,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과 지혜로 다스리는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천사들과 자유롭게 교통했으며, 신적인 지혜인 소피아(Sophia)와 깊은 교제 가운데 있었다. 그의 삶은 끊임없는 기쁨과 창조적인 활동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는 마치 에덴동산의 왕이자 제사장처럼 신과 모든 피조물 사이를 연결하는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뵈메는 원초적 아담의 양성일체적 완전성이 신적인 지혜인 ‘소피아(Sophia)’와의 깊은 내적인 합일과 관련된다고 본다. 소피아는 아담에게 ‘하늘의 처녀(himmlische Jungfrau)’이자 그의 영적인 신부로서, 그에게 신적인 지혜와 사랑, 그리고 순결함과 아름다움을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아담은 자신의 내면에서 이 소피아와 하나로 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다른 짝을 찾을 필요가 없는 완전한 상태였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깊이 사랑하고 그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고 느낄 때 더 이상 외로움이나 결핍감을 느끼지 않고 완전한 행복과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듯이, 원초적 아담과 소피아의 관계는 이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고 완전한 영적인 합일의 상태였으며, 이 합일을 통해 아담은 신적인 생명과 지혜를 끊임없이 공급받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와(Eve)가 아담에게서 분리되어 창조된 것은 이미 아담이 자신의 내적인 양성일체적 완전성을 상실하고 소피아와의 관계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뵈메는 해석한다. 즉, 남성과 여성의 분리는 이미 타락의 가능성이 싹트고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원초적 아담이 누렸던 이러한 양성일체의 완전성과 영광은 그 자체로 놀라운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자유 의지(freier Wille)라는 시험대 위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러한 영광스러운 상태에 영원히 머무를 수도 있었지만, 반대로 자신의 자유 의지를 오용하여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가능성 또한 지니고 있었다. 그의 영광은 그가 신의 뜻에 순종하고 소피아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한에서만 지속될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자기 자신에게 도취되거나 외부 세계의 유혹에 빠져 신적인 중심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면, 그는 이 모든 영광을 상실하고 비참한 상태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야콥 뵈메의 사유 안에서 원초적 아담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완벽하게 조화된 양성일체의 존재로서, 빛나는 영적인 몸과 신적인 지혜 및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신적인 지혜인 소피아와 깊은 합일 가운데 완전한 행복과 영광을 누리는 존재였다. 이러한 아담의 원래 모습에 대한 뵈메의 독창적인 묘사는 인간 존재의 이상적인 상태와 그 잠재된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어지는 타락 이야기의 비극성을 더욱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아담이 지녔던 이 원초적 영광은 모든 인간이 회복해야 할 본래적인 모습이며,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바로 이 잃어버린 완전성을 되찾고 신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뵈메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5.2.2. 아담의 타락: 상상력의 오용과 물질세계로의 함몰
앞서 야콥 뵈메(Jacob Boehme)가 묘사한 원초적 아담(Adam)은 ‘신의 형상(Imago Dei)’대로 창조되어 양성일체(androgynous)의 완전성과 신적인 지혜 ‘소피아(Sophia)’와의 깊은 합일 속에서 영광스러운 삶을 누리는 존재였다. 그는 빛의 세계에 속해 있었고, 그의 내면은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스러운 상태는 아담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freier Wille)’라는 시험대 위에 놓여 있었다. 뵈메의 사유 안에서, 아담은 이 자유 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결국 타락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Imagination, 독일어: Einbildung)의 오용’과 그로 인한 ‘물질세계로의 함몰’이다.
뵈메의 관점에서 ‘상상력’은 단순히 인간의 심리적인 공상 능력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신적인 본질 안에도 존재하는 근원적인 창조적 힘이다. 신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에서도 이 상상력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앞서 2.2.2. 항목에서 논의됨) 원래 아담에게 주어진 상상력은 신적인 지혜인 소피아와 조화를 이루며, 신의 뜻에 따라 아름답고 선한 것을 창조하고 경험하는 능력이었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영적인 세계와 교통하고 신적인 아이디어들을 현실 속에서 구현할 수 있었다. 위대한 예술가가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거나 감동적인 그림을 그릴 때 상상력이 보이지 않는 영감을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통로가 되듯이, 원초적 아담의 상상력은 순수하고 신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이 상상력은 동시에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만약 상상력이 신적인 중심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이나 외부의 피조물적인 대상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환상과 욕망을 만들어내고 영혼을 타락으로 이끄는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마치 양날의 검과 같아서, 선을 향할 수도 있고 악을 향할 수도 있는 중립적인 힘이었다.
뵈메에 따르면, 아담의 타락은 그가 자신의 상상력을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내적 세계와 신적인 지혜인 소피아와의 교제에 만족하지 못하고, 점차 자신의 외부에 있는 ‘물질적인 세계(materielle Welt)’ 또는 ‘가시적인 자연(sichtbare Natur)’에 대한 호기심과 갈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이 외적인 세계의 다양하고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맛보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아름다운 정원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살던 사람이 정원 담장 너머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을 품기 시작하면서 점차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자극과 경험을 찾아나서는 모습처럼, 아담의 상태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영적인 풍요로움보다는 외부 세계의 감각적인 매력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소피아의 순수한 형상이 아닌, 물질세계의 유한하고 변화무쌍한 형상들을 떠올리고 그것들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상력의 오용은 아담으로 하여금 점차 신적인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고, 그의 영적인 신부였던 소피아와의 관계를 소홀히 하게 만들었다. 소피아는 순결하고 신적인 지혜이기 때문에, 아담이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자 점차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고 뵈메는 설명한다. 소피아와의 분리는 곧 아담이 신적인 빛과 지혜로부터 단절됨을 의미했다.
아담이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외적인 물질세계에 대한 갈망을 키워나가자, 그의 존재 자체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원래 지니고 있던 빛나고 순수한 ‘영적인 몸(geistiger Leib)’을 점차 잃어버리고, 거칠고 무거운 ‘물질적인 육체(irdischer Leib, earthly body)’를 입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뵈메가 말하는 ‘물질세계로의 함몰’이다. 그는 더 이상 빛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지상의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맑고 투명한 유리잔에 깨끗한 물이 담겨 있을 때는 빛을 아름답게 투과시키지만(원초적 아담의 영적인 몸), 만약 그 유리잔에 흙탕물이 섞여 들어가면 물은 혼탁해지고 더 이상 빛을 제대로 통과시키지 못하게 되는 것(타락한 아담의 물질적인 육체)처럼, 아담의 타락은 그의 존재 자체가 더 낮은 차원의 물질적인 상태로 떨어져 신적인 빛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게 된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아담은 또한 그의 내면에 있던 남성성과 여성성의 완벽한 조화, 즉 ‘양성일체(androgyny)’의 상태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의 내면은 분열되었고, 그는 더 이상 자기 충족적인 존재가 아니라 외부의 도움과 짝을 필요로 하는 불완전한 존재가 되었다. 하와(Eve)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창조된 사건은 바로 이러한 내적인 분열과 양성일체의 상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뵈메는 해석한다.
아담의 타락, 즉 상상력의 오용과 물질세계로의 함몰은 그에게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 그는 신적인 빛과 지혜의 근원인 소피아로부터 분리됨으로써,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과 교제를 잃어버렸다. 둘째, 그의 내면은 더 이상 조화롭지 못하고, 선과 악, 빛과 어둠의 끊임없는 투쟁의 장이 되었다. 그는 불안과 죄책감, 그리고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다. 셋째, 그는 영광스러운 영적인 몸을 잃고 흙으로 만들어진 물질적인 육체를 입게 됨으로써, 질병과 노화, 그리고 결국에는 육체적인 죽음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넷째, 그가 다스려야 할 자연 만물 역시 그의 타락으로 인해 저주를 받고 함께 고통받게 되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척박한 땅에서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은 이러한 자연과의 불화를 상징한다. 뵈메는 아담의 타락이 단순히 개인적인 죄가 아니라, 인류 전체와 우주 만물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우주적인 사건이라고 본다. 이로 인해 모든 피조물은 신음하며 구원을 기다리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야콥 뵈메의 사유 안에서 아담의 타락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고귀한 능력인 ‘상상력’을 잘못 사용하여, 영적인 내면세계와 신적인 지혜인 소피아를 향하는 대신,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외부 세계에 대한 갈망에 빠짐으로써 비롯되었다. 그 결과 아담은 원래 지니고 있던 양성일체의 완전성과 빛나는 영적인 몸을 상실하고, 거칠고 유한한 물질세계 속으로 함몰되어 고통과 죽음, 그리고 신과의 단절이라는 비참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뵈메는 이러한 아담의 타락 이야기를 통해 인간 존재의 연약함과 유혹에 빠지기 쉬운 본성, 그리고 자유 의지가 지닌 책임의 무게를 강조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이 남아 있음을 암시하며, 그의 우주 드라마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희망을 향해 나아감을 보여준다.
5.3. 자연의 타락과 이중성: 선과 악, 사랑과 분노의 투쟁
앞서 야콥 뵈메(Jacob Boehme)가 묘사한 첫 사람 아담(Adam)의 타락은 단순히 인간 개인의 운명만을 바꾼 사건이 아니었다. 그의 타락은 그가 다스리도록 창조되었던 자연 만물 전체에도 깊고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뵈메의 사유 안에서, 인간은 ‘신의 형상(Imago Dei)’대로 창조되어 신과 자연을 연결하는 중요한 중재자이자, 자연 세계의 영적인 중심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타락은 곧 자연 세계의 타락으로 이어졌으며, 원래 조화롭고 완전했던 자연은 이제 그 안에 ‘이중성(duality)’, 즉 선과 악, 사랑과 분노, 빛과 어둠이 서로 투쟁하는 비극적인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뵈메는 원래의 자연, 즉 타락 이전의 에덴동산(Garden of Eden)과 같은 상태는 신적인 지혜(Sophia, 소피아)와 빛으로 가득 찬 영광스러운 곳이었다고 본다. 그곳의 모든 피조물은 서로 조화롭게 공존하며 신의 영광을 찬양했고, 인간 아담은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사랑과 지혜로 다스렸다. 자연은 인간에게 순종했으며, 어떠한 고통이나 죽음, 부패도 존재하지 않았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원에서 모든 식물과 동물들이 서로 해치지 않고 어울려 살며 인간은 그들과 자유롭게 소통하고 교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듯이, 타락 이전의 자연은 이와 같이 모든 것이 완전한 조화와 기쁨 속에 있는 이상적인 상태였다. 그러나 아담이 자신의 자유 의지(freier Wille)를 오용하여 신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중심적인 욕망에 빠져 타락하게 되자, 그가 다스리던 자연 세계 역시 함께 저주를 받게 되었다.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창세기 3:17-18)는 구절은 바로 이러한 자연의 타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뵈메는 해석한다. 인간의 타락은 마치 자연 세계의 왕이 그 지위를 상실하고 반역을 일으킨 것과 같아서, 그가 다스리던 모든 영역에 혼란과 무질서, 그리고 고통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 이후, 자연은 더 이상 순수하고 완전한 상태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자연 만물 안에는 두 가지 상반된 힘, 즉 신적인 ‘사랑(Liebe)’과 ‘빛(Licht)’의 원리(제2원리)와 함께, 루시퍼(Lucifer)의 타락과 아담의 타락을 통해 그 힘이 왜곡되고 고착화된 ‘분노(Zorn)’와 ‘어둠(Finsternis)’의 원리(제1원리)가 서로 뒤섞여 투쟁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자연은 아름다움과 추함, 생명과 죽음, 창조와 파괴라는 이중적인 모습을 동시에 지니게 되었다. 우리가 자연 속에서 아름다운 꽃과 울창한 숲, 평화로운 동물의 모습을 보면서 감탄하지만(빛의 원리의 현현), 동시에 그 안에는 포식자와 피식자의 냉혹한 관계, 질병과 죽음, 그리고 지진이나 홍수와 같은 파괴적인 자연재해(어둠의 원리의 현현)도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뵈메는 이러한 자연의 양면성이 바로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자연 안에 새겨진 선과 악의 투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뵈메는 그의 독특한 개념인 ‘만물의 표상(Signatura Rerum)’을 통해, 이러한 자연의 이중성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즉, 모든 자연물은 그 외적인 형태나 특징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선한 힘과 악한 힘의 투쟁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어떤 식물은 약효를 지녀 생명을 살리지만(사랑의 표상), 어떤 식물은 독을 지녀 생명을 해칠 수 있다(분노의 표상). 이처럼 자연은 더 이상 순수한 신의 계시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이 뒤섞여 싸우는 전쟁터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는 것이다.
타락한 자연 안에서 ‘사랑의 원리’와 ‘분노의 원리’는 끊임없이 서로 투쟁한다. 사랑의 원리는 모든 것을 조화시키고 생명을 주며 신적인 질서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지만, 분노의 원리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수축시키고 파괴하며 혼란을 야기하려고 한다. 이 두 힘의 싸움은 자연 만물의 생성과 소멸, 성장과 부패, 그리고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모든 현상 속에서 나타난다. 봄이 되어 만물이 소생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은 사랑의 원리가 힘을 얻는 모습이지만, 동시에 가뭄이나 병충해로 인해 식물들이 시들고 죽어가는 것은 분노의 원리가 작용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평화롭게 풀을 뜯는 양 떼와 그 양들을 노리는 늑대의 모습은 자연 안에서 벌어지는 생존을 위한 투쟁, 즉 사랑과 분노의 대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뵈메는 성경 로마서의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로마서 8:22)는 구절을 인용하며, 타락한 자연이 마치 해산의 고통을 겪는 여인처럼 신음하며 구원을 갈망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자연은 원래의 영광스러운 상태를 잃어버리고 분열과 고통 속에 있지만, 동시에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회복되어 다시 신적인 조화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깊은 소망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뵈메는 인간의 타락이 자연의 타락을 가져왔듯이, 인간의 구원과 회복 역시 자연의 회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서 분노의 원리를 극복하고 사랑의 원리를 회복하여 ‘새로운 탄생(Wiedergeburt, 중생)’을 경험할 때, 그는 더 이상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을 사랑으로 돌보고 그 안에서 신의 뜻을 이루는 청지기로서의 역할을 회복하게 된다. 인간이 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영적으로 성장해 나갈수록, 그가 다스리는 자연 세계 역시 점차 그 영향을 받아 본래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되찾게 될 것이라고 뵈메는 믿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회복(apokatastasis, 아포카타스타시스)의 때가 이르면, 자연은 더 이상 선과 악의 투쟁의 장이 아니라, 오직 신적인 사랑과 빛만이 가득한 ‘새 하늘과 새 땅(new heaven and new earth)’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한다.
야콥 뵈메가 볼 때, 아담의 타락은 인간 자신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자연 만물 전체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 원래 조화롭고 완전했던 자연 안에 선과 악, 사랑과 분노가 서로 투쟁하는 ‘이중성’을 가져왔다. 타락한 자연은 마치 인간 영혼의 거울처럼, 내적인 분열과 고통, 그리고 구원에 대한 깊은 갈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뵈메는 이러한 자연의 신음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며, 인간의 영적 회복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궁극적으로는 자연 만물 전체의 완전한 회복과 영화(glorification)로 이어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의 이러한 통찰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생태 위기와 자연 파괴의 문제에 대해 깊은 성찰을 제공하며, 인간과 자연의 올바른 관계 회복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5.4.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
야콥 뵈메(Jacob Boehme)가 그리는 거대한 우주 드라마는 창조의 영광에서 시작하여 루시퍼(Lucifer)와 아담(Adam)의 타락, 그리고 그로 인한 자연 만물의 신음이라는 비극적인 국면으로 접어든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뵈메의 사유 안에서 이 모든 어둠과 혼란의 중심에는 신적인 사랑과 지혜의 궁극적인 승리를 향한 계획, 즉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를 통한 구속 사역(redemptive work)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 독일어: Menschwerdung) 사건과 그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은 뵈메 사상 체계의 정점이자 모든 존재에게 구원과 회복의 길을 여는 결정적인 전환점이다. 그의 저작 《성육신론, Von der Menschwerdung Jesu Christi》 (1620)은 바로 이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으며, 그의 모든 사상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루시퍼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신적인 본질 안의 ‘첫 번째 원리(das erste Principium)’, 즉 ‘분노의 불(Zornfeuer)’이 왜곡되고 고착화되어 어둠의 세계가 확장되었으며, 인간과 자연은 신적인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고통과 죽음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피조물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결코 이 어둠의 속박에서 벗어나 원래의 영광스러운 상태를 회복할 수 없었다. 따라서 타락한 세계를 구원하고 신적인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적인 본질 그 자체로부터의 직접적인 개입, 즉 성육신이라는 경이로운 사건이 필요했다고 뵈메는 설명한다.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때 밖에서 누군가가 튼튼한 밧줄을 내려주어야만 구조될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죄와 죽음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진 인류와 피조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주신 ‘생명의 밧줄’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뵈메는 성육신을 단순한 신화적 사건이나 교리적 개념으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적인 본질 안에서 영원 전부터 계획된 필연적인 과정이자, 사랑과 지혜가 분노와 어둠을 이기고 승리하는 우주적인 드라마의 클라이맥스였다.
뵈메의 관점에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Heilige Dreifaltigkeit)의 두 번째 위격(Person, 페르소나)인 ‘영원한 말씀(das ewige Wort, 그리스어: Logos, 로고스)’ 또는 ‘신의 아들(Der Sohn Gottes)’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사건이다. 이 영원한 말씀은 모든 창조의 원형(archetype)이자 신적인 지혜(Sophia, 소피아)의 표현이며, ‘빛과 사랑의 원리(das zweite Principium)’의 중심이다. 그리스도는 또한 ‘두 번째 아담(second Adam)’으로서, 첫 번째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고 타락한 인간성을 새롭게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다. 첫 번째 아담이 자신의 자유 의지(freier Wille)를 오용하여 불순종의 길을 걸었다면,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새로운 인류의 시작이 되셨다는 것이다. 어떤 가문의 첫째 아들(첫 번째 아담)이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고 모든 것을 망쳐 놓았을 때 그 가문의 둘째 아들(두 번째 아담)이 나타나 형의 잘못을 바로잡고 가문의 영광을 되찾는 이야기를 상상해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는 첫 번째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깨어졌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고 모든 인간에게 새로운 생명과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분이다.
뵈메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과정을 매우 독특하고 신비적인 방식으로 설명한다. 그는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타락한 인간의 ‘육과 피(Fleisch und Blut)’를 취하실 때, 단순히 인간의 몸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정화하셨다고 본다. 그는 이 과정을 종종 연금술(alchemy)적인 용어인 ‘틴크투어(Tinctur, 영약 또는 물들임)’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한다. 즉, 그리스도의 신적인 생명이 마치 강력한 영약처럼 타락한 인간의 본성 안으로 스며들어, 그것을 죄와 죽음의 독으로부터 정화하고 신적인 생명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녹슨 쇠붙이(타락한 인간 본성)에 특별한 약품(그리스도의 신성, 틴크투어)을 바르면 녹이 제거되고 다시 빛나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듯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타락으로 인해 오염되고 약해진 인간 본성을 새롭게 하고 신적인 형상을 회복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성과 인성의 신비로운 결합을 통해,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 되셨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다리가 되어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정점은 바로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이다. 뵈메는 이 사건들을 그의 ‘세 가지 원리’ 개념과 연결하여 매우 심오하게 해석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고통과 죽음은, 그가 타락한 인간과 세계의 모든 어둠과 죄악, 그리고 ‘신의 분노(Zorn Gottes)’ 즉, 첫 번째 원리의 파괴적인 힘을 자신의 몸으로 온전히 짊어지시고 그것을 통과하신 과정으로 묘사된다. 그리스도는 이 격렬한 ‘분노의 불(Zornfeuer)’ 속에서 자신의 인간적인 의지를 완전히 아버지 하나님께 복종시키심으로써, 그 분노의 불을 ‘사랑의 불(Liebesfeuer)’ 또는 ‘빛의 생명(Lichtleben)’으로 변형시키셨다는 것이다.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며 내리치는 강력한 번개(신의 분노, 첫 번째 원리의 격렬함)가 땅에 떨어져 모든 것을 파괴할 것 같지만 그 번개가 땅속 깊은 곳에 숨겨진 샘물(그리스도의 신적인 사랑, 두 번째 원리)을 터뜨려 메마른 땅을 적시고 새로운 생명을 싹트게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죄와 죽음의 힘을 자신 안에 받아들여 그것을 생명과 구원의 능력으로 변화시킨 위대한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이 신적인 사랑이 죽음과 어둠의 모든 세력을 이기고 최종적으로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이제 더 이상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을 가지시고, 성령을 통해 모든 믿는 자들의 영혼 안에 새로운 생명과 희망을 불어넣으신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은 단순히 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창조와 만물의 회복을 가져온다고 뵈메는 강조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타락으로 인해 깨어졌던 신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고, 모든 피조물이 원래의 조화와 영광을 되찾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한다. 인간은 믿음과 회개,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합일(unio mystica)을 통해 이 구원의 은총에 참여할 수 있으며, ‘새로운 탄생(Wiedergeburt, 중생)’을 경험하여 신적인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구원의 역사는 궁극적으로 모든 악과 고통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신적인 사랑과 빛 안에서 하나가 되는 ‘새 하늘과 새 땅(new heaven and new earth)’의 도래로 완성될 것이다.
야콥 뵈메의 사유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은 우주 드라마의 핵심이자 모든 존재에게 구원과 희망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길이다.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타락한 인간성과 세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며,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어둠과 죽음의 모든 세력을 이기고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다. 뵈메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그의 독창적인 우주론적, 인간론적 통찰과 결합하여 매우 역동적이고 심오하게 해석하며, 모든 인간이 이 구원의 은총에 참여하여 신적인 생명을 회복하고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의 그리스도론은 그의 사상 체계 전체를 관통하는 빛과 사랑의 메시지이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영적 울림을 준다.
5.4.1. 제2의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 즉 성육신은 타락한 인간과 망가진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다. 야콥 뵈메가 그리스도를 설명할 때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그분을 ‘두 번째 아담’ 또는 ‘새로운 아담’으로 보는 시각이다. 이 생각은 신약성경, 특히 사도 바울이 쓴 편지들, 예를 들어 로마서 5장이나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오래된 신학 이야기를 뵈메가 자신만의 독특한 우주와 인간에 대한 깊은 생각과 합쳐서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첫 번째 아담이 잘못을 저질러서 모든 인류가 죄와 죽음의 그늘 아래 놓였다면,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류의 희망찬 시작이고,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구원의 샘과 같다. 뵈메가 쓴 "만물의 표상"이라는 책 7장의 제목이 "낙원의 아담, 아름다운 천사였던 루시퍼,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타락했는가..."인데, 여기서 첫 아담의 타락 이야기는 결국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왜 필요했는지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뵈메의 생각 속에서, 첫 번째 아담은 원래 ‘하나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져서 빛의 세계에 속한 아주 영광스러운 존재였다. 그는 남자와 여자의 좋은 점을 다 가진 완전한 상태였고, 하나님의 지혜인 소피아와 아주 가깝게 지냈으며, 세상 모든 것을 사랑으로 다스릴 힘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이 자유를 잘못 사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기 욕심에 빠져 타락하고 말았다. 그 결과 아담은 여러 가지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먼저 그는 하나님의 생명과 멀어져 빛의 세계에서 쫓겨나 어둡고 힘든 물질세계로 떨어졌다. 또한 그의 마음속 평화가 깨져 더 이상 평화롭지 않고, 착한 마음과 나쁜 마음, 빛과 어둠이 끊임없이 싸우는 전쟁터가 되었다. 더 나아가 그는 영광스럽고 영적인 몸을 잃고 흙으로 만들어진 약한 육체를 갖게 되어, 병들고 늙어가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아담의 잘못은 그 자신에게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자손, 즉 모든 인류에게 죄짓는 성향과 죽음을 물려주게 되었다. 이렇게 첫 번째 아담의 실패는 모든 인류를 희망 없는 상태로 몰아넣었고,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여기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바로 이렇게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끝없는 사랑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두 번째 아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기로 계획하셨다고 뵈메는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첫 번째 아담이 실패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시작을 이루시는 분이다. 첫 번째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아 타락했다면, 그리스도는 평생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따름으로써 그 잘못을 바로잡으셨다. 이는 마치 중요한 경기에서 한 선수가 규칙을 어겨 팀 전체가 지게 되었을 때, 다른 선수가 나타나 다음 경기에서 모든 규칙을 완벽하게 지키면서도 뛰어난 실력으로 팀을 승리로 이끄는 모습과 같다. 그리스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며 자신의 인간적인 바람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맡기셨다. 또한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심으로써 타락한 인간의 본성 안으로 직접 들어오셔서, 그것을 깨끗하게 하고 새롭게 하셨다. 그는 인간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생명과 빛을 다시 찾아 주셨고,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이 그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다. 이는 오랫동안 물이 말라 쓸모없어진 땅에 새로운 물길을 내어 맑고 깨끗한 물을 흘려보내자, 그 땅이 다시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으로 바뀌어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게 되는 모습과 같다. 결국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와 죽음의 힘을 깨뜨리시고,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새로운 인류의 대표가 되셨다. 첫 번째 아담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었던 것처럼, 이제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 말씀 참조)
뵈메는 그리스도가 단순히 첫 번째 아담의 실패를 되돌리는 것을 넘어, 원래 아담이 가졌던 영광을 회복하고 심지어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영광을 인류에게 가져다주셨다고 본다. 첫 번째 아담이 타락해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지혜 ‘소피아’와의 관계를, 그리스도는 자신의 깨끗함과 완전한 사랑을 통해 완전히 회복하셨을 뿐 아니라, 더욱 깊은 관계로 발전시키셨다. 그리스도는 소피아의 진정한 신랑으로서, 그녀와 영원히 하나 되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모든 믿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은 단순히 이 땅의 존재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 시민권을 얻고 나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하늘나라를 물려받게 된다. 이것은 원래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것이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사람은 단순히 죄를 용서받는 것을 넘어, 점점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완전한 영광을 누리게 된다. (베드로후서 1장 4절 말씀 참조)
하지만 그리스도가 이렇게 위대한 구원을 이루셨다고 해도, 각 사람이 이 구원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과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 그리고 그리스도와 신비롭게 하나 되려는 간절한 마음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뵈메는 강조한다. 사람은 자신의 자유 의지를 사용해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옛날의 자기 모습을 버리며,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야콥 뵈메의 생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타락한 첫 번째 아담의 실패를 이겨내고 새로운 인류의 문을 여신 ‘두 번째 아담’이다. 그는 완전한 순종과 하나님의 생명을 회복시켜서 인간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모습을 되찾아 주셨고, 나아가 원래 아담이 누렸던 영광보다 훨씬 더 큰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게 하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사람들의 대표가 되어 그들을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이끄시며, 그의 구원 이야기는 인류 역사의 슬픈 드라마를 희망과 승리의 이야기로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처럼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이해는 뵈메가 말하는 구원 이야기의 핵심이며, 그의 생각이 얼마나 복음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5.4.2.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 분노의 불을 사랑의 불로 변형
야콥 뵈메의 생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사건(성육신)은 타락한 인간과 망가진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구원 계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 즉 클라이맥스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다. 뵈메는 이 두 사건을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만 보지 않는다. 그는 이것을 우주 전체에서 벌어지는 아주 깊은 영적인 드라마로 이해한다. 마치 하나님 안의 근본적인 힘들이 서로 역동적으로 싸우고 결국 화해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특히 뵈메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모든 것의 첫 번째 바탕이 되는 힘인 ‘하나님의 분노’ 또는 ‘분노의 불’이, 두 번째 바탕이 되는 힘인 ‘하나님의 사랑’ 또는 ‘사랑의 불’로 신비롭게 바뀌는 과정을 설명한다. 이렇게 성질이 바뀌는 것(변형)이야말로 모든 생명체와 세상에 새로운 생명과 희망을 가져다주는 구원의 핵심이다.
뵈메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과 죽음은, 타락한 인간과 세상의 모든 어둠과 죄, 그리고 그것 때문에 터져 나온 ‘하나님의 분노’를 예수님께서 자기 몸으로 전부 짊어지시고 그것을 통과하신 과정이다. 첫 번째 힘인 ‘분노의 불’은 원래 모든 존재가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자기 정체성을 세우며, 악에 맞서 싸우는 데 꼭 필요한 힘이었다. 하지만 타락 때문에 이 힘이 비뚤어지고 굳어져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심판하는 무서운 힘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예수님은 바로 이렇게 격렬하고 파괴적인 분노의 불 한가운데로 직접 들어가셨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아주 비싼 금속을 거대한 용광로에 넣어 불순물을 없애고 순수한 금을 얻는 과정과 같다. 이때 용광로의 뜨거운 불(분노의 불)은 금속에게는 엄청난 고통이지만, 동시에 그 안의 더러운 것들을 태워 없애고 원래의 깨끗함을 되찾게 하는 과정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이와 비슷하게, 인류의 모든 죄와 어둠이라는 불순물을 자기 안에 받아들여 그것을 태우고 깨끗하게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 즉 하나님과 멀어진 느낌, 절망감, 몸의 아픔,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까지 남김없이 겪으셨다. 그는 이 모든 어둠의 무게를 자기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분노의 힘이 가진 파괴적인 기운에 정면으로 맞서고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여셨다. 이것은 단순히 괴로움을 당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분노를 이기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영적 싸움이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히 생명이 끝난 사건이 아니다. 뵈메는 이것을 예수님의 인간적인 의지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고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내려놓음(체념)’의 최고 단계로 이해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그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셨다. 이는 마치 깊은 물에 빠진 사람이 살려고 발버둥 치는 대신, 오히려 자신의 모든 힘을 빼고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길 때 저절로 물 위로 떠오를 수 있는 것과 같다. 예수님의 죽음도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따름으로써, 오히려 죽음을 이기고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는 놀라운 과정이었다. 이렇게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은 첫 번째 힘이 가진 자기중심적이고 모든 것을 갈라놓으려는 힘을 약하게 만들고, 그 안에 갇혀 있던 하나님의 생명의 불꽃을 풀어주셨다. 그의 죽음은 어둠의 세력에게 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과 순종을 통해 어둠을 이기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이 죽음과 어둠, 그리고 분노의 모든 힘을 이기고 최종적으로 승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광스러운 사건이다. 십자가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예수님의 생명은,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로 이전보다 더욱 강력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셨다. 이 부활을 통해, 첫 번째 힘인 ‘분노의 불’은 두 번째 힘인 ‘사랑의 불’ 또는 ‘빛의 생명’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이는 마치 캄캄한 밤이 지나고 찬란한 아침 해가 떠오르며 온 세상을 밝히는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어둠을 몰아내고 새로운 생명의 빛을 가져온 사건이다. 또한, 혹독한 겨울 추위(분노의 불)가 물러가고 따뜻한 봄바람(사랑의 불)이 불어와 모든 생명이 다시 살아나듯이, 부활은 모든 세상에 새로운 희망과 생명력을 불어넣는 우주적인 봄의 시작과 같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시간과 공간, 그리고 육체의 한계에 얽매이지 않는 영광스러운 ‘영적인 몸’을 가지시고,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의 영혼 안에 함께 계시며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과 능력을 주신다. 그의 부활은 단지 그 자신만의 사건이 아니라,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과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뵈메의 책 "만물의 표상" 5장 제목이 "유황의 죽음과, 죽은 몸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 원래의 영광으로 회복되는가에 대하여"인데, 여기서 '유황의 죽음'은 아마도 첫 번째 힘의 지배를 뜻할 수 있고, 그 이후에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 원래의 영광으로 돌아가는 과정, 즉 부활의 신비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뵈메의 생각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바로 ‘불’의 성격 변화이다. 이전까지 첫 번째 힘인 ‘분노의 불’은 주로 모든 것을 심판하고 파괴하는 힘으로 작용했지만,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통해 이 불은 이제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고 새롭게 하며 생명을 주는 ‘사랑의 불’로 바뀌었다. 이는 마치 대장장이가 사용하는 불이 쇠를 녹여 무기를 만들 수도 있지만(파괴적인 힘), 동시에 쇠를 단련시켜 사람들에게 유용한 농기구를 만들 수도 있는 것(창조적인 힘)과 같다. 예수님의 구원 활동은 하나님의 불의 성격을 파괴에서 창조로, 심판에서 구원으로 변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렇게 바뀐 ‘사랑의 불’은 성령을 통해 모든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와, 그들의 죄 많은 본성을 태우고 깨끗하게 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로 가득 채워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간다. 이 불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으로 성장하고 거룩해지기 위한 따뜻하고 강력한 에너지원이 된다.
요약하자면, 야콥 뵈메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하나님 안의 근본적인 두 힘, 즉 ‘분노의 불’과 ‘사랑의 불’ 사이의 극적인 싸움과 궁극적인 화해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모든 죄와 함께 하나님의 분노를 자기 안에 받아들이시고, 자신의 완전한 사랑과 순종을 통해 그 분노의 불을 깨끗하게 하고 생명을 주는 사랑의 불로 바꾸셨다. 그의 부활은 이 사랑의 불이 죽음과 어둠의 모든 힘을 이기고 최종적으로 승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모든 세상에 새로운 생명과 회복의 길을 열어주었다. 뵈메의 이러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깊은 이해는 그의 구원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며, 그의 생각이 가진 역동성과 희망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한다.
5.5. 종말론: 만물의 회복(Apokatastasis)과 새 하늘 새 땅
야콥 뵈메가 보여주는 거대한 우주 이야기는, 창조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시작해서 천사와 인간의 타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큰 흐름을 거쳐, 마침내 모든 것이 완성되는 마지막 단계로 나아간다. 그가 말하는 종말론(세상 마지막에 관한 가르침)은 단순히 시간이 끝나거나 최후의 심판을 무섭게 그리는 것을 넘어선다. 오히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원래의 조화롭고 완전한 모습을 되찾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온 우주가 회복되고 새롭게 바뀌는 희망찬 그림을 보여준다. 뵈메는 이 마지막 완성을 설명하기 위해 옛날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이어져 온 ‘만물의 회복(Apokatastasis, 그리스어: ἀποκατάστασις)’이라는 개념과 성경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이미지를 중요하게 사용한다. ‘만물의 회복’은 모든 것이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의 종말론은 절망적인 파괴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지혜에 대한 깊은 믿음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만물의 회복(Apokatastasis)’이라는 생각은 결국 모든 창조물, 심지어 타락했던 존재들까지도 오랜 시간 깨끗해지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는 하나님과의 조화로운 관계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온 우주적인 구원의 희망을 담고 있다. 뵈메의 글 속에서는 이렇게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가 분명하게 드러나기도 하고, 때로는 슬쩍 암시되기도 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이 단순히 선택받은 몇몇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락 때문에 신음하며 고통받는 세상 모든 것을 향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은 영원히 벌을 주거나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사랑으로 이끌어 원래 창조되었을 때의 완전하고 조화로운 상태로 되돌리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오랫동안 병들어 아팠던 사람이 마침내 모든 병에서 벗어나 완전히 건강해져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모습과 같다. 뵈메가 그리는 만물의 회복은 이와 비슷하게, 죄와 죽음, 그리고 고통 때문에 비뚤어지고 병들었던 온 우주 만물이 그 근본적인 문제로부터 치료받고,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순수하고 영광스러운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이 만물의 회복 과정은 각 존재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하면서 서서히 이루어지며, 오랜 시간에 걸쳐 깨끗해지고 변화하는 과정을 포함할 수 있다. 뵈메는 특히 ‘불’의 이미지를 사용해서 이 깨끗해지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심판의 불이 아니라, 모든 더러운 것과 악의 찌꺼기를 태워 없애고 순수한 본질만을 남기는, 마치 연금술에서처럼 깨끗하게 만드는 불이다. 이 불을 통과함으로써 모든 존재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뵈메는 이렇게 모든 것이 회복되는 과정이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는 것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죄와 고통, 죽음으로 얼룩진 낡은 세계가 완전히 사라지고, 모든 것이 깨끗해지고 새롭게 바뀐 완전한 세계가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세계는 현재의 물질세계가 완전히 부서지고 전혀 다른 무언가가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세계가 마치 불 시험을 통과하듯이 모든 더러운 것과 악한 요소들이 제거되고, 그 본래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이 영광스럽게 드러나는 ‘변화’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고 뵈메는 설명한다. 마치 금이 용광로 속에서 더욱 순수하고 빛나는 금으로 다시 태어나듯이, 지금의 우주 역시 하나님의 불로 깨끗해지는 과정을 통해 새롭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는 마치 애벌레가 고치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변화의 과정을 거쳐 아름다운 나비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과 같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이처럼, 지금의 불완전하고 고통받는 창조 세계가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 원래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되찾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영광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물 가운데 온전히 함께 계시며, 더 이상 죄나 고통, 슬픔이나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빛과 사랑 안에서 영원한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하나님과 직접적이고 아주 가까운 사귐을 나누게 된다. 이곳은 마치 회복된 에덴동산과 같지만, 다시는 타락할 가능성이 없는 훨씬 더 영광스럽고 안전하며 완전한 상태이다. (요한계시록 21장 3절에서 4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보아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아픔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세계에서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천사들의 세계가 완벽한 조화와 하나됨 속에서 함께 살아간다. 더 이상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잡아먹히거나 파괴, 오염이 없으며, 모든 창조물은 각자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면서도 전체적인 조화에 기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영원히 찬양한다. 마치 다양한 악기들이 모여 하나의 아름다운 교향곡을 연주하듯이, 모든 존재는 각자의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표현하며 전체적인 우주적 예배에 참여하게 된다.
뵈메는 이렇게 세상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비록 궁극적인 회복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이 구원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각 개인은 자기 마음속에서부터 ‘새로운 태어남(Wiedergeburt)’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빛과 사랑을 따라 살아가며,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인간은 자신이 타락하기 전의 영광스러운 상태를 회복하는 것을 넘어,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 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뵈메는 희망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우주 이야기가 향하는 마지막 목적지이자 모든 창조 세계의 궁극적인 희망이다.
야콥 뵈메의 종말론은 단순히 미래에 대한 예측이 아니라, 지금의 고통과 불완전함 속에서도 우리가 붙잡아야 할 궁극적인 희망과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깊은 믿음을 보여준다. ‘만물의 회복(Apokatastasis)’과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그의 비전은 모든 존재가 결국에는 원래의 완전함과 조화를 되찾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을 제시한다. 이것은 그의 생각 전체를 꿰뚫는 핵심적인 주제 중 하나이며, 그의 신비주의가 가진 온 세상을 껴안는 넓음과 모든 것을 바꾸는 힘을 잘 드러낸다. 뵈메의 종말론은 우리에게 지금의 삶 속에서 궁극적인 완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용기를 주며, 모든 창조물과 함께 신음하며 기다리는 그 영광스러운 날을 소망하게 한다.
이러한 뵈메의 종말에 대한 희망찬 생각, 특히 ‘만물의 회복(Apokatastasis)’이라는 개념은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구원과 원래 상태로의 복귀를 강조하는데, 이는 전혀 다른 문화 배경을 가진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어떤 생각과도 비교해 볼 만한 흥미로운 점이 있다. 대승불교의 핵심 생각 중 하나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일체중생, 一切衆生)가 원래 부처의 성품(불성, 佛性)을 가지고 있으며, 결국에는 모두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모든 존재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이는 뵈메가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이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뿐 아니라 모든 창조 세계 전체를 향하며, 궁극적으로 모든 존재가 깨끗해지고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비록 ‘하나님’이라는 절대적인 존재 개념이 있느냐 없느냐, 또는 구원의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모든 존재가 지금의 고통과 어리석음(미망, 迷妄)에서 벗어나 원래의 완전하고 깨끗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근본적인 믿음은 두 생각 체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또한, 대승불교의 보살(Bodhisattva, 菩提薩埵) 사상은 자기 혼자만의 깨달음(해탈, 解脫)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구원받을 때까지 고통의 윤회(Saṃsāra, 輪廻) 세계에 머물며 자비(慈悲)를 실천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뵈메의 생각 속에서 그리스도가 타락한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이 땅에 오시고(성육신) 고난을 겪으시는 모습, 그리고 성령이 모든 창조물을 궁극적인 완성으로 이끌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시는 모습과 그 정신적인 방향에서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다. 즉, 개인적인 구원을 넘어 모든 존재의 보편적인 구원과 회복을 향한다는 점에서 두 생각은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 물론, 뵈메의 생각은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 전통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창조주 하나님, 그리스도를 통한 유일한 구원, 그리고 성경의 권위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핵심 가르침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인간과 세계가 지금은 불완전하고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지만,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존재가 원래의 완전함과 조화를 되찾아 영원한 평화와 기쁨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적인 비전은, 서로 다른 언어와 상징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두 위대한 영적인 전통이 함께 나누는 깊은 통찰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교는 특정 종교나 문화의 경계를 넘어 인류가 추구해 온 보편적인 영적 가치와 궁극적인 희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