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수 놓은 나의 하루
내 이름은 '운명'이예요.
우리 마을은 ‘시간의 방앗간’이라고 불렸어요.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다른 어른들처럼 방앗간으로 갔죠.
그리고 ‘하루’라는 이름의,
내 몸보다 더 크고 무거운 맷돌을 돌렸어요.
맷돌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한 바퀴 돌면 해가 떳다가 사라졌어요.
맷돌 아래로는 ‘어제’라는 이름의 희뿌연 잿빛 가루가 수북이 쌓여만 갔죠.
내 발밑에는 내가 어제 돌렸던 잿빛 가루가 쌓여 있었어요.
그저께 돌렸던 가루도,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돌렸던 가루도
모두 똑같은 회색 먼지가 되어 발목을 잡았죠.
어제의 나는 그냥 먼지가 되어버린 거예요.
사람들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어요.
기쁨도 슬픔도 모두 저 잿빛 가루가 되어버린 지 오래니까요.
마을은 어제의 먼지 속에서 아주 천천히,
소리 없이 가라앉고 있었어요.
나는 늘 궁금했어요.
‘어차피 먼지가 될 오늘이라면, 왜 살아야 할까?’
나는 잿빛 가루가 너무나 싫었어요.
차갑고, 메마르고, 아무런 향기도 없었거든요.
저 먼지 속에서는 어떤 새로운 꽃도
피어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간절히 바랐죠.
단 하루라도 좋으니,
잿빛 가루가 되지 않고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그
런 하루를 살아보고 싶다고요.
어느 날, 나는 맷돌을 돌리던 손을 그냥 놓아버렸어요.
그리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죠.
잿빛 먼지가 쌓이지 않은 곳,
마을의 가장자리 끝까지요.
그곳에는 바람과 햇살로 짠 것 같은
작은 오두막에 ‘기억을 깁는 할머니’가 살고 계셨어요.
할머니의 손은 낡은 천 조각 같았지만,
어떤 먼지도 묻어 있지 않았어요.
할머니는 내 텅 빈 눈을 보며 물으셨죠.
“시간의 무게에 짓눌렸구나, 아가야.
너의 하루는 왜 빛을 내지 못하는 게냐?”
나는 와락 눈물이 쏟아졌어요.
“제 하루는 곧 어제의 먼지가 될 뿐인데요.
붙잡아도 소용없는 걸요.”
할머니는 조용히 웃으시며
작고 투명한 모래시계 하나를 건네주셨어요.
그 안은 텅 비어 있었죠.
“시간의 마법을 풀고 싶다면,
이 모래시계 안에
‘다시 살아도 좋을 순간’의
빛나는 모래알을 단 하나만 담아오너라.
영원의 무게를 견디는 모래알 말이다.”
***
‘다시 살아도 좋을 순간이라니!'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그건 분명 아주 신나고 멋진 순간일 거라고 생각했죠.
마침 마을에서 가장 큰 잔치가 열렸고,
나는 달리기 경주에 나갔어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달려 일등으로 들어왔을 때,
사람들이 내 이름을 외치며 박수를 쳐주었죠.
바로 그때다 싶어 발밑의 흙을 한 줌 집어 들었어요.
하지만 손안에서 빛나던 칭찬의 소리들은
이내 바람처럼 흩어지고,
손에 남은 것은 평범한 잿빛 먼지뿐이었어요.
기쁨은 너무나 짧고 가벼워서,
영원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던 거예요.
나는 실망해서 다시 할머니를 찾아갔어요.
할머니는 내 잿빛 손을 보며 말씀하셨죠.
“아가야, 가장 반짝이는 것은 가장 새로운 것이 아니란다.
가장 오래되고 평범한 것을,
네 온 마음으로 처음처럼 만날 때 비로소 빛이 난단다.”
***
나는 할머니의 말을 곱씹으며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날 저녁,
나는 부엌에서 어머니가 빵을 굽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죠.
늘 보던 지루한 풍경이었어요.
하지만 나는 할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마치 세상에서 처음 보는 것처럼
온 마음으로 그 순간을 마주했어요.
어머니의 주름진 손이 하얀 밀가루를 반죽하는 모습.
그것은 단순히 빵을 만드는 손이 아니었어요.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 또 그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 이어져 온,
수만 번 반복된 따뜻한 사랑의 몸짓이었죠.
화덕 속에서 빵이 노릇하게 부풀어 오르는 고소한 냄새.
그것은 땅이 길러낸 밀의 이야기가
불의 도움으로 노래가 되는 순간이었어요.
나는 갓 구운 빵을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그 따스함 속에서 수천 년의 시간과
어머니의 사랑을 함께 맛보았답니다.
나는 놀라서 부엌의 밀가루를 살짝 쥐어봤어요.
손안에서 따뜻한 등불처럼 희미한 빛이 잠시 반짝였어요.
나는 알았죠.
아주 중요한 비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요.
***
다음 날이었어요.
나는 길모퉁이에서 작은 아이가 넘어져 우는 것을 보았죠.
무릎에서는 새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어요.
예전 같았으면 ‘아프겠다’ 생각하고 지나쳤을 거예요.
어차피 그 아이의 슬픔도, 아픔도,
내일이면 그저 잿빛 먼지가 될 테니까요.
하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달려갔어요.
내 옷자락을 찢어 아이의 무릎을 닦아주었죠.
아이는 아프고 서러워서 더 크게 울었어요.
나는 아이를 가만히 안아주었어요.
아이의 뜨거운 눈물과 떨리는 작은 몸,
그리고 피가 배어 나오는 아픔이
고스란히 내 마음으로 전해져 왔어요.
그 순간은 결코 즐겁지 않았어요.
오히려 아프고 슬픈 순간이었죠.
나는 아이의 귓가에 조용한 노래를 불러주었어요.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나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답니다.
바로 그때, 나는 깨달았어요.
이 순간이야말로,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을 순간이라는 것을요.
아픔과, 눈물과, 나의 작은 친절과, 눈물 너머의 미소까지.
이 모든 것이 합쳐진 이 순간은
너무나 무겁고, 너무나 진실해서,
결코 잿빛 가루로 변할 수 없다는 것을요.
***
나는 할머니에게 달려갔어요.
텅 빈 모래시계를 내밀며 말했죠.
“할머니, 빛나는 모래알은 찾지 못했어요.
하지만, 다시 살아도 좋을 순간을 찾았어요.
아프고 슬펐지만, 온 마음으로 사랑한 순간을요.”
바로 그때였어요.
나는 보았어요.
내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빛이 되어,
텅 비었던 모래시계 안에서
반짝이는 모래알 하나로 태어나는 것을요.
할머니는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어요.
“이제 그 모래시계를 뒤집어 보렴.”
내가 모래시계를 뒤집자,
빛나는 모래알이 아래로 떨어지며
한 줄기 영롱한 빛을 뿜어냈어요.
그 빛이 마을의 잿빛 먼지 위로 퍼져나갔죠.
그러자 쌓여 있던 어제의 가루들이 사라지면서,
저마다의 빛깔로 반짝이기 시작했어요.
어머니가 빵을 굽던 시간의 가루는
따스한 황금빛으로.
친구가 넘어져 울던 시간의 가루는
슬픈 눈물의 은빛과 용기의 붉은빛으로.
사람들의 모든 순간들이
저마다의 의미를 되찾고 빛을 발하기 시작했답니다.
시간의 방앗간 사람들은
맷돌 돌리기를 멈추고 그 빛을 바라보았어요.
그리고 처음으로 깨달았죠.
자신들의 하루하루가 결코 헛된 먼지가 아니었다는 것을요.
***
이제 나는 더 이상 잿빛 마을의 아이가 아니에요.
나는 시간의 무게를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순간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죠.
이제 나는 맷돌을 돌리지 않아요.
대신, 나의 하루를 깁고, 꿰매고, 아름다운 수를 놓아요.
슬픈 날에는 은실로,
기쁜 날에는 금실로 말이에요.
내 이름은 '운명'.
나는 오늘을,
영원히 다시 살아도 좋을 나의 첫날처럼 살아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