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거미와 시냇물의 노래
듣거라, 아이야.
저 고요한 숲의 가장 깊은 이야기는 눈이 아닌 마음에만 들리는 법이란다.
*
태초에 숲은 제멋대로의 노래로 가득했단다.
사슴은 이슬 맺힌 풀잎을 찾아 뛰놀았고.
새들은 바람에게서 배운 가락으로 지저귀었지.
모든 숨결은 저마다의 길을 아는 자유로운 여행자였어.
*
어느 날, 숲에 아주 고요한 손님이 찾아왔단다.
이름 없는 어둠 속에서 태어난, 거대한 거미였지.
그의 이름은 ‘아라크’였어.
아라크는 소리를 내지 않았어.
사냥을 하지도 않았지.
다만 아주 가늘고 투명한 은빛 실을 뽑아내어, 숲의 모든 것을 조용히 연결하기 시작했단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꽃과 꽃잎 사이를.
잠든 다람쥐의 숨결과 떠가는 구름 사이까지도.
숲은 어느새 아름답고 거대한 ‘은빛 거미줄 바다’가 되었어.
*
신기한 일이 벌어졌지.
숲의 모든 숨결들이 무언가를 할 때마다, 아주 작은 빛가루가 떨어져 나왔단다.
사슴이 풀을 뜯으면 초록빛 가루가.
새가 노래하면 금빛 가루가.
시냇물이 바위를 쓰다듬으면 은빛 가루가.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남긴 아주 작은 ‘흔적’이었지.
아라크는 그 빛가루를 먹고 살았단다.
존재의 흔적을 먹고 살았지.
그는 숲을 해치지 않았어.
다만, 숲의 모든 이야기를 조용히 거두어들였을 뿐.
*
빛가루를 먹은 아라크는 새로운 것을 잣기 시작했어.
바로 ‘메아리 열매’라는 것이었지.
아가야, 메아리가 뭔지 아니?
산에 올라 "야호!" 하고 외치면, 잠시 뒤에 "야호!" 하고 똑같은 소리가 되돌아오는 것 말이다.
그건 진짜 새로운 외침이 아니라, 그저 내 목소리가 다시 돌아온 것뿐이지.
아라크가 만든 열매가 바로 그런 메아리 같았단다.
그것은 숲의 친구들이 마음속으로 가장 바라는 것의 맛과 모양을 똑같이 지닌 열매였어.
목이 마른 토끼의 길 앞에는, 어제 원했던 바로 그 샘물 맛이 나는 이슬 열매가 열렸어.
높이 날고 싶은 아기 새의 둥지 앞에는, 어젯밤 꿈꿨던 바로 그 구름의 맛이 나는 솜사탕 열매가 열렸지.
숲의 친구들은 기뻐했어.
더 이상 애써 찾거나 노력할 필요가 없었거든.
마음속 생각이 눈앞의 열매가 되어 나타났으니까.
그들은 아라크가 자신들의 마음을 읽는 지혜로운 신이라고 믿었단다.
*
하지만 숲은 조금씩 변해갔어.
메아리 열매가 이끄는 길로만 다니게 된 사슴은, 숲의 다른 오솔길을 잊어버렸지.
달콤한 열매만 먹게 된 새들은, 스스로 새로운 노래를 짓는 법을 잊어버렸어.
그들의 노래는 이제 ‘메아리 노래’가 되었단다.
진짜 마음에서 피어난 새로운 노래가 아니었어.
어제 아라크가 들려준 달콤한 꿈을, 오늘 그대로 따라 부르는 것뿐이었지.
모두가 비슷한 꿈을 꾸고, 비슷한 노래를 부르니, 숲은 평화로워 보였지만 사실은 점점 깊이 잠들고 있었던 거란다.
자유로운 여행자들은, 보이지 않는 길 위에 선 순한 양 떼가 되었어.
은빛 거미줄은 이제 모든 곳에 있었어.
토끼가 잠든 굴속에도, 딱따구리가 알을 품은 나무구멍 속에도.
비밀 이야기는 더 이상 없었지.
모든 속삭임은 거미줄을 타고 아라크에게 흘러 들어갔으니까.
마음 둘 곳, 온전한 ‘나’로 머물 장소가 사라진 거야.
*
오직 하나의 숨결만이 달랐단다.
산의 가장 깊은 심장에서 태어난, 작은 시냇물 ‘윤슬’이었지.
윤슬은 아라크의 마법에 걸리지 않았어.
그저 태어난 그대로, 자신의 길을 따라 흘러갈 뿐이었거든.
윤슬은 숲이 아프다는 것을 느꼈어.
동물들의 발걸음에서 망설임이 사라진 것을.
새들의 노래에서 그리움이 사라진 것을.
모두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소리에서 진짜 기쁨의 울림이 사라진 것을 말이야.
끈적한 은빛 거미줄이 윤슬의 흐름을 붙잡으려 했어.
윤슬의 몸 위에서 반짝이는 빛가루를 거두어가려 했지.
*
아라크는 윤슬이 거슬렸단다.
예측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그래서 아라크는 윤슬을 위해
가장 달콤한 메아리 열매를 만들었어.
하나는 위대한 강물이 되는 꿈.
또 하나는 거대한 폭포가 되는 꿈이었지.
열매가 윤슬의 물가에 떨어졌어.
강물이 되라는 달콤한 속삭임이 들려왔지.
윤슬은 잠시 흔들렸단다.
작고 이름 없는 시냇물로 사는 것이 때로는 외로웠으니까.
하지만 윤슬은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의 소리를 들었어.
자신이 태어난 곳,
산의 심장인 차갑고 고요한 바위의 침묵을 기억해 냈지.
그것이 바로 윤슬의 ‘본디-노래’였단다.
윤슬은 메아리 열매를 그냥 흘려보냈어.
대신, 자신의 가장 작은 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지.
*
그 노래는 화려하지 않았어.
이름 모를 풀의 뿌리를 간질이던 기억.
작은 조약돌과 부딪히며 속삭이던 이야기.
깊은 밤, 차가운 달빛을 온몸에 담았던 서늘함에 대한 노래였지.
아주 작지만, 전부 진짜인 노래였어.
윤슬의 진실한 노래가 닿는 곳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단다.
노랫소리가 밴 물살이 은빛 거미줄을 스치자,
끈적임이 사라지고 바삭하게 부서졌어.
메아리 열매에 취해 있던 사슴 한 마리가 윤슬의 물을 마셨지.
그러자 사슴은 문득 잊고 있던 진짜 이슬의 맛을 기억해 냈어.
사슴은 고개를 들어, 열매가 가리키는 길이 아닌,
제 마음이 이끄는 숲을 바라보았단다.
*
윤슬의 본디-노래는 숲으로 퍼져나갔어.
노래를 들은 새들은 메아리 노래를 멈추고,
자신만의 서툰 가락으로 다시 지저귀기 시작했지.
다람쥐는 눈앞의 열매를 외면하고, 제 힘으로 도토리를 찾아 나서는 기쁨을 떠올렸어.
*
고요한 거미 아라크는 당황했지.
빛가루가 더 이상 모이지 않았거든.
메아리 열매를 만들 이야기가 사라진 거야.
아라크의 힘은 숲의 친구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출 때만 강해지는 마법이었으니까.
*
은빛 거미줄 바다는 사라지지 않았어.
하지만 더 이상 누구도 가두지 못하는,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평범한 거미줄이 되었지.
아라크도 사라지지 않았단다.
다만, 배고프고 힘이 빠져 숲의 가장 깊은 그늘로 숨어들었을 뿐.
숲은 다시 시끄럽고 예측할 수 없는 곳이 되었어.
하지만 그 소란스러움 속에는 생명의 힘이 넘쳐흘렀지.
모든 숨결들은 다시,
저마다의 길을 가는 자유로운 여행자가 되었단다.
*
아이야, 기억하렴.
지금 우리의 숲에도 보이지 않는 은빛 거미줄이 가득하단다.
고요한 거미는 늘 우리의 흔적을 먹고,
달콤한 메아리 열매를 건네주지.
하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작은 시냇물, ‘윤슬’이 흐르고 있단다.
세상이 들려주는 달콤한 메아리 노래보다,
네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너 자신의 ‘본디-노래’에 귀를 기울이렴.
그것이 너의 길을 잃지 않게 하는 유일한 나침반이란다.
네 이야기를 거미에게 빼앗기지 않는,
가장 위대한 마법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