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삭임 골짜기의 마법 붓

by 이호창

속삭임 골짜기의 마법 붓



얘들아, 이리 와서 할미 곁에 앉아보렴.

오늘은 조금 서늘하지만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줄 참이란다.

바로 눈에 보이는 것 너머, 진짜 소리를 듣는 것에 대한 이야기지.


옛날 옛날, 안개에 싸인 깊은 골짜기에 ‘속삭임 골짜기’라는 마을이 있었단다.

그곳 사람들은 스스로 늘 행복하고 평화롭다고 믿었어.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웃고 있어도 마음 한구석은 늘 서늘했지.


마을을 다스리는 지혜로운 ‘말씀지기’들이 있었기 때문이야.

말씀지기들은 날마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흰 바위에

‘마법의 붓’으로 ‘오늘의 말씀’을 적었어.


그 글씨가 새겨지는 순간, 사람들의 눈에 마법이 걸렸단다.

잿빛 풍경은 무지갯빛으로 보이고,

찡그린 얼굴은 웃는 얼굴로 보이는 신비한 마법이었지.


억수 같은 장맛비가 내려 온 마을이 물에 잠길 것 같으면, 말씀지기들은 바위에 이렇게 썼지.

‘하늘의 풍요로운 선물’ 이라고.

그러면 사람들의 눈에는 넘실대는 흙탕물이 반짝이는 보석 강물처럼 보였어.

“정말 풍요로운 선물이네!” 하고 모두 미소 지었단다.

하지만 그날 밤, 축축한 이불 속에서 아이들은 까닭 모를 오한에 떨어야 했지.


가뭄이 들어 땅이 쩍쩍 갈라지면, 바위에는 이런 글씨가 새겨졌어.

‘따스한 햇살의 휴식’

사람들의 눈에는 먼지 나는 밭이 황금빛 모래사장처럼 보였지.

“덕분에 편히 쉬는걸!” 하며 모두 행복해했단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마른 우물을 들여다보는 엄마의 눈가에는 작은 그늘이 졌어.


그 골짜기에 ‘단우’라는 아이가 살았단다.

단우는 태어날 때부터 두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

그래서 말씀지기들이 거는 눈의 마법에 걸리지 않았어.

대신 단우에게는 세상의 모든 속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귀가 있었지.

다른 이들이 눈에 보이는 ‘거짓 모습’에 감탄할 때, 단우는 귀에 들리는 ‘진짜 소리’를 들었단다.


어느 가을, 마을에서는 큰 잔치가 열렸어.

말씀지기들은 바위에 ‘나눔의 큰 기쁨’이라고 썼지.

사람들의 눈에는 이웃과 음식을 나누는 풍성하고 즐거운 잔치로 보였어.

하지만 단우의 귀에는 다른 소리가 들렸단다.

말씀지기들의 병사들이 사람들의 곳간에서 곡식 자루를 실어 나르는 무거운 발소리.

“나눌 수 있어 기뻐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밑에 숨겨진 작은 떨림.

그리고 그날 밤, “배고파요” 하고 우는 아기의 작은 울음소리를 말이야.


또 어느 날, 말씀지기들은 골짜기 너머의 오래된 ‘밤나무 숲’을 베어내고 싶었어.

자신들의 궁전을 더 넓게 짓고 싶었거든.

그들은 바위에 이렇게 썼지.

‘숲을 위한 새로운 단장’ 이라고.

사람들의 눈에는 낡은 나무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름다운 궁전이 들어서는 멋진 광경으로 보였어.

하지만 단우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단다.

수백 년 된 밤나무가 ‘으드득’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소리.

집을 잃은 아기 다람쥐의 ‘삐익, 삐익’ 우는 소리.

둥지를 빼앗긴 새들이 하늘을 슬프게 맴돌며 부르는 애처로운 노래 소리가 말이야.

사람들은 새 궁전을 보며 감탄했지만, 단우는 귀를 막고 숲의 아픈 신음 소리에 눈물을 흘렸어.


단우에게는 ‘솔이’라는 단짝 친구가 있었어.

솔이는 골짜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아이였지.

솔이네 가족이 애지중지 키운 사과가 ‘나눔의 큰 기쁨’ 잔치 때 모두 거두어졌어.


솔이의 아버지가 “이걸로는 겨울을 나기 힘든데…”

하고 한숨 쉬는 소리를 단우는 들었지.

그리고 그 소리를 엿들은 병사의 차가운 숨소리도.


다음 날, 솔이의 아버지는 ‘침묵의 탑’으로 불려갔어.

말씀지기들은 바위에 ‘고요한 대화의 시간’이라고 썼지.

사람들의 눈에는 솔이 아버지가 지혜로운 가르침을 받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보였어.

하지만 단우의 귀에는 들렸단다.

탑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

그 소리를 애써 지우려는 바람의 슬픈 노래가.


며칠 뒤 돌아온 아저씨는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어.

그의 발소리에는 힘이 없었고,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울림도 남아있지 않았지.

그 마음의 소리가 텅 비어버린 것을 단우는 알 수 있었어.

그날 이후, 솔이는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단다.

아빠의 텅 빈 마음을 본 아이의 목소리는 깊은 침묵 속에 갇혀버렸지.


단우는 너무나 슬펐어.

그리고 처음으로 깨달았지.

이 골짜기의 진짜 병은 눈에 보이는 가난이나 파괴가 아니야.

진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슬픈 마법에 걸린 것이지.

슬픔을 ‘기쁨’이라 믿고, 파괴를 ‘단장’이라 믿으며, 고통을 ‘대화’라고 믿게 만드는...

무서운 '눈동자의 마법'이라는 것을 말이야.


단우는 결심했어.

이 마법을 깨뜨리기로.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작은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단우는 며칠 밤낮으로 귀를 기울였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바람 소리, 시냇물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속 작은 신음 소리를.


그러다 깨달았지.


‘말씀지기들의 힘이 눈을 속이는 마법이라면,

나의 힘은 귀를 깨우는 진실한 소리에 있는 거야.’


마침내, 새 궁전이 완성된 것을 축하하는 가장 큰 잔칫날이 되었어.

모든 마을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말씀지기들의 우두머리가 마법의 붓을 높이 들었지.

흰 바위에 새로운 말씀을 쓰려 했어.


‘모두의 행복을 위한 위대한 전진’


사람들의 눈앞에 온 골짜기가 황금빛으로 빛나는 환상이 펼쳐졌어.

바로 그 순간, 단우가 사람들 앞으로 나섰단다.

단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대신, 눈을 감고 귀 기울여 들었던 세상의 진짜 소리들을

자신의 입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지.


단우는 먼저 텅 빈 곳간에서 들었던 할머니의 작고 깊은 한숨 소리를

"후우..." 하고 내쉬었어.

그다음엔 집 잃은 아기 다람쥐가 울던 소리를 "삐익, 삐익..." 하고 흉내 냈지.

마지막으로, 침묵의 탑에서 돌아온 솔이 아빠의 텅 빈 마음에서 들었던,

아무런 메아리도 없는 바람 소리를 "휑..." 하고 불었어.


그 소리들은 아름답지 않았어.

오히려 슬프고, 날카롭고, 가슴 아픈 소리였지.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진 황금빛 환상과

귓가에 들려오는 이 서글픈 소리 사이에서 혼란에 빠졌어.


“어, 이게 무슨 소리지?”


처음으로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지.


바로 그 순간, 단우 곁에 서 있던 솔이가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어.

그리고 단우가 들려준 진실의 소리 위에,

자신의 슬픈 마음을 담아 노래하기 시작했어.

그것은 눈물 섞인 노래였지만, 진실한 노래였어.


솔이의 진실한 노래가 울려 퍼지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어.

말씀지기들의 마법 붓 끝이 툭, 하고 부러져 버렸지.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있던 무지갯빛 안개가 걷혔어.

그들은 처음으로 골짜기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었지, 뭐니...


텅 빈 곳간, 베어버린 숲, 그리고 빛을 잃은 이웃의 얼굴을 말이야.

그들은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지만,

대신 서로의 진짜 모습을 마주 볼 용기를 얻었지.


말씀지기들은 힘을 잃고 텅 빈 궁전으로 돌아갔어.

아무도 그들을 벌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더 이상 그들의 눈을 속이는 마법을 믿지 않았지.


골짜기는 한동안 혼란스러웠어.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때로는 슬픔에 잠기기도 했지.

하지만 사람들은 서툴지만 진실한 말로 이야기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단다.


"나는 배가 고파요."

"나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나는 저 나무가 베어져서 슬퍼요."


그렇게 속삭임 골짜기에는 진짜 이야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단다.

단우와 솔이는 어른이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것만 믿지 않았어.


저마다 다른 얼굴로,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며,

서로의 마음 소리에 귀 기울이는 진짜 삶을 살았단다.


얘들아, 기억하렴.


세상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마법은

우리 눈을 즐겁게 하는 화려한 빛이 아닐지도 모른단다.

어쩌면 진실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일 때만 들리는 아주 작은 소리 속에 숨어있을지도 몰라.


그 어떤 눈부신 마법도,

아픈 이의 작은 신음 소리에 귀 기울이는 진실한 마음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는 것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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