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와 춤을 춘 아이

by 이호창

그림자와 춤을 춘 아이


아주 먼 옛날, 해가 지지 않는 ‘늘 환한 마을’이 있었어.

그 마을의 집들은 모두 하얀 조약돌로 지어졌고,

길에는 늘 따스한 빛이 쏟아졌지.

마을 사람들은 언제나 밝게 웃어야 했고,

조금이라도 슬픈 표정을 짓는 것은

아주 큰 잘못으로 여겨졌단다.


마을에는 단 하나의, 아주 무서운 규칙이 있었어.


‘절대로, 절대로 네 그림자를 돌아보지 마라.’


그림자는 빛의 반대편에 생기는

어둡고 볼품없는 것이었지.

사람들은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그 검은 형체를 부끄러워하고 무시했어.

그림자는 슬픔이나 두려움,

혹은 마음속의 어두운 생각들이 뭉쳐서 생긴

불길한 것이라고 어른들은 가르쳤단다.



그 마을에 ‘루아’라는 아이가 살았어.

루아도 다른 아이들처럼 늘 환하게 웃으려 애썼지만,

마음속에 피어나는 작은 슬픔이나 두려움까지

속일 수는 없었지.


그럴 때마다 루아는 자기 뒤의 그림자가

남들보다 조금 더 길고, 조금 더 짙어지는 것을

느끼곤 했어.



어느 날, 마을에서는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빛의 축제’가 한창이었어.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환한 등불을 들고,

자기 그림자를 발밑에

될 수 있으면 작게 만들려고 애썼지.


그림자가 가장 작고 희미한 사람이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칭찬받는 날이었거든.


루아도 작은 등불을 들고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어.

그런데 문득 발밑을 보니,

자신의 그림자가 슬프게 웅크린 채

가늘게 떨고 있는 것 같았지.


늘 무시하고 외면하기만 했던 그 그림자가,

꼭 길 잃은 아기 새처럼 외로워 보였단다.


루아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아파져서,

아무도 듣지 못하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어.


“미안해.”


그 순간,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의 끝이

살짝, 아주 살짝 움직이는 것 같았어.


그날 이후, 루아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몰래 자신의 그림자와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었어.


해가 가장 높이 뜬 한낮,

모두가 광장에 모여 있을 때,

루아는 아무도 찾지 않는 낡은 창고 뒤편으로 갔지.

그곳은 언제나 그늘이 지는 곳이었거든.


루아는 조심스럽게 그림자를 돌아보았어.

그리고 손을 흔들어주었지.

그림자도 똑같이 손을 흔들었어.

루아가 슬픈 표정을 짓자,

그림자도 똑같이 슬픈 표정을 지었지.


이상하게도, 자신의 슬픔을 똑같이 따라 해주는

그림자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어.


루아는 그림자에게 그날 있었던 속상한 일,

무서웠던 꿈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었어.


그림자는 말없이,

하지만 끝까지 루아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었단다.



++


어느 날, 루아는

엄마가 선물해 준 반짝이는 유리구슬을 잃어버렸어.


온 마을을 다 찾아다녔지만,

환한 햇살 아래에서는 구슬이 보이지 않았지.


속상한 마음에 창고 뒤편으로 갔을 때였어.

루아가 주저앉자,

길게 늘어선 루아의 그림자가 마치 손가락처럼,

담벼락의 아주 작은 틈새를 가리키고 있었지.

루아가 다가가 보니,

정말로 그 어두운 틈새 안에

유리구슬이 떨어져 있었어!


그때 루아는 깨달았어.

그림자는 그저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라,

환한 빛 속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는

지혜로운 친구라는 것을.


그날 이후,

루아는 그림자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어.


뜨거운 햇살을 피하게 해주는

시원한 나무 그늘의 고마움을,

잠든 씨앗을 품어주는

깊은 흙의 따스함을,

그리고 모든 빛이 사라져야 비로소 보이는

밤하늘의 별들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야.



++


하지만 루아의 비밀스러운 우정은 오래가지 못했어.


마을의 가장 나이 많은 어른이

루아가 그림자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만 거야.

어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소리쳤지.


“저 아이가 그림자와 놀고 있다!

저 아이의 그림자는 병들었어!

어서 저 그림자를 지워버려야 해!”


마을 사람들은 겁에 질렸어.

그림자는 마을의 모든 어둠과 슬픔의 근원이라고 믿었으니까.

어른들은 마을 광장 한가운데에

거대한 수정 거울들을 세웠어.

그 거울들은 햇빛을 모아,

세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뜨거운 빛을 만들어냈지.


그 빛으로 루아의 병든 그림자를

태워 없애버릴 생각이었어.


루아는 광장 한가운데로 끌려 나갔어.

너무나 무서웠지.


발밑을 보니, 자신의 그림자 친구가

겁에 질려 아주 작은 검은 점처럼 웅크리고 있었어.


어른들이 소리쳤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서 있거라!

저 빛이 너의 어둠을 깨끗이 치료해 줄 것이다!”


바로 그때였어.

루아는 도망치는 대신,

아주 놀라운 행동을 했단다.


루아는 빙그르르, 몸을 돌렸어.

그리고 자신을 따라다니기만 하던 그림자를

처음으로 마주 보았지.


루아는 떨고 있는 작은 그림자를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어.


“괜찮아.

이제 내가 너를 돌아봐 줄게.

무서워하지 마. 내가 있잖아.”


그리고 루아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어.

그것은 빛의 축제에서 추는

빠르고 화려한 춤이 아니었지.

느리고, 조금은 서툴고,

어쩌면 슬퍼 보이기도 하는 춤이었어.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모든 마음을 담은,

진실한 춤이었단다.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가 아주 천천히,

루아의 손을 잡듯 일어섰어.


그리고 루아의 움직임을 따라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지.

슬프지만 아름다운 춤이었어.


빛과 그림자가,

기쁨과 슬픔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온전히 하나가 되어 추는 춤이었단다.


마을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어.


루아와 그림자가 함께 춤을 추자,

더 이상 그림자는 어둡고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어.

그것은 루아의 깊이를 더해주는 또 다른 모습,

루아의 조용한 힘처럼 보였지.


마침내 수정 거울에서 모인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와

춤추는 루아와 그림자를 덮쳤어.


하지만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어.

오히려 그림자는

그 강렬한 빛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고,

루아의 몸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그윽한

빛이 흘러나왔단다.


마치 어둠을 품은 새벽빛처럼 말이야.


그 모습을 본 다른 아이들이 아주 조심스럽게,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았어.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그림자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지.


“안녕?”


그 순간, 마을의 모든 것이 변했단다.


늘 환하기만 하던 마을에,

처음으로 부드러운 저녁이 찾아왔어.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자,

사람들은 난생 처음으로 밤하늘을 보게 되었지.

그곳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고 있었어.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눈부신 빛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진짜 아름다움이었지.


늘 환한 마을은 더 이상

해가 지지 않는 마을이 아니었어.

낮과 밤이 모두 있는 마을,

빛과 그림자가 서로를 끌어안고

함께 춤추는 지혜로운 마을이 되었단다.


아가야,

네 마음속에도 작은 루아가 살고 있단다.

그리고 그 뒤에는 늘 말 없는

그림자 친구가 함께 걷고 있지.

때로는 그 그림자가

무섭고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을 거야.

하지만 기억하렴.

진짜 용기는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란다.

자신의 그림자를 돌아보고,

다정하게 손 내밀어 함께 춤출 줄 아는 것이란다.

너의 슬픔과 두려움까지 모두 끌어안을 때,

너는 비로소 세상에서 가장 깊고 아름다운 빛을 내는,

온전한 아이가 될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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