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읽는 두 아이

by 이호창

나무를 읽는 두 아이



해리는 오늘도 공책을 폈다.

연필심 끝을 혀로 한번 쓱 핥고는, 마을 어귀의 커다란 느티나무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오늘 새로 둥지를 튼 새는 총 세 마리. 나무 밑동 개미집 입구 확장 공사 중.’


해리에게 나무는 거대한 아파트 같은 것이었다.

수많은 생명이 사는, 아주 오래되었지만 튼튼한 아파트.


해리의 가장 친한 친구인 현수는 그 나무를 다르게 생각했다.

저만치 나무 아래에 앉아 조약돌을 귀에 대고 있는 녀석이 바로 현수다.

자기 딴에는 나무의 마음을 듣는다나 뭐라나.

해리는 피식 웃으며 공책에 나무의 키를 어림해 적었다.


어느 날, 동네 이장님이 현수와 해리를 불렀다.


“너희가 우리 동네 나무 박사들이라며? 저 나무 앞에 사람들에게 나무를 소개하는 안내판을 하나 세우려고 하는데, 어떤 이야기를 담으면 좋을지 너희가 도와주지 않겠니?”


그날부터였다. 현수와 해리가 함께 나무 아래에 있는 것이 어색해진 것은.


해리는 며칠간 공책에 쓴 내용을 정리해 자신만만하게 발표했다.


“이 나무는 느티나무입니다.

제가 관찰한 사실에 따르면 나이는 백쉰 살이 넘었고, 스물일곱 종류의 생물이 삽니다.

여름에는 운동장만 한 그늘을 만들죠. 이게 정확한 사실입니다.”


해리는 현수도 당연히 동의할 줄 알았다.

하지만 현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건 나무의 겉모습일 뿐이야.

이 나무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오래된 편지라고.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가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의 비밀을 들어준 수호자야. 이게 진짜 나무의 진실이야.”


해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증명할 수도 없는 말이잖아.


'저런 걸 어떻게 안내판에 써?'


“현수야, 그건 그냥 네가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야.

사실이 아니라고.”


“해리야, 숫자로만 가득한 네 사실에는 마음이 없잖아!”


마음이라니. 해리는 현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갑자기 아주 먼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여름 끝자락, 마을에 커다란 비바람이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어른들이 나무를 보며 수군거렸다.


“저러다 쓰러지면 큰일인데. 미리 베어내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해리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이 나무가 사라지면 저 스물일곱 종류의 생명들은 다 어디로 가란 말인가!


고개를 돌리자, 현수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무를 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둘은 같은 마음이 되었다.


그날 밤,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을 때, 둘은 약속이나 한 듯 나무 아래에서 만났다. 거대한 나무 밑동에 등을 기댄 채, 세상을 삼킬 듯 으르렁대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그때였다. “쩌저적!”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나뭇가지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 아래에는 작은 새 둥지가 있었다.


순간 해리의 머리가 게임처럼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띠디딧. 가지의 무게, 바람의 방향, 둥지의 위치. 답이 나왔다.


“현수야, 저쪽이야! 가지는 저쪽으로 떨어질 거야!”


해리는 자신의 계산을 믿고 비바람을 뚫고 달려가 새 둥지를 더 튼튼한 가지 아래로 옮겨주었다. 해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대한 나뭇가지가 ‘쿵!’ 소리를 내며 바로 해리가 말했던 자리에 떨어졌다.


해리의 ‘사실’이 작은 생명들을 구한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천둥소리에 놀란 마을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른들의 불안한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날아왔다. 저게 뭐 하는 짓이지? 현수가 갑자기 나무에 귀를 대더니, 아주 크고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듯 외치기 시작했다.


“여러분, 무서워하지 마세요! 이 나무가 제게 말해주고 있어요! 백 년 전 더 큰 비바람도 이겨냈다고요! 여러분의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이 그늘에서 소나기를 피했대요! 이 나무는 우리 모두의 용기를 기억하고 있어요!”


해리는 현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현수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사람들은 창밖의 흔들리는 나무가 더 이상 무서운 괴물이 아니라, 함께 폭풍우를 견디고 있는 친구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현수의 ‘진실’이 사람들의 마음을 구한 것이다.


길고 무서운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나무는 몇 개의 가지를 잃었지만, 늠름하게 서 있었다. 해리가 현수에게 다가와 말했다.


“현수야, 어젯밤 네 이야기가 없었다면 모두 두려움에 떨었을 거야. 너의 진실은 힘이 있구나.”


현수도 해리를 보며 미소 지었다.


“해리야, 어젯밤 너의 사실이 없었다면 아기 새들은 무지개를 보지 못했을 거야. 너의 사실은 생명을 살리는구나.”


두 친구는 멋쩍게 웃었다. 해리와 현수는 나무를 읽는 방법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두 아이는 함께 마을 어른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나무 앞에 설 새로운 안내판의 문구를 건넸다.


그 이름표의 한쪽 면에는 해리가 쓴 글씨가 새겨졌다.


‘이 나무는 느티나무이며, 나이는 백쉰 살이 넘었습니다. 스물일곱 종류가 넘는 생명들의 소중한 집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표의 다른 한쪽 면에는 현수가 쓴 글씨가 새겨졌다.


‘이 나무는 하늘의 별과 땅의 뿌리가 만나는 곳입니다. 우리 마을의 모든 꿈과 이야기를 품고 있는 심장입니다.’


그 후로 두 아이는 늘 함께였다.


해리는 때때로 공책을 덮고, 현수가 건네는 조약돌을 귀에 대 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친구의 어깨에 기댄 등이 따뜻했다.


현수는 가끔 눈을 감는 대신, 해리의 돋보기로 작은 무당벌레의 일곱 개 점을 세어보며 감탄했다.


세상은 사실과 이야기, 그 모두를 껴안을 때 비로소 온전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을, 두 아이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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